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 아들이 하는 팩 좀 아빠 얼굴에 붙여줄래?"
하루는 술에 잔뜩 취한 아버지가 내 방에 들어와서 난데없이 팩 좀 해달라고 하셨다.
"팩? 내가 얼굴에 하는 거? 그거 아빠가 한다고?"
"응, 아들이 평소에 하는 거... 아빠도 하고 싶더라고."
아버지는 안방에 누었고, 나는 술 냄새가 풀풀 풍기는 아버지 얼굴에 팩을 얹어드렸다. 잠시 후 아버지의 여전한 코골이가 시작됐고, 아버지는 팩을 한 채 그대로 잠이 들었다.
잠든 아버지의 얼굴을 보며 생각했다.
'내가 하고 싶은 걸 아빠도 하고 싶다고?'
평소 주말이면 아버지는 아침 일찍 일어나 밥을 드시고, TV 리모컨을 제일 먼저 찾으신다. 그리고 온종일 여러 TV 프로그램을 시청하신다. 그중에 제일 좋아하는 것은 야구인데 9회 말 경기가 끝나고, 하이라이트까지 챙겨보신다.
'저렇게 TV가 좋을까.'
주말에 누워서 TV를 보던 아버지를 뒤로 하고, 나는 서점에 가거나 친구들을 만나 밥을 먹거나 영화를 보곤 했다. 그런데 내가 밖을 나갈 때면 아버지는 늘 서운한 표정으로 "언제 들어와?" 하고 묻곤 하셨다.
'어차피 아빠는 주말에 집에 있으면 TV만 볼 건데, 내가 나가는 건 왜 서운해하시지?'
아버지를 집에 두고 밖에 나갈 때면, 같은 생각이 머리에 맴돌곤 했다.
팩을 하고 잠든 아버지를 그렇게 오래 쳐다본 건 처음이다. 술냄새가 집안을 진동할 정도로 많은 술을 마셔야 애정표현을 하는 아버지이기에, 나는 늘 취한 아버지를 피했다. 어차피 아버지의 혀도 있는 대로 다 꼬여 나에게 하고자 하는 말이 무슨 말인지도 몰랐고, 아버지도 본인이 하는 말이 무슨 말인지 몰랐다. 늘 했던 얘기를 반복하는 재주가 있어 술 취한 아버지와 같이 얘기하다가는 술을 안 마신 나도 취할 지경이었다.
"아빠, 빨리 자."
그래서 늘 취한 아버지를 일찍 주무시게 했는데, 오늘은 팩만 한 채로 바로 주무시니 내 눈에 아버지가 아주 이뻐 보였다.
"아버지도 젊어지고 싶을까?"
나는 늘 팩을 하면 내 얼굴에만 붙였지, 아버지 얼굴에 붙여드릴 생각은 못했다.
'당연히 젊어지고 싶겠지... 그래서 아버지도 내가 하는 걸 하고 싶나.'
그런 생각을 하다가 바로 잠이 들었다. 다음 날 아침이 되고, 아버지와 밥을 먹었다.
"아빠, 영화 보러 갈래?"
나는 처음으로 아버지에게 영화를 보러 가자고 했다.
"요즘, 마동석 나오는 영화가 그렇게 재밌다며?"
아버지는 최근에 하는 영화들을 다 알고 계셨고, 그중 제일 핫한 영화도 알고 계셨다. 아직 영화 예약도 하지 않았는데, 아버지는 벌써 옷을 챙겨 입으셨다. 내 눈에 아버지의 표정이 아이 같았다. 그렇게 아버지의 표정을 눈에 담고 오후 두 시에 함께 영화를 보러 갔다. 영화관에서 파는 핫도그도 맛이 일품이라 핫도그와 사이다도 함께 주문했다. 영화가 시작하고, 나는 영화도 보다가 아버지의 표정도 힐끔힐끔 쳐다보았다. 아버지는 핫도그와 사이다도 천천히 음미하시다가 영화에 금세 몰입하셔서 표정이 금방 진지했다가 빵빵 웃음을 터뜨리기도 했다. 그런 아빠의 표정은 내 표정이기도 해서 나는 영화를 보다 잠시 혼자만의 감상에 젖기도 했다.
'아빠의 청춘은 아빠 안에 그대로 있구나...'
