납작 복숭아, 나의 느린 세상

산들의 편지 04

by 살아 숨쉬는 그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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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숙소의 아침은 조용하게 시작돼. 한국에선 알람 소리도 못 듣던 나지만 여기선 알람이 울리자마자 일어난다니까. 내 소리 때문에 다른 사람이 방해받으면 안 되니까. 아침에 눈을 뜨면 기지개를 한번 켜고, 침낭을 정리해서 가방에 넣고, 세수를 하고 출발해. 아직 해가 뜨기 전이니, 길을 걷다 해가 뜰 때쯤 발견한 카페에 들어가서 아침을 먹고 선크림도 바르고 다시 출발하는 거지.


하루는 아침 카페에서 과일을 파는 집을 발견했어. 과일을 파는데 하나같이 독특해. 아주 납작한 과일들만 파는 거야. 내가 주로 사는 건 복숭아인데, 되게 납작해. 얼마나 납작하냐면 호떡같이 납작해. 게으른 복숭아가 납작하게 커버린 것 같았어. 장점은 납작해서 여러 개 들고 다니기 편해. 이곳 스페인에서는 복숭아뿐만 아니라 과일들이 모두 넓적하게, 마치 럭비공처럼 자라. 수박도 멜론도 길쭉하고 납작해.


납작 복숭아를 먹다가 나는 내 모습이 떠올랐어. 엄마는 늘 내가 대단하고 했잖아. 어떻게 해야 12시가 넘도록 일어나지 않을 수 있는 건지, 도대체 왜 등록금 내는 날짜를 지나쳐버리는 건지, 기숙사 짐을 이틀 동안 싸는 건 왜 그런 거냐며 대단해했어.


맞아. 나는 엄마가 모르는 느림을 참 좋아해. 엄마한테는 보이지 않는 느린 세상 속에서 사나 봐. 나는 시간이 멈춰버릴 정도로 놀라운 광경을 보면 그냥 나만 멈추고 시간이 몽땅 흘러가도록 두는 거야. 엄마도 알겠지만 여기는 거리마다 햇빛 냄새가 나는, 신비로울 정도로 따뜻한 곳이야. 내 세계보다 더 느리기도 한 곳. 그래서 과일도 느리게 자라다 보니 한결같이 납작하게 변했나 봐. 납작 복숭아, 길쭉한 수박. 정말이지 여기는 모두 느리고 게으른 곳 투성이라 참 좋은 곳이야.


오늘은 평소와 다르게 새벽부터 너무 힘이 들어서 천천히 걸었어. 오르막길도 하나 없는 평지였는데도 정말이지 힘이 안 들어가더라고. 정오쯤에는 속도가 더 느려지는 바람에 다음 마을에 늦게 도착해버린 정말 힘든 하루였어. 그런데 걷는 길 위에 가방을 베개 삼고 선글라스를 끼고 낮잠을 청하려던, 여전히 시에스타를 만끽하던 한 여행자가 나보고 그러더라고. 힘들면 누웠다 가라고. 이미 시간은 4시가 지났는데 말이야. 지금 누웠다가는 별까지 보고서야 일어날 것 같아서 그들을 뒤로하고 바로 출발을 했어. 엄마 손잡고 집 가는 길에 길바닥에 드러누워 스케치북에 그림을 그리고 놀던 어린 내가 생각나기도 하는 그런 하루였어. 그렇게 그날은 오후 5시쯤 도착했고 씻고 오늘 입었던 옷가지들을 빨아서 나무에 널어뒀지. 시계를 보니 6시가 다 되었는데 아직도 저 멀리 걸려 있는 태양 때문에 선크림을 다시 발랐어.


오늘 저녁 메뉴는 토마토 파스타야. 같이 저녁을 준비하는 친구들이 토마토를 썰어달라고 부탁하길래 토마토를 꺼내봤거든. 얘도 호떡처럼 납작해. 어때, 참 신기한 곳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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