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라는 실로 사람들의 입을 바느질했던 소련사회
조현병은 과거에는 정신분열증으로 불렸다 했다. 그런데 그 단어가 가진 느낌이 너무 부정적이라서 현재와 같은 어휘로 바뀌었다고 한다. 국립정신건강센터에 의하면 조현병이란 뇌신경계를 구성하는 신경회로들의 상호 작용에서 튜닝이 적절하게 이루어지지 않아 문제가 발생한 뇌기능 저하 현상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용어인 조현에서 유래한 것이다.
에스토니아를 비롯한 발트 3국에는 소련 시절 정신, 즉 사상과 현실이 분열되는 일이 자주 일어났었다. 뇌기능 저하 현상은 아니었지만 학교에서 배우고 언론에서 듣는 것과,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이 괴리되는 현상이 자주 발생했다. 학교에서는 마르크스와 레닌에 대해서 배웠지만 에스토니아 사람들은 핀란드 TV를 보면서 서방과 20세기의 상반된 현실을 적시에 파악할 수 있었고, 당시 유행어처럼 회자되던 '개방'과 '개혁'의 정의와 본질 사이에서 얼마나 차이가 있는지 다른 소련 지역보다 먼저 알아차릴 수 있었다.
누군가에는 그것이 미친 행동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광인들이 미친 행동이 가끔 천재적인 결과를 몰고 올 때가 있다. 다행스럽게도 이곳에 사는 광인들은 평화를 너무도 사랑했고, 50년간 변질되어갔던 사회를 튜닝하기 위해 거대한 피아노 줄처럼 그 길 위에 서기로 한 것이다.
1980년에도 명목상의 자유는 주어져 있었다. 제대로 튜닝되거나 방향이 잡히지 않은 그 자유라는 어휘는, 기타 줄을 튕기는 음악가의 심기를 건드리듯 여러 예술가들의 귀를 간지럽혔고, 그 기타 줄을 튜닝해야 한다고 앞서서 말한 장본인 중 한 분이 바로 이 헤인즈 발크 씨였다.
그분의 첫인상은 탈린 시내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수더분한 인상의 노익장이었다. 인터뷰는 에스토니아어로 진행이 되었으나 외국인과의 대화를 의식한 탓인지 일부러 더 또렷하고 맑은 목소리로 시종일관 인터뷰에 참여해 주셨다. 그래서 그랬던 것일까, 내 에스토니아어 실력이 벌써 이렇게 늘었단 말인가 하는 착각에 빠질 정도였다. 그만큼 듣는 사람의 입장을 잘 고려해주는 달변가였다.
당시 인터뷰를 진행했던 인민전선 박물관은 공휴일이었는데 에스토니아어를 할 줄 아는 한국손님에게 기꺼이 문을 열어줄 정도로 성의를 보여주었다. 외국어를 많이 알고 있다는 것이 항상 쓸모가 있지는 못할 지라도 가끔 사람들로 하여금 가슴을 움직이게 만드는 무언가를 이끌어내는 모양이다. 그게 측은지심이 되어서는 안 되는데 말이다.
헤인즈 발크는 소련 시절에도 에스토니아 인민공화국 예술동맹 총비서직을 역임하고 있었다. 소련 시절 스탈린이 살아있을 당시의 예술 경향은 이데올로기와 정당활동 홍보, 정치적 이념의 확산이 최우선이었고 다수의 예술가들은 예술의 완전한 자유를 원하며 이런 경향에 반기를 들었다. 그 결과 많은 이들이 숙청되거나 시베리아로 유형을 떠났다. 그러다가 스탈린이 세상을 떠나자 비로소 처음으로 서방 예술가들과의 소통이 시작되었다. 불가리아, 루마니아, 프랑스, 벨기에 등 사회주의뿐만 아닌 다양한 국가들과의 소통이 허락된 것이다. 그것은 오랜 예술가들의 꿈이었다. 그리고 1980년대 고르바초프에 의해 개혁과 개방 정책이 실시되면서 서방세계로 향한 숨통을 더 크게 틔워주었다.
소련 시절 그는 출판과 언론계에서 나름 이름난 인물이었다. 책 디자인이나 삽화 등을 주로 작업했으며 에스토니아 신문에 캐리커쳐를 그리기도 했다. 그의 작품이 초기부터 정치적인 것은 아니었다. 그냥 일반적인 인간관계와 남녀관계, 사랑 등을 주제로 유머와 해학이 담긴 작품을 많이 만들었다고 한다.
