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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ara 유현정 Aug 27. 2023

당신의 슈필라움은 어디에

<라라의 창작민화 4> 사려니, 백록의 꿈


바닷가 작업실에서는
전혀 다른 시간이 흐른다


요즘 김정운 작가의 책을 다시 읽고 있다. 그는 문화 심리학자, 여러가지문제연구소 소장 외에 요즘은 교수라는 직함 대신에 작가 어부, '나름 화가'(본인의 표현임)라는 타이틀 가지고 있. 세상을 참 다양하 재미나게 사시는 분이다. 나이 50에 교수직을 내던지고 일본에 가서 그림을 배우고 와서는, 여수의 에 미역창고(美力創考)라는 작업실을 짓고 그림을 그리고 계신다.


 <나는 아내와의 결혼을 후회한다>라는 도발적인 책 제목으로부터 를 끌어당 힘은, <노는 만큼 성공한다> <가끔은 하게 외로워야 한다> 이어지며  팽팽해지다가, <바닷가 작업실에서는 전혀 다른 시간이 흐른다>에서 감탄을 자아내게 만든다. 수 바닷가로, 더 나아가서 배가 하루에 세 번 들락거리는 섬으로, 자신만슈필라움을 찾아가는 정이 흥미진진다. 인생을 이토록 철저하게 온전히 진지하게 라움찾아 도전해 나가는 여정에서 그만의 독보적인 인생철학을 다.  


독일어에만 있다는 개념 슈필라움이란,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자율의 공간을 뜻한다. 물리적 공간은 물론이고 심리적 여유까지 포함하는 단어로서, 내 취향과 관심이 구현되는 곳이다. 삶이란 지극히 구체적인 공간 경험들의 앙상블이므로, 필라움이 있어야 자기 이야기가 생기고, 자기 이야기가 있어야 자존감 생기며, 자기만의 매력도 생긴다고 한다. 한 인간의 품격은 자기 공간이 있어야 유지된다는 주장이다. 


20세기 초 버지니아 울프는 '여성과 소설'이라는 주제로 <자기만의 방>이라는 에세이를 발표하였다. 페미니즘 비평의 선구자로서 만약 여성이 자유의 문을 열 수 있는 두 가지 열쇠만 찾을 수 있다면, 미래에는 여성 셰익스피어가 나올 수 있으리라 주장하였다. 그 두 개의 열쇠는 바로 고정적인 수입과 자기만의 방이다. 경제적 자립과 함께 자기만의 공간의 중요성을 강조한 것이다. 지극히 사적인 공간이 있어야 창조도 가능한 것이다. 20세기 울프가 주장한 자기만의 방은 21세기 김정운 작가의 슈필라움으로 이어진다.


김정운 작가가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것은 그의 나이 50이다. 50이란 나이는 참으로 오묘하다. 남에게 등 떠밀려 그렇게 살아가다가, 문득 속도를 늦추고 자신의 인생을 돌아보는 나이라고나 할까. 나이 50은 성찰의 시간을 가져다준다. 나도 그랬다. 50이 되어서야 삶의 관성에서 벗어나 방향을 완전히 틀었. 50지의 삶이 도시에서 속도와 성취가 목표였다면, 50 이후의 삶은 자연에서 오로지 나 자신의 행복에 집중되어 있다. 닮은꼴로 인생을 살고 있는 김정운 작가의 주장은 언제나 통쾌하다 못해 유쾌하기까지 하다.


아무튼 서귀 바다가 제일 예쁘다고 생각해 온 나는 갑자기 여수 바다가 몹시 부러워졌다. 하루에 두 번씩 밀물과 썰물이 드나드는 갯벌을 통해서 전혀 다른 시간이 흐른다는 바다가 궁금해졌다. 바닥을 전부 드러낸 바다의 민낯은 시간의 깊이를 무한정 품고 있을 것만 같았다. 바다 위에 둥둥 떠 있는 섬들또 얼마나 다양한 저마다의 이야기를 들려줄 것인가. 나는 작가가 추천한 리스트의 콩솔라시옹(위안)을 들으며, 다짐했다. 가을에는 석양이 우리나라에서 최고라는 여 여자만의 끝자락에서 거대한 자연의 시간 앞에 서 보리라! 


