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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지지. 사라지지 않는 그 무언가

최은경의 <아주 희미한 빛으로도> 중에서

by 연구하는 실천가

방학이라 매일 도서관에서 이런 저런 책을 읽는다. 그런데 돌아서면 내용이 기억나지 않는다. 이 병을 고치고자 다 읽은 책은 무조건 짧게라도 이렇게 허접한 리뷰를 남기고자 한다. 그 첫번째 책은 최은영 작가의 <아주 희미한 빛으로도>에서 마지막 이야기 - 사라지는, 사라지지 않는-이다. 이 이야기를 선택한 이유는 앞선 이야기들이 기억나지 않기 때문이다. 며칠전에 읽었건만 슬프고 놀랍게도. 그래서 이 마지막 이야기라도 휘발되지 않기 위해 급하게 리뷰를 남겨 본다





주인공 기남은 어릴 때 가난하지는 않지만 자식이 많다는 이유로 남에게 맡겨진 딸이다. 그녀는 한 부잣집에서 자신을 초등학교까지 보내주며 키워준다는 사실에 감사한 마음을 가지려고 노력한다. 책에서 그녀는 그들의 가족이 되기 위해 노력한다고 표현되어 있다. 훗날 자신을 키워주는 -사실, 키워줬다기 보다 부려먹었지만- 댓가로 소정의 돈을 친부모에게 받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며 배은망덕이라는 표현을 쓰는 그들에게 씁쓸함과 배신감을 느낀다. 기남은 자신에게 잘해주는 남편을 만나서도 마찬가지다. 결국 그 보살핌과 관심은 기남의 남편에게 자신이 필요했기 때문일 뿐 진심은 아니었다는 사실을 아프게 깨달아야 했다. <아주 희미한 빛으로도>라는 제목으로 묶여 있는 이 책 속 단편 속 여성 인물들 대부분이 그렇듯, 이 이야기에서도 여성 주인공은 누군가의 작은 보살핌과 관심조차도 진심이길 바라며 팍팍한 현실을 회피하며 견디는 존재이다.



그런, 기남이 진짜 마음을 기댈 수 있는 존재는 아이러니하게도 친딸 우경이 아니라, 의붓딸 진경과 우경의 아이인 손자 마이클뿐이다. 자신에게 진심으로 따뜻한 손을 내밀어준 어린 의붓딸 진경과 어린 손자 마이클은 기남을 기남 자체로 사랑한다. 반면, 홍콩에 살고 있는 친딸 우경은 화려한 홍콩의 야경만큼 차갑고 화려하다. 그런 우경은 친엄마인 기남보다 육체와 정신이 단단하고 당당한 미국에 사는 시어머니와 더 편안한 교감과 도움을 주고 받는다. 인간은 결국 자기가 기대고 싶은 사람이 있고, 함께 해서 더 힘든 사람이 있는 법이다. 우경에게 기남은 착하기만하고 약하고 여린 존재일 뿐 든든한 버팀목이 되지 못하는 존재이다.


이 이야기 속에서 기남은 세 가지 물건을 잃어버린다. 첫번째는 공항에서 기남이 우경과 우경의 아이에게 주려고 가져온 물건이 담긴 캐리어이다. 두번째는 우경의 집에서 잃어버린 기남의 귀걸이이다. 세번째 물건은 쇼핑몰에서 잃어버린 크로스백이다. 셋다 잃어버린 원인도 없고 찾을 수 있는지도 알 수 없는 결말로 끝이 난다. 나는 작가가 이 물건들의 분실을 이야기의 초반, 중반, 후반에 배치한 이유가 궁금했다. 기남은 우경과의 관계 개선에 대한 기대를 가지고 홍콩으로 여행을 온다. 관계 개선의 희망이 될 물건들이 담긴 캐리어가 공항에서 수하물 전달 과정에서 누락되어 사라진다. 우경과의 일차 연결선이 여기서 끊어지는 느낌이다.


두번째 물건인 귀걸이의 분실은 식구가 아니면서 식구로 지내는 과거의 자신과 유사한 현재 우경의 집 헬퍼인 제인을 우경이 의심하는 부분과 연결된다. 기남은 자신의 식모 생활의 부끄러움을 우경에게 들킨 것처럼 현재의 우경에게 거부되는 느낌을 받는다. 세번째는기남은 쇼핑몰을 구경하면서 과거 자신을 버렸던 가족들이 자신을 받아들여줄 지 모른다는 일말의 기대로 그들의 잔치에 참석했다가 좌절했던 기억을 떠올린다. 이 쇼핑몰에서 기남이 마이클에게 줄 선물을 사면서 가방을 잃어버린 것을 깨닫고 결국 물건을 사지 못하게 된다. 우경의 집에 돌아온 기남은 화장실 문을 잠그지 않고 화장실 물을 내리지 않은 자신을 지적하는 우경이 -자신의 유일한 핏줄인- 기남을 가족으로 받아들일 생각이 없어 보인다. 우경의 눈에 한없이 부끄러울 기남의 과거와 현재는 그렇게 기남은 스스로 못난 사람이라고 생각하며 얼굴을 붉히는데 그런 기남을 마이클은 다정하고 귀엽다고 한다. 그런 마이클을 보며 기남은 자신은 결국 마이클에게 사라질 존재-더 이상 우경과 교류가 없을 것이므로-이지만, 그녀에게 마이클은 사라지지 않는 존재임을 깨닫는다.


여성의 삶과 인간의 삶. 그 가운데서 기남은 받아들여짐을 경험하지 못하는 삶 속에서 자신과 닮은 의붓딸 진경의 좌절에 괴로워하고, 남편을 닮은 친딸 우경에게 받아들여지지 못한다. 겉으로는 탁구를 배우며 자식 보러 해외여행을 다니는 기남은 평범한 노인이지만, 실상은 과거와 현재 속에서 가족들에게 받아들여지지 못하고, 받아들여지기 위해 노력하면 할 수록 자꾸만 뭔가를 잃으며 살아가는 텅빈 인간이 된다. 우리는 가족 또는 가까운 이들에게 소속되기를 바란다. 하지만 받아들여지는 것은 나의 선택이 아니라 그들의 선택이다. 나의 노력은 자꾸만 사라지고 만다. 하지만, 진정한 사랑은 그런 노력과 관계없이 나를 받아들여주는 이들에게 있다. 우리는 사라지는 것들이 아닌, 사라지지 않는 것들을 바라보며 살아야 한다. 가족이 아니더라도. 비록 마음 한 구석이 가끔 텅 비어도 그것은 삶의 작은 흉터일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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