경주의 주상절리에서
"엄마, 20년 전이 지금 하고 달라진 건 뭐야?"
" 글쎄.. 휴대폰이 그때는 없었지? 아니, 있었지만 스마트폰처럼 인터넷이 되지는 않았던가? 그리고 텔레비전이 지금보다 뒤가 불룩했었지? "
시대의 변화에 무딘 나는 아이의 질문이 귀찮아서 되는 대로 대답하고 있었다.
" 그럼, 엄마 어릴 때에도 자동차 있었어? 텔레비전 있었어?"
" 당연히 있었지. 지금처럼 모든 집에 다 있는 건 아니었지만."
아는 답을 만난 나는 자신 있게 말했다.
" 그럼, 지금과 별 차이도 없었네. "
아이는 시시한 듯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아직 세월의 변화를 시각적으로 느껴보지 못한 아들은 자신이 살아보지 않은 20년의 시간이 200년 전의 시간 정도로 멀리 느껴지나 보다. 그래서 아들의 시간에서는 20년 전 사람들도 갓 쓰고 말을 타고 있을 것만 같은 옛날인가 보다.
정작 나에게 20년 전은 방금 전 같으면서도 변화의 속도는 크게 느껴지는 것이, 심리적으로는 가깝지만 물리적으로는 낯설게 느껴지는 세상이다. 아이에게는 지금과 별반 다르지 않은 자동차가 다니고 휴대폰을 사용하는, 변함없는 현대사회인 20년 전이 내게는 업무 처리의 혁신, 인터넷의 발달, 사람들의 사고방식의 변화 등 대부분이 크게 변한 고전시대로 느껴지니 말이다. 이것이 나이 든다는 것일까?
연말을 맞아 경주의 주상절리에 갔다. 지난 여름에 갔던 곳이기도 하다. 태곳적 용암이 동해 앞바다로 흘러내려 차가운 바닷물을 만나서 뜨거운 연기를 뿜으며 만들었을 이 육각기둥 모양의 돌이 지금 여기에 꽃처럼 펼쳐져 있다. 태고의 시간을 만났던 올여름 어느 날, 나는 이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 사는 20년 전 이래로 한 번도 보지 못한 친구가 보고 싶어졌었다. 그래서 주상절리 전망대 의자에 앉아 간단한 안부 메시지를 보냈었다. 그리고 몇 달 후 다시 찾은 이곳은 여전히 태고의 시간을 껴안은 육각기둥들이 파도의 흰색 포말을 덮어쓰면서도 말간 얼굴 내밀며 지금의 시간을 지키고 있었다.
그리고 바람에 나부끼는 해돋이 행사 현수막이 이제 곧 새로운 1년이 시작됨을 알려주고 있었다. 생각해보면 1년이라는 단위는 인위적인 것일까, 자연적인 것일까? 인간이 편리하고자 만들어낸 달력의 단위일 뿐이니 무시해도 되는 것은 아닐까? 아니면 행성 지구의 여행이 다시 시작되는 자연의 엄숙한 출발점이니 거스를 수 없는 숙명인 걸까? 나이 든다는 것은 해를 거듭할수록 시간 가속도의 압박감을 더욱 크게 느끼게 한다. 10대에게는 10 킬러 미터, 50대에게는 50 킬러 미터로 달린다는 이 시간 가속도의 법칙을 과학적으로 증명해볼 만한 과제라고 말한다면 우스운 소리일까?
태고의 주상절리가 50년의 세월도 모르는 한 어리석은 인간의 중얼거림에 코웃음을 날리듯 해돋이 현수막은 요란하게 펄럭거리고 있었다. 그 여름 이후 친구에게 답신은 오지 않았고, 지난달 짧은 부고로 너는 내게 마지막 응답을 보내었다.
2018년을 하루 앞둔 오늘, 나는 나이를 초 단위로 느끼며 주상절리의 긴 시간 속에 숨겨진 우주를 잠깐 조우한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