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험해야 하거든
과학을 잘하는 사람들은 내향적일까 아니면 외향적일까? 일반화하기 어렵지만, 적당히 내향적이면서 필요만큼은 외향적인 사람이지 싶다.
대학원에서 경험이 쌓일수록 생각하는 시간이 늘고 있다. 입학 직후에는 교수님이 시킨 대로, 이전에 발표된 논문의 방법대로 하면 문제없으리라 생각했고 깊이 생각하지 않았다. 또한, 아는 게 부족해서 깊이 생각하지 못했다. 공부를 하다 보니 한 현상을 설명하는데 고려될 수 있는 관점이 정말 많고, 검증을 위해 사용할 수 있는 방법도 무척이나 다양하다는 것을 알게 됐다. 다양한 시각에서 고민하니 돌파구가 나왔고, 장단점을 고려해 방법론을 고를 수 있었다. 내 연구를 가장 잘 아는 사람은 바로 자신이기에, 외부의 잣대 없이 스스로 충분히 고민하는 시간이 필요했다.
하지만 혼자서만 생각하고 결론 지었을 때,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치우칠 수 있다. 또한, 최근 연구들은 다양한 학문의 융합을 요구하기에, 여러 분야의 전문가들과 협업하여 연구를 진행하는 것이 경쟁력 있다. 그렇기에 협업과 대화를 위한 외향적 성향도 필요하다.
날지 못하는 공룡의 앞다리와 꼬리에 있는 비행 깃털의 기능에 대해 오래 고민해 오신 지도교수님께서는, 공룡학자 그리고 로봇공학자와의 협업을 통해 새로운 관점을 제시하고자 하셨다. 그리고 교수님의 칼(조류학자의 쌍안경) 역할은 내가 맡았다.
새의 비행 깃털 진화, 공룡으로부터 (brunch.co.kr) 공룡교수님과 미팅 후, 이어서 로봇공학 교수님과 미팅을 가졌다. 얼떨결에 공룡교수님 학생분도 동행하여 수원으로 향했다. 교수님들끼리는 이미 아는 사이셨다. 이전에도 지도교수님은 실험을 위해 로봇이 필요했고, 로봇교수님께서 제작해 주신 경험이 있었다. 그렇기에 부드러운 분위기에서 미팅을 시작했다. 로봇교수님과 과제를 맡은 학생분은 로봇 제작에 대한 아이디어를 이미 생각해 두신 상태였다. 3D 프린터로 만든 예시도 보여주시면서 우리가 이해할 수 있게끔 해주셨다.
큰 방향성은 정해졌다. 실험을 디자인을 고려하여 로봇을 제작하여 야외에서 실험하고, 분석하고, 논문을 쓰는 것. 로봇 제작 이후의 일들은 나와 지도교수님이 주도하지만, 로봇 제작에는 모든 팀의 노력이 필요했다. 나와 지도교수님 (이하 조류팀)은 로봇이 보여줘야 하는 움직임 범위를 결정해야 했다. 공룡팀은 로봇의 모델이 될 카우딥테릭스에 대한 모든 정보, 특히나 형태에 대한 정보를 정리해야 했다. 주어진 정보를 바탕으로 로봇팀이 공룡로봇을 제작하는 것이 역할이었다.
공룡팀은 빠르게 정보를 요약하여 보내주었다. 제법 화석이 많은데, 크기가 조금씩 달라 어떤 표본을 고르는 것이 타당한지도 정해주셨다. 그렇기에 가동 여부와 범위만 정해지면 로봇 제작을 시작할 수 있었다. 나는 현존하는 flush-pursue (탈출 유도-추격 포획) 전략을 사용하는 새들의 영상을 분석하여 로봇의 각 관절별로 가동 여부와 가동 범위를 알려드리고자 했다. 전 세계에 서식하는 모든 종을 분석하기 위해서는 시간이 많이 필요해 보였다. 그런데 연구과제의 기간이 짧아서, 동동거리며 컴퓨터를 붙잡고 닥치는 대로 검색하고 살펴보았다. 아찔하고 아득했다. 짧은 기간 내에 모든 종을 살피는 게 말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려드리기 위해 교수님 방으로 돌격했다.
주저리주저리! 흐엉!
나의 후앵거림을 들을 교수님은 "응?"라는 표정으로 그럴 필요가 없고, 우리는 공룡을 흉내내기에 땅에서 탈출 유도-추격 포획을 하는 종만 리뷰하면 된다고 하셨다. 그중 행동 패턴이 너무 복잡한 종은 피하면, 얼마 남지 않는데. 교수님은 이미 2종을 알고 계셨다. 진즉에 쳐들어올 걸 생각하며 고통받은 나날이 머릿속에 스쳐 지나갔다.
알려진 2종의 영상을 찾아 행동 패턴을 살펴보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연구실 차를 몰고 수원으로 내려갔다. 늦여름에 연구를 시작하여 녹음이 짙었는데, 이미 1달가량이 지나 단풍이 짙었다. 그 아래 야외 테라스에 자리 잡고 로봇팀 학생분과 미팅을 가졌다. 연구과제에서 출장비를 지원받기 위해 증명사진도 야무지게 찍었다. 무사히 미팅을 마쳤고, 로봇 제작에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