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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딘도 May 03. 2024

죄송합니다

여기에 푸념 좀 할게요

남편은 내가 밖에서 받은 스트레스를 집안에까지 가져오는 것을 극도로 싫어한다. 나는 무조건 밖에서 스트레스를 받았더라도 아무 일 없었던 사람처럼 가면을 쓰고 들어와서 하이톤으로 아이와 놀아주고, 싱그러운 아내로서의 역할을 다해야 한다.


좋다. 남편이 나에게 그렇게 하려고 노력하고 있으니 내가 그렇지 못할 때마다 이토록 분노하는 것이겠지. 그런데 안타깝게도 내가 그게 잘 안된다. 그래서 오늘도 남편은 극도로 열이 받았다.




오늘 내 잘못은 크게 네 가지로 분류된다. 첫째, 6시에 칼퇴를 하지 않았다. 둘째, 늦으면 늦는다고(6시 15분에 퇴근했다) 말을 하지 않았다. 셋째, '둘 다 밥 안 먹었어?'라고 물었다. 넷째, 밖에서 스트레스받은 티를 냈다.


아무튼 이 네 가지 때문에 화가 났다고 했으니 다음부터는 주의하겠다고 말했다. 그렇지만 혹시 천 명에 한 명 정도는 배우자가 힘들어 보일 때 그 모습이 꼴 보기 싫다기보다 오늘 무슨 힘든 일이 있었는지 물어볼 수도 있을 것 같다고 말했다.


역시나 휴대폰만 쳐다보며 가볍게 듣씹하는 남편. 그냥 푸념 삼아 말을 이어갔다. 밖에서 이렇게 스트레스를 받을 때 당신은 혹시 누구한테 의지하는지, 말을 해서 푸는 사람이 있는지 물어봤다.


역시나 눈을 마주치지 않고 휴대폰만 보며 듣씹하는 남편. 그러거나 말거나 말을 이어갔다. 앞으로는 위의 네 가지 사항을 주의하겠으며, 특히 밖에서 받은 스트레스는 속에서 곪더라도 집에서는 티 내지 않도록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이제야 신경질적인 목소리로 입을 여는 남편.


진짜 자기중심적이다.


그래. 남편 말이 맞다. 저런 결심은 입 밖에 내지 말고 실행했어야 하는데, 내가 불필요한 말을 했다.


남편이 밖에서의 스트레스를 집에 가져오는 것을 극도로 싫어하니까 사실 스트레스를 받으면 나는 말을 아낀다. 대신 웃지는 못하겠다. 그래서 반드시 티가 난다.


실컷 수다를 떨고 나면 풀리기도 하는데 남편에게는 그러지 못하겠다. 워낙 푸념 듣는 것을 싫어하니까 불필요할 것 같아서 말을 지우고, 상사는 회사 업무 특성상 보안을 유지하라고 당부하셨으니 또 말을 거른다. 그랬더니 할 수 있는 말이 없었다.




그래서 고민 끝에 그냥 여기에 푸념하기로 했다. 화가 나면 글을 써야지. 그것은 내 오랜 버릇이다. 엄마한테 혼이 나서 화가 머리끝까지 차오르고 분노와 억울함과 온갖 괴로움으로 미칠 지경일 때마다 나는 노트를 펴서 일기를 써 내려가곤 했다. 손목이 아플 정도로 억울함을 다 토해내고 나면 좀 살만해지곤 했었지. (문득 어른이 된 지금 그 노트를 다시 한번 보고 싶어 졌다)


어릴 때부터 글쓰기의 치유능력을 나는 자연스레 이용하고 있었던 셈이다. 사실 오늘도 기도로 이겨내보려고도 했었고, 남편의 토닥임을 바라기도 했었지만 솔직히 둘 다 잘 안 됐다. 그래서 여기다 푸념을 한다. 글쓰기가 있어서 감사하다. 조금이나마 속이 후련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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