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시를 회상하며 내가 만난 헤인즈 발크(Heinz Valk) 씨는 그의 발언을 이렇게 평가해 주었다.
"에드가르 사비사르는 과히 정치적 천재였어요. 주변상황과 맥락을 완벽히 파악한 상태에서 인민전선의 창설을 고안한 그의 발언은 반소련운동을 주도한 조직을 창설하는 데 큰 역할을 했고 모스크바 당국에서도 그의 발언에 대해서 딴지를 걸 수가 없을 만큼 파급력이 있었지요."
명색은 소련의 정치적 사조를 편승, 그러나 속내는.....
즉 그가 주장한 인민전선 초기 명칭이 '(고르바초프) 개혁과 개방정책을 지지하는 인민전선'이었던 만큼, 당시의 소련의 정치적 사조를 편승하여 상당히 온건적인 정책을 표방한다는 분위기를 연출해 크렘믈린으로부터의 물리적인 압박을 상당히 피할 수 있었던 것이다.
발크씨 역시 이전 행보로 인해 정치적 대변인으로 인정받은 상태였으므로, 에드가르 사비사르와 함께 에스토니아 인민전선의 중역으로 합류하게 되었다.
발크씨 말에 의하면 그 방송이 끝난 직후 과히 폭발하듯 전국에 인민전선 지부가 결성되었으며 1988년 10월 전국 인민전선 설립회의에서 에드가르 사비사르는 에스토니아 인민전선의 대표로, 헤인즈 발크는 예술총동맹 비서로 선출됐다고 한다.
창립 초기부터 에스토니아 전역에서 22만 명 후원자가 모였다. 공식적인 정보만 봤을 때, 당시 에스토니아 전에 인구 140만명 중 22만명이 후원을 해주었다니 에스토니아 사람들의 관심과 독립에 대한 의지를 잘 말해준다고 볼 수 있다. 후원자들은 인민전선에 어느 정도 금액의 기부금을 후원하기도 했다.
1988년 에스토니아 인민전선은 여름 노래대전 무대에서 4차례 대규모 행사를 개최했다. 전국에서 버스와 차를 타고 30만 명이 참가했다. 전국 각지에서 모인 사람들의 수가 수도 탈린 인구인 40만 명에 육박했다.
'노래하는 혁명'의 시작
이들은 모여서 며칠 동안 소련 50년간 금지시켜왔던 에스토니아 국가 역시 힘껏 부를 수 있었다. 초창기 고르바초프의 페레스트로이카의 개방과 개혁 정책을 지지하고 소련 시스템 속에서 자주권을 더 강화하자는 논제를 강조했던 만큼, 시민들의 열성적인 참여와 노골적인 반소련적 활동은 인민전선으로 하여금 걱정을 유발할 정도였다고 한다. 이렇듯 이 행사는 인민전선이 중심이 되어서 조직된 행사였지만 시민들에 의해 거의 자발적으로 이루어진 행사였다고 하인즈 발크 씨는 말했다.
하인즈 발크 씨는 에스토니아의 한 일간지에서 에스토니아인들이 부르는 이 자발적 투쟁의 멜로디를 '노래하는 혁명(Laulev Revolutsioon)'이라고 이름 붙였으며, 이것은 지금도 에스토니아와 발트3국의 독립운동을 지칭하는 대표명사로 사용되고 있있다.
고르바초프 전까지는 노동당과 직업동맹에 가입하는 자유만 주어졌을 뿐 단체행동이 불가능했다. 고르바초프의 개혁, 개방 이후에는 이전과 달리 단지 금지곡을 부르는 것으로 감옥에 가지는 않았다. 이전엔 없던 표현, 출판, 집회, 결사의 자유도 주어졌다. 이 노래하는 혁명은 그런 파도를 타고 사람들 사이에서 자체적으로 만들어진 정당 외 활동의 시작이었다.
