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가족은 내가 어릴 때부터 생존을 해야 한다는 이유로 모두 떨어져 지냈다. 형은 학교를 다니며 기숙사 생활을 했고, 나는 시골집에서 어머니와 함께 지냈다. 아버지는 서울에서 돈을 벌어 시골로 보냈다. 각자가 헤어져 지내는 삶이 길지 않을 줄 알았으나 형이 대학교에 들어갈 때까지 우리 가족은 떨어져 지내야만 했다.
형은 대학교에 들어간 후로도 줄곧 혼자 생활하다가 대학 졸업 후 군 장교로 근무할 당시 제주도로 마지막 근무지를 옮겼다. 그곳에서 지금의 형수님을 만났다. 둘은 제주도에서 건강한 가정을 꾸리며 잘 살고 있다. 나는 형과는 중학교 시절을 제외하고는 같이 살아본 경험이 없다. 우리 부모님도 마찬가지다.
형과는 달리, 나는 대학교에 올라가고 첫 직장을 그만둘 때까지 아버지와 오랜 기간 함께 생활했다. 그러다 아버지가 직장을 옮기며 김포로 가면서부터 내 집을 구해 혼자 생활하고 있다. 한 달에 십일 정도는 어머니가 내 집으로 올라오신다. 어머니는 충남의 작은 시골 단위의 마을에 사시는데 요즘 시골에는 사람도 없어 적적함도 많이 느끼고 계신다. 서울에 오면 사람들도 만날 수 있고, 막내아들을 이것저것 챙겨줄 수도 있어 기차를 타고 서울과 시골을 왔다 갔다 하신다. 아버지도 한 달에 네 번 정도는 나와 데이트를 하러 내 집에 오신다.
부모님은 내가 지금의 나이가 되기까지 내 성장과정을 가까이에서 보고 계시고, 나 또한 부모님의 성장과정을 보고 있다. 여기서 얘기하는 성장은 정서적 성장을 가리킨다. 아무래도 서로가 함께 한 시간이 많다 보니 가까이 붙어살며 서로에 대해 서운한 점도 생겼고, 그런 서운한 점 이면에 서로를 많이 이해하는 점도 생겼다. 아버지와 처음 함께 생활할 당시는 내가 대학교에 입학하면서부터다. 나는 아버지와 함께 산다는 것에 기대감과 설렘이 있었다.
'13년 가까이 떨어져 있었으니 우리 아빠가 내게 얼마나 잘해줄까.'
그런데 막상 아버지와 같이 살고 보니, 우리 아버지는 무뚝뚝함 그 자체였다. 당시 나는 집에서 대학교까지 왕복 네 시간의 거리를 왔다 갔다 했는데, 집에 오면 아버지가 늘 컴퓨터 게임을 하고 계신 채 나를 맞았다. 아버지는 컴퓨터 게임을 하다가 게임에 지치면 TV를 시청하고 그냥 잠이 드셨다. 나를 본 건지 안 본 건지 알 수도 없었다. 물론 아버지는 주말이 되면 내게 맛있는 것도 사주시고, 술도 한 잔 하면서 대화를 많이 하고는 했는데 평일에는 술 없이는 말을 한두 마디밖에 걸지 않으셨다. 내가 대학교 생활 막바지에 학교까지의 장거리 이동이 힘들어 학교 근처에 살 때쯤에야 아버지는 부쩍 외롭고 서운한 마음을 나에게 드러내셨다.
'옆에 있을 때 잘해주지... 왜 떨어지면 보고 싶다 하실까...'
그러다 다시 아버지와 함께 살게 된 건 내가 첫 직장을 구한 후부터다. 나는 사회생활을 시작하고 돈을 벌고부터 사람이 돈을 버는 것 자체에 많은 애환을 담을 수 있다는 것을 알기 시작했다. 나는 초반부터 직장선배들의 갈굼을 버티고 그 관계 속에서 살아남으려고 부단히 애썼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나와 함께 생활하는 아버지를 더 생각하게 된 것 같다. 아버지를 생각하다 아버지가 형성한 무뚝뚝한 성격도 아주 조금은 이해할 수 있었다.