 <사려니, 백록의 꿈> 창작 과정




나의 진정한 슈필라움은 제주생활을 시작하면서부터 생겨났다. 차츰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아지면서, 제주 집은 온전 내 차지가 되었다. 민화를 그리기 시작하면서는 나만의 슈필라움으로 거듭났다. 거실에서 바다를 향해 놓인 식탁 위에는 노트북과 함께 민화 도구들늘어놓았다. 언제든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릴 만반의 태세를 갖추고 있는 셈이다. 벽면은 온통 전시회 포스터와 엽서, 수집한 작품과 내가 그린 그림들로 빼곡하다. 나의 취향과 이야기로 둘러싸인 나만의 도서실과 갤러리인 셈이다.


슈필라움은 혼자만의 시간 속에서 빛을 발한다. 고독은 창조적이고 생산적인 시간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나는 글과 그림 작업에 몰입하다 이따금 고개를 들어 창밖으로 바다와 하늘을 살핀다. 수시로 변신하는 뭉게구름에 감탄하다가 섶섬과 눈을 맞추고는 씨익 미소를 짓는다. 안락의자로 자리를 옮겨 앉아 살랑거리는 먼 바닷바람을 맞으며 책을 읽다가, 대뜸 수평선을 잡아당겼다 놓았다 하면서 멍도 때린다. 와중에 틈틈이 바다 수영을 다녀오고, 동네 공원으로 산책을 나간다.


슈필라움이 반드시 방에만 국한되는 것은 아니다. 어디든 쉼과 휴식,  창작의 아이디어를 건네주는 다정한 곳이라면 슈필라움이 될 수 있다. 나는 진즉 산책길에서도 슈필라움을 찾아냈다. 내가 자주 가는 정모시 공원은 계곡을 따라 몇 개의 벤치가 나란히 놓여 있다. 비교적 한적해서 아주 마음에 든다. 먼저 크고 작은 나무들 사이로 물소리와 새소리를 감상하며 주변을 산책한 후, 단차를 따라 작은 폭포를 이루는 계곡물을 바라볼 수 있는 두 번째 벤치 앉는다. 스마트폰을 꺼내 브런치에 저장된 글을 불러오거나, 화두를 틀고 그림을 구상한다. 선한 의성이 발현.


공원에는 터줏대감인 커다란 고목이 한 그루 있다. 제주어로 퐁낭이라고 부르는 팽나무다. 제주의 마을에는 오래된 팽나무가 그늘을 만들어다. 육지의 느티나무처럼 마을의 역사를 가늠할 수 있다. 나는 매일 공원의 팽나무를 마주하며 올려다본다. 요즘 제주 바다와 함께 제주의 숲을 시리즈로 그리고 있는데, 이번 민화에는 이 팽나무를 화폭으로 데려왔다. 그림 중앙에 커다랗게 차지한 나무는 존재감을 과시한다. 그림의 분위기를 압도하는 배경으로 존재한다.


주인공은 흰 사슴 백록이다. 한라산은 백록의 전설을 가지고 있다. 백록이 물을 마시던 호수가 바로 백록담이다. 1100 고지에 올라가면 백록의 동상이 한라산을 바라보며 우뚝 서 있다. 백록은 한라산을 그리워하고, 나는 백록을 그리워한다. 한라산 자락의 사려니 숲으로 백록을 초대하였다. 백록의 멋진 뿔은 6월의 사려니를 가득 수놓는 종낭(때죽나무)과 산딸나무가 되어 작고 하얀 꽃을 활짝 피워냈다. 폭신한 안락의자 곁에 다. 누구나의 슈필라움이 되었으면 좋겠.


당신의 슈필라움은 어디에 있나요?

우리는 모두 자신의 슈필라움을 찾아야 한다.


네 번째 창작민화 <사려니, 백록의 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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