고르바초프의 개혁정책이 시작되면서 사회주의와 정치와 관련된 캐리커쳐도 제작했다. 그러나 개혁정책은 빛 좋은 개살구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닫기까지는 그리 많은 시간이 걸리진 않았다. 그는 사회주의를 비판한 캐리커쳐로 인해 많은 고초를 겪었다. 당의 반대로 그의 작품 개인전을 여는 것이 금지되었고 그의 작품을 공공장소에서 전시할 수도 없었다. 자유를 보장하겠다는 약속이 오히려 사람들의 자유를 억압하는 도구로 변질된 현실을 깨닫고 그는 사람의 입을 누군가가 자유(vabadus)라는 단어로 바느질하는 캐리커쳐를 발표했다. 바로 본질이 없는 자유에 대한 항거에 의미였다.
그리고 탱크 아래 깔린 사람이 에스토니아어로 teretulemast(에스토니아어로 ‘환영합니다’라는 뜻)라는 피켓을 들고 있는 만평도 세상에 공개되었다.
그것은 단지 그의 개인적인 예술적 작품 표현만이 아니었다. 당시 제한된 자유에 대해 함부로 입을 열지 못하던 분위기에서 거침없이 연필과 종이를 통해서 표현을 한 시도는 그에게 정치적 카리스마와 아우라를 씌워주었다. 그러던 그가 인민전선을 통해서 정치에 입문하게 된 기회는 예상치 못하게 찾아왔다.
여기서 우리는 에드가르 사비사르(Edgar Savisaar)라고 하고 하는 제3의 인물을 만나야 한다. 그는 에스토니아 최고의 정치적 카리스마를 지닌 인물로 에스토니아 최대 보수당인 케스라콘드(Keskerakond, 중앙당)의 실질적인 당수 역할을 하고 있으며 수 차례 수도 탈린의 시장직을 역임한 인물이다. 발트의 길이 세상에 나오는 데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 인물이지만 여러 가지 여건상 인터뷰가 허락되지 않았다는 바로 그분이다. 우연한 기회에 KBS 보도국과 일하는 과정에서 인터뷰 통역을 하느라 잠깐 인사를 한 적은 있다. 아마 나를 기억하진 못할 것이다. 에스토니아어를 하는 한국인이 그리 많지는 않을 것인데 말이다.
1988년 4월 13일이었다. 당시 에스토니아 최대의 인기 정치 토론 프로그램인 ‘그래도 생각해 봅시다(mõtleme veel)’이라는 프로그램에 에드가르 사비사르가 출연하였다. 1987년부터 1989년까지 정치적 사안에 대해 각계각층을 대변하는 인물이 출연하여 토론을 벌이는 방송이었는데 녹화방송이 아닌 생방송으로 송출되는 프로그램으로, 당시 소련 공화국에서는 상당히 생경하고 이례적인 포맷이었고 시청률도 높은 프로그램이었다고 한다.
일반 시민들과 정당 관계자, 심지어 공산당들까지 시청하는 그 프로그램에서 에드가르 사비사르는 에스토니아 인민 공화국만의 독차적인 정치 시스템인 인민전선(Rahvarinne)의 조직 창설을 제안한다. 아무리 자유의 대한 '언급’이 보장된 시기라 하더라도 그의 발언은 상당히 ’ 놀랄 노자’가 아닐 수 없었을 것이다.
발크 씨는 에드가르 사비사르는 과히 정치적 천재였다고 말했다. 주변 상황과 맥락을 완벽히 파악한 상태에서 인민전선의 창설을 고안한 그의 발언은 반소련운동을 주도한 조직을 창설하는 데 큰 역할을 했고 모스크바 당국에서도 그의 발언에 대해서 딴지를 걸 수가 없을 만큼 파급력이 있었다. 그 이유는 초기 명칭이 ’(고르바초프의) 개혁과 개방정책을 지지하는 인민전선’이었던 만큼 당시의 소련의 정치적 사조를 편승하여 상당히 온건적인 정책을 표방한다는 분위기를 연출하여 크렘믈린으로부터의 물리적 압박을 상당히 피할 수 있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