어쩌면 아버지는 자신의 힘듦을 드러내지 않기 위해 말이 별로 없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아직 사회를 모르는 철부지 대학생 아들은 본인의 힘듦에 위로를 줄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을 수도 있다. 아버지는 그 무거운 무게를 나에게 옮기고 싶지는 않았을 것이다. 내가 첫 직장에서 겪었던 직장 선배의 폭언과 늘 반복하는 실수로 회사에서 잃었던 신뢰를 아버지에게 드러내고 싶지 않았던 것처럼 말이다.
그 마음을 알고 나니, 아버지의 외로웠던 마음이 잘 느껴졌다. 내가 대학교 때 집에 들어오면, 늘 마주 했던 아버지의 게임하는 모습은 잠깐이나마 힘들었던 순간을 벗어나려는 일탈이었는지도 모른다. 나 또한 불금이 되면 집에 들어와 드라마 광개토대왕을 밤새도록 보고, 감정을 이입시켰다. 드라마 속 광개토대왕은 지옥불에 떨어져도 기필코 살아내고, 또다시 적을 무찌르곤 했다. 나는 그 모습을 보고 아주 잠시나마 괴로운 현실을 잊곤 했다. 아버지가 게임으로 스트레스를 풀었던 걸 나는 드라마 시청으로 풀었다. 그 과정에서 나 역시 아버지에게 내가 느끼는 직장의 외로움을 드러내지 않았다. 내가 사랑하고, 앞으로 더 많이 사랑해야 할 가족이라서 좋은 모습만 보이고 싶었다.
그러다 아버지와 어릴 적 이야기부터 서로에게 건네지 않았던 외로움을 얘기하기 시작한 건, 내가 아버지와 더 많이 데이트를 한 후부터였던 것 같다.
"아빠, 영화 볼까?"
나는 아버지가 당연히 안 갈거라고 생각했는데, 아버지는 요즘 나오는 영화들을 다 알고 계셨고 나와 밖에 나가려 옷을 챙겨 입고 계셨다. 아버지가 늘 나와 영화 볼 준비가 되어 있었고, 아들과 함께 하는 모든 걸 하고 싶어 한다는 걸 알고 조금 미안한 마음이 들기 시작했다.
그렇게 아버지와 함께 맛있는 것도 먹고 다니고, 영화도 보고, 여행도 다니기 시작했다. 데이트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아버지와 속에 있는 깊은 얘기를 꺼낼 수 있었다. 시간이 지나 우리는 아빠와 아들의 관계에서, 서로를 가장 많이 응원하는 친구의 사이가 되었다.
"지훈아, 아빠 사실 그때 엄청 외롭고 힘들었다."
나는 아버지와 친구의 관계가 돼서야 아빠의 외로웠던 시절을 들을 수 있었다. 아버지가 서울 옥탑방에 혼자 생활하며, 온수도 안 나와 벌벌 떨었던 이야기부터 어릴 적 나를 시골로 보내며 가슴 아파했던 이야기까지 모두 들을 수 있었다.
"아빠, 아빠가 내가 어릴 때 그러고 싶어서 그랬던 것도 아니고, 아빠 잘못도 아니야. 그래도 이렇게 내 아빠로 버티고 살아줘서 고마워."
나도 조금은 커서 아버지의 마음을 이해하고, 아버지의 애환을 이렇게 위로하곤 한다. 그럼에도 술만 마시면, 아버지의 깊은 애환은 늘 어린 우리를 시골로 보내야 했던 그때로 향한다. 그럼 나는 또다시 '아빠가 내 아빠여서 고마워'라고 말한다.
누군가가 말을 하지 않는 상태는 무뚝뚝함이 아니다. 그 이면에 소중한 사람을 향한 사랑과 그 사람을 위한 인내가 내포되어 있다. 그 이면을 꺼내놓고 함께 얘기하기 위한 노력이 가족 간에도 너무 당연하게 필요하다. 나 역시 좀 더 일찍 그 이면을 알았으면 좋았을 것이라는 후회도 하며 산다. 후회의 마음이 나에게 비칠 때마다 아버지에게 더 잘하려고 노력한다. 내 옆에 있을 때 그 소중함을 일찍 아는 것만큼 행복한 사실도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