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의 편지 05
산들.
거리마다 햇빛 냄새가 나는 동네라. 너무 멋진 표현이다. 예전에 너랑 그라나다에 갔을 때, 길거리 온도계가 45도를 가리키고 있을 때가 생각난다. 우리가 그라나다에 도착했을 때는 일요일이라 가게는 문을 닫았고, 날은 더워서 하루 종일 종점에서 종점으로 냉방기가 작동되는 시내버스를 타고 다녔지. 그러다 6.25 전쟁에 참전했던 할아버지도 만났지. 레스토랑도, 공원도 밤 8시가 되어서야 문을 열던 그곳이 생각나는구나.
사실, 느림에 관한 한, 엄마는 네가 날 닮지 않아서, 아빠를 닮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해. 엄마 아빠의 가장 큰 차이점 중의 하나가 바로 네가 말하는 느림에 대한 것이지. 너의 그 느림은 아빠로부터 물려받은 기질임에 틀림없어. 물론 그 느림과 여유가 엄마를 답답하게 할 때도 있지만 그건 분명히 네가 가진 좋은 자질이라는 걸 알아.
엄마의 조급함과 불안. 이건 어쩌면 외할머니로부터 물려받았을 거야. 너도 알겠지만 외갓집에 가보면 늘 바쁘게 움직이잖아. 특히 외할머니. 엄마는 너만 했을 때 외할머니의 급한 성격이 정말 싫더라고. 그래서 아빠를 좋아하게 되었는지도 몰라. 우리 집안 기질과는 다른 성격의 아빠를. 그런데 지금은 내가 외할머니처럼 살고 있는 거야. 심리학을 공부하면서 엄마의 ‘불안과 조급함’이 어디서 왔는지, 내 문제가 무엇인지 들여다보려고 노력 중이다. 그러니 너는, 그 느림을 마음껏 즐기렴. 하지만 서둘러야 할 때는 서두르는 것도 좋겠다.
아빠의 느림은 할머니로부터 물려받은 것이라고 생각해. ‘세상의 시어머니와 며느리’ 사이가 그렇듯이, 엄마가 할머니를 아주 좋아하지는 않지만, 할머니의 타고난 여유는 가치 있게 생각한단다. 할머니는 참으로 통이 크고 너그럽고, 여유로운 사람이야.
아빠가 어렸을 때,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할머니 댁은 넉넉한 편이 아니었어. 너도 알다시피 두 분은 페인트 일을 하셨거든. 집도 셋방을 살아서 힘들 때였고. 그런데 할머니는 매년 여름이면 송정 바닷가에 방한 칸을 빌려서 네 아빠와 삼촌, 고모를 방학 동안 마음껏 놀게 한 거야. 물론 일이 바빠서 아이들을 제대로 보살필 수가 없어서 바다에서 놀게 한 것이었지만. 그래서 제일 맏이인 아빠가 고모와 삼촌을 돌보며 그곳에서 여름을 보냈다더구나. 마치 프랑스 영화 속 ‘꼬마 니콜라의 여름방학’과 같은 생활을 한 거지.
아빠는 요리백과사전을 한 권 사서는 동생들에게 온갖 음식을 해먹였대. 호떡도 굽고, 도너츠도 만들어 먹었다고 하더라고. 엄마는 그 이야기에 정말 감동했단다. 아빠의 낙천적인 성격이 바로 할머니에게서 나온 것이란 걸 알 수 있었지. 나도 그런 점을 닮고 싶었는데, 결정적인 순간이 되면 아빠와는 반대의, 조급한 성격이 나오더구나.
네가 고3이었을 때가 생각난다. 그때 시험 기간이었는데, 우리 모두 늦잠을 잔 적이 있었잖아. 당황한 나와 달리 너는 정말 침착했지.
“엄마. 괜찮아. 물론 이미 지각이지만, 아직 시험을 시작한 것도 아니고 지금 가도 시험에는 늦지 않아. 머리 안 감고 가면 되고. 그런데 엄마. 밥은 먹고 가자. 늦었는데 속이 비면 시험칠 때 힘들 것 같아.”
어떻게 그 순간에 그렇게 침착할 수가 있는지 놀랐단다. 그렇게 학교에 가서 너는 무사히 시험을 쳤었지. 그런 여유는 네가 가진 장점이야. 그러니 엄마의 불안감을 너에게 속사포처럼 쏟아내려 할 때, 늘 그랬듯이 그때는 말해줘. “엄마, stop!” 이라고. 그러면 알아차릴게. 엄마의 불안을 네게 전하고 있다는 것을.
산들.
너의 느림을 응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