세대가 달라 아버지는 나와 다를 줄 알았다. 그리고 아버지이기에 아버지가 먼저 내게 무언가를 먼저 권하길 바랬던 것도 있다.
"아들, 갈비 사줄까?"
아버지는 주말이면 늘 내가 좋아하는 고기집에 나를 데려가서 고기를 몇 인분이고 계속 시켜주셨다. 그걸 당연하게 생각했다. 아버지도 내가 먼저 아버지에게 데이트를 하자고 바라고 있을 줄 생각하지 못했다. 아니, 생각하지 않았다.
'아버지들은 다 그래. 별로 말 없으셔.'
친구들을 만나면 '아버지는 다 그렇다'며 아버지를 정의하곤 했다.
아버지에 대한 내 정의가 틀렸고, 나는 아버지를 아주 많이 모르고 있었다.
"아빠, 회 사줄까?"
영화가 끝나고, 나는 아버지가 좋아하는 회를 사드리고 싶었다.
"우리 아들이 사주는 거면 아빠는 다 좋지."
우리는 횟집으로 자리를 옮겼다.
"아빠, 영화 재밌었어?"
나는 아버지에게 술을 따라드리며, 아버지의 영화 감상평을 물어보았다.
"재밌지. 아빠가 마동석 나오는 영화 좋아하거든."
"마동석 나오는 영화를 언제 봤는데?"
"명절에 TV에서 하잖아."
아버지의 대답이 조금 슬프게 들렸다.
"왜 영화 좋아하면서 나한테 영화 보러 가자고 안 했어?"
"아들이 맨날 바쁜지 주말이면 어디 나가서 아빠가 말을 못 했지..."
"아빠, 말을 해야 알지. 아무 말도 안 하면 내가 아빠가 영화 좋아하는지 어떻게 알아."
나는 말을 하면서도 내가 아버지를 많이 모르고 있었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었다.
"아들이랑 영화 보니까 아빠가 기분이 좋다. 아들이 사주는 회도 맛있고...'
"그렇게 좋으면 내가 아빠 영화도 많이 보여주고, 회도 많이 사줘야겠네. 앞으로 아들 등골 휘겠다."
"그럼 이제 우리 아들 등골이 휘어야지. 아빠는 오래 일해서 벌써 등골 많이 휘었다."
그렇게 아버지와 함께 첫 영화를 보고 많은 대화를 나눈 것이 벌써 5년이 넘어간다. 지금은 아버지와 안 본 영화가 거의 없다. 아버지와 데이트를 할 때면 산책도 자주 하고, 산도 많이 탄다. 내가 겪고 있는 모든 청춘 이야기를 아버지에게 털어놓고, 아버지는 아버지의 가슴에 담아둔 청춘 이야기를 내게 쏟아내신다. 맛있는 것을 먹거나 여행을 하면 사진도 자주 찍는다. 오고 가는 술 한잔에 많은 애정표현도 수시로 하고 있다.
"아들 덕분에 술이 달다."
"나는 아빠 때문에 술을 너무 마셔서 술이 쓴데..."
"아빠랑 먹는 술은 괜찮아. 건강해."
"어디서 그렇게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라 그랬어 아빠... 아빠 아들 강사거든."
"아빠가 알지. 우리 아들 강사인 거. 우리 아들 말 잘하잖아."
"아빠 닮았으면 말 못 했을 텐데... 그렇지?"
"아니야. 아빠도 젊었을 때 말 잘했어."
"엄마가 아빠 젊었을 때도 말 못 했다는데?"
"그랬어? 엄마가 그렇게 느꼈대?"
"그럼 나도 느끼는 데 엄마도 당연히 느끼지."
"아들... 어쨌든 아들 말 잘하는 거 다 아빠 덕이다."
"웃기고 있어 정말..."
나는 작은 노력 하나로 삶이 달콤해질 수 있다는 것을 아버지를 통해 배운다. 모든 관계에서 노력이 중요하다는 것 또한 아버지와 시간을 보내며 알았고, 아버지에게도 소중한 청춘이 함께 하고 있다는 것 또한 수시로 느끼고 있다. 아버지와 술을 마시며, 웃으며 대화하는 순간들을 너무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다. 그렇게 나는 내 인생에서 여전히 아버지의 청춘을 내 청춘처럼 써 내려가고 있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