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트해의 붉은 숲 5
울디스는 아이처럼 나약했다. 시체를 보기만 하면 바로 기절을 했고, 총을 잘 쏘지도 못했고, 수류탄을 극도로 무서워했다. 당연히 다른 부대원들과의 사이가 좋지 않았고, 악명 높은 스체니친 대위에게 미운털이 박혀 호된 체벌까지 받았지만 상황을 바꿀 수는 없었다.
울디스 외에도 문제를 만드는 이들은 계속 늘었다. 바로 마약 때문이었다. 병사들이 그냥 ‘풀’이라 불렀던 마약은 동네 사람들이 양귀비를 길러서 만들어낸 것이었다. 병사들이 모이는 곳이면 어김없이 그 풀이 담긴 누런 봉지를 든 아이들과 노인들이 접근해 왔다. 정식 아편을 구하는 것 역시 술 마시는 것만큼 쉬웠다.
울디스의 생일. 그는 병사들이 준 독한 술을 잔뜩 마시고 몸을 가눌 수 없을 만큼 취했다. 그의 앞으로 선물인양 전해지는 커다란 자루 하나. 스체니친 대위는 울디스에게 어디에서 사자 사냥이라도 한 듯 누런 모래가 잔뜩 묻어있는 칼을 하나 쥐어주며 그 자루를 그냥 찌르라고 말했다. 영문을 모르는 울디스가 자루에 칼을 가져다 대려는 순간 자루가 움찔했다. 그것을 본 병사들은 모두 박장대소했다. 그럴수록 자루 안의 존재는 더욱더 심하게 요동쳤고, 스체니친 대위의 목소리 역시 커졌다.
“찌르라고, 찌르란 말이야. 이 병신 새끼야. 저 안에 있는 영혼이 튀어나와서 네 목에 칼을 대면 어쩌려고 그래!”
그러자 터지는 병사들의 술 취한 야유.
“저 병신 녀석, 전쟁터에 나가서 영혼도 한 마리 못 죽이고.”
“야. 이 계집년아! 얼른 찌르란 말이야. 네가 군인이야!”
그때 그들의 함성을 듣고 있던 알료샤의 입에서 이 한마디가 터져 나왔다.
“사회주의를 위해서 찔러!”
어린 시절 콤소몰 활동을 하면서 지겹도록 들었던 지극히도 단순한 소리였다. 그 단순한 소리은 심지가 되어 거대한 불길로 타올랐다.
“그래, 사회주의 건설을 위해!”
“찌르라고! 승냥이 자본주의 미국에게 이 아프가니스탄을 넘겨주고 싶은 거야?”
알료샤를 따라 울디스를 선동하기 시작하는 술 취한 이데올로기의 수호자들. 술 취하고 흥분한 군중의 이데올로기는 학자 백 명의 논리보다 설득력이 있다. 술기운과 함성 소리에 정신이 혼미해진 울디스는 자기도 모르게 손에 힘을 주고 자루를 힘껏 찔렀다. 한 번 두 번 찌르자 손에는 속도와 힘이 더 붙었고, 구경하는 병사들의 눈에서도 불꽃이 일었다. 자루 속의 존재는 알아듣지 못할 소리로 고함을 질렀고 자루가 피로 젖어 흥건해지고 바닥에 흘러내려 굳기 시작할 때까지 그 외침은 멈추지 않았다.
알료샤는 자기가 왜 그런 소리를 질렀는지 믿겨지지가 않았다. 젊은 시절 자신의 두뇌 속에 이식된 무의미한 사회주의라는 단어. 그를 수호하기 위해 싸우다가 죽어가는 병사들의 참혹한 최후. 대체 그것이 어떤 의미가 있던 것이었지? 매일 먹는 밥 속에 사회주의를 신봉하게 하는 약이 들어있던 것은 아닐까. 아니면 자기도 모르는 내면 깊은 곳 어딘가에 레닌과 스탈린에게 영혼을 바치겠다는 황금을 녹일 만한 열정이 이글거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 내가 아니었으면 나 말고 다른 누군가가 사회주의를 들먹이지 않았을까.
알료샤가 고민에 빠져 밤을 지새우고 있는 사이, 술과 살인에 취한 채 병사들과 함께 마을에 들어간 울디스. 거기서 여인을 처음으로 범했다. 울디스의 손에 살해당한 영혼, 그리고 그에게 몸이 더럽혀진 후 마을 남자들의 돌에 맞아 죽은 여인, 모두 돌산 한가운데 껍데기만 남은 사회주의가 알료샤에게 주는 선물인양 며칠 동안 방치되어있었다.
하얀 도화지 같은 심성의 울디스는 급속도로 변했다. 얼굴을 두건으로 가리지도 않은 영혼에게 사격을 하는 일도 서슴지 않았다. 울디스를 비롯한 사람들은 이 사회주의를 수호하기 위한 전쟁을 즐기기 시작했고, 그들 중엔 어이없게 알료샤 자신도 들어있었다.
마음속으론 그 전쟁에 대한 반감과 사회주의 건설이라는 명목으로 자행되는 범죄들에 치가 떨렸지만, 입으로는 여전히 사회주의를 논했고 몸은 그들의 전쟁에 동참했다. 마치 귀와 머리가 잘려 나간 자신의 몸을 바라보는 것처럼 고통스러웠다. 점차 자신을 그렇게 내몰고 있는 존재가 소련 정부가 아닌, 자신의 앞에서 지휘하고 있는 스체니친 대위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위대한 스탈린이라면 이러한 짓을 강요하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모든 것은 그들의 앞에서 구릿빛 근육을 드러내고 위압적으로 서있는, 권력을 쥔 자들의 탓이었다.
동료들의 죽음은 일상이 되었다. 알료샤는 죽지 않는 것이 다행스럽다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었다. 심지어 죽는 이들이 부러워지기도 했다. 알료샤에게 죽음이란 바로 이 모든 고뇌들에서 벗어날 수 있는 자유였다. 전사자들은 자유로부터 선택된 자들이었다. 죽음의 천사는, 알료샤를 쉽사리 선택해주지 않았다.
정찰을 나간 한 마을에서 부대원들은 이상한 광고 하나를 보게 되었다. 이미 폭격이 지나가 텅 빈 마을 한 귀퉁이 벽에 붙은 러시아어로 적힌 광고였다. 바로 소련군의 머리를 무자헤딘에게 가지고 오면 보상금을 주겠다는 내용이었다. 최고사령관의 목에 걸린 현상금은 자그마치 미화 5만 불이었다. 그리고 그 다음 날 우리의 그레고리우스 대성인이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