이러한 '노래하는 혁명'은 1988년 6월~7월 사이, 단 두 달이라는 아주 짧은 기간 동안 이루어졌다. 그 사이 수 십 만 명이 모이는 행사가 네 차례나 이루어진 것이다. 농민, 노동자, 학자 등 최대한 많은 계층의 사람들이 인민전선으로 모였다. 그래서 짧은 기간 내에 폭넓은 사회적 동의를 얻을 수 있었고, 이는 다음 해에 열리게 될 '발트의 길' 조직과 성공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된다.
크렘린은 에스토니아 같은 소련에서 제일 작은 공화국이 소련 정권에 항거하는 대단위 활동을 벌일 수 있으리라 믿지 않았다. 그래서 크렘린은 그들이 하는 일을 KGB를 통해 다 파악하고 있었음에도 그다지 큰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이런 분위기를 틈타 에스토니아의 뒤를 이어 라트비아, 리투아니아에도 인민전선이 결성되었고 코카서스, 우크라이나, 벨라루스 등에도 전파되자 소련도 위협을 느끼기 시작했다. 모두 독립을 요구하기 시작했고 그들의 자유에 대한 요구는 총칼로 막을 수 없는 단계에 이르렀다고 발크 씨는 전했다.
헤인즈 발크 씨는 노래는 사람들의 영혼에 아주 강한 영향을 미친다고 강조했다. 게다가 에스토니아인들에게 노래는 자아실현의 가능성이었다. 노래를 통해서 금지된 것을 밖으로 외칠 수 있었다. 노래가 정치적인 도구가 되었다. 단지 예술의 한 분야가 아니라 투쟁의 도구이자 사람들을 모으고 독립의 의지를 외칠 수 있는 동기가 되었다.
그것은 세계 최초로 자연발생적으로 이루어진 노래하는 투쟁이었다. 인민전선이 창설되자마자 하룻밤 사이에 모여서 다음 날 아침까지 노래를 불렀다. 첫날에만 15만 명이 참가했다. 1988년 7월 초반까지 이러한 노래하는 투쟁이 4차례나 이어졌고 헤인즈 발크는 이 사건을 '노래하는 혁명(Laulev Revolutsioon)'이라고 이름 붙여 일간신문에 기고했다. 이후로 그 표현은 발트3국의 독립과 자유를 위한 투쟁을 대변하는 단어로 자리매김하였다.
그 후 에스토니아인들을 비롯한 발트3국인들은 1939년 서명된 독소불가침조약의 무효성을 주장하기 시작했다. 고르바초프와 소련내 보수정치인들은 그 여론의 위험을 바로 직감하였다. 만약 독소불가침 조약이 범죄로 인정받거나 국제법상으로 무효가 되면 소련의 발트 3국 지배 자체 역시 무효화될 수도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소련은 당연히 독소불가침 조약의 부당성을 인정하지 않았다.
독소불가침 조약
1939년 8월 23일, 모스크바에서 조인된 독일ㆍ소련 양국간의 불가침ㆍ중립조약으로 체결 향후 10년간 상호국간에 어떠한 공격도 하지 않고, 양국간 중립을 약속하며 제3국과의 전쟁이 이루어진 경우 그 제3국을 지지하지 않을 것을 약속한 협정이다.
독일과 소련이 폴란드, 발트 3국(에스토니아ㆍ라트비아ㆍ리투아니아) 등을 비롯한 동유럽 지역을 서로의 권역으로 나누도록 하는 약속이 되어 있었고 소련의 영향권이었던 폴란드를 독일이 침공함으로써 공식적으로 2차 대전이 발발하였다. 발트3국을 비롯한 유럽 내 구 사회주의권 학자들은 2차 대전의 발발이 단지 독일의 폴란드 침공만이 아닌 본 독소불가침조약의 성립에서 기인하였다고 보는 해석도 크다.
이 조약을 기반으로 하여 1940년 소련은 발트3국을 침공하여 사회주의 경제화를 가속화하였고 2차 대전 종전 후 끝내 소련의 공화국으로 복속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소련은 이를 라트비아의 자발적인 복속, 독일로부터의 해방 등 이유를 들어 합리화하지만 발트인들은 독소불가침조약에 근거하여 폭력적이고 비인도적인 방식으로 소련에 병합되었다고 보고 있어 대러시아 관계에 여러 가지 껄끄러운 문제를 양산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