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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살아 숨쉬는 그녀 Jan 03. 2022

나의 케이프타운 여행기

흑(黑)\백(白)이 빚은 도시, 케이프타운

          

“진, 너는 정말 멋진 손님이었어. 우리가 함께 보냈던 시간을 종종 생각해…….”     


이멜다로부터 온 메시지다.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케이프타운을 여행할 때 이멜다가 운영하는 에어비앤비에서 며칠 머물렀다. 이멜다는 지금은 태국 북부 치앙마이 근교의 한 국제학교에서 영어 교사로 일하고 있다. 이멜다가 학교생활 틈틈이 보내주는 메시지를 읽으며 2019년 2월의 케이프타운 여행을 떠올려 본다.       

   



멋진 내 친구이멜다의 집          


“좋은 숙소에서 머물고, 맛있는 것을 먹으면 어떤 여행도 만족스럽다.”라는 말처럼 여행에서 숙소는 중요하다. 근사한 호텔에서 최상의 서비스를 받는 것도 좋겠지만, 나는 현지인이 운영하는 작은 게스트하우스나 에어비앤비를 주로 이용한다. 주머니가 가벼운 배낭 여행자여서이기도 하지만, 현지인의 집에 묵으면 좋은 점이 많다. 현지인의 일상을 경험할 수 있고, 현지인과 친구가 될 수도 있다. 케이프타운 여행에서도 그랬다.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아파르트헤이트(인종 분리 정책)는 폐지되었지만, 흑백 간의 빈부격차는 여전하다. 흑인들의 삶은 대체로 열악해서 형편없는 거주지에서 살아간다. 20일간의 트럭킹을 마치며 나미비아에서 케이프타운으로 들어올 때 시 외곽 빈민가를 지나왔다. 양철집이 끝없이 이어진 동네였다. 화장실과 부엌도 없는, 사방 벽과 천장만 겨우 가리는 집이었다. 그에 비하면 백인들의 거주지는 저택이었다. 이멜다의 집도 마찬가지다.      


이멜다의 집은 케이프타운의 명소인 테이블 마운틴이 보이는 바닷가 근처다. 시내에서 30분 정도 떨어진 곳이라 교통은 좀 불편하지만, 조용한 주택가였다. 아침이면 출근 차량이 분주히 오가고, 아이들은 가방을 둘러메고 학교에 걸어갔다. 저녁거리를 준비하러 들러는 조그만 가게에서 동네 사람들도 만날 수 있는 평화롭고 아름다운 동네였다.     


케이프타운에서 살아가는 백인들의 삶을 흑인들의 삶과 비교할 수는 없지만, 누구든 자신만의 십자가를 지고 산다. “인생은 멀리서 보면 희극,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라는 말처럼 가까이서 들여다보면 대체로 각자의 애환이 있다. 이멜다도 마찬가지였다. 낙천적인 성격이어서 겉으로는 예쁘고 근사한 집을 가진, 걱정 없는 사람처럼 보였지만, 안간힘을 다해 살고 있었다. 남편과 사별하고 혼자서 두 자녀를 키워낸 이멜다는 직업이 불안정했다. 20대의 자녀들은 독립해 다른 도시에 있었고, 그녀는 자신의 집을 에어비앤비로 운영했다. 가족의 역사가 깃든 예쁜 집이었지만, 지리적 위치가 좋지 않아 여행자들에게 그리 매력적인 집은 아니었다. 우리는 아주 오랜만에 그 집을 찾은 여행자였다.     


이멜다의 집에 머무는 동안 우리는 장단이 잘 맞아 친구로 지냈다. 아침이면 이멜다는 출근하고, 나는 케이프타운 시내로 여행했다. 저녁에 만나면 함께 맥주 한잔을 기울이며 서로의 삶을 나누었다. 일상을 사는 그도, 여행자인 나도 비슷한 처지였다. 자식들의 미래와 가족의 생계를 걱정하는 ‘가장’이었고, 100세 시대의 노후를 걱정하는 ‘중년’이었고, 늘어나는 뱃살과 망가지는 몸매를 걱정하는 ‘여자’였다. 제2의 인생을 꿈꾸는 ‘나이를 잊은 청춘’이기도 했다. 내가 여행에서 돌아온 후 이멜다는 태국으로 삶의 근거지를 옮겼다. 케이프타운에서는 적당한 일자리를 찾기 힘들고, 에어비앤비로는 생계를 유지할 수 없어서 자신의 집을 세주고 태국에서 영어 교사로 일한다. 다른 나라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한 이멜다를 보며 나도 멋진 인생 후반전에 대한 꿈이 생겼다.           


에어비앤비에서는 숙소 주인과 여행자가 어울려 함께 요리하고 즐길 수 있는 장점이 있다. 와인과 고기가 저렴해 저녁이면 파티를 즐겼다. 
케이프타운의 상징 테이블마운틴이 보이는 이멜다의 집 근처 바닷가. 수상 스포츠를 즐기는 사람들이 자주 찾는 곳이다,


케이프타운 여행을 도운 렌터카          


케이프타운 여행은 일주일 정도면 충분하다고 생각했는데, 시간이 턱없이 부족했다. 대중교통은 이용하기 힘들었고, 택시와 여행사의 차량은 비쌌다. 일행이 세 명인 우리는 렌터카를 이용하기로 했다. ‘완전면책보험’에 가입하고, 공항에서 반납하는 조건으로 시내의 렌터카 사무실에서 차를 빌렸다. 그런데 케이프타운에서는 완전면책보험이라도 창문은 예외였다. 차 안에 귀중품을 둔 차량이 종종 파손되는 일이 있어서라고 했다. 큰돈을 물어야 할 일이 생길까 봐 걱정했지만, 다행히 차를 이용하는 동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운전석이 오른쪽에 있어서 처음에는 당황했다. 자동변속기였고, 운전석 위치만 바뀌었는데도 발을 어디에 두어야 할지 헷갈렸다. 오래전 수동 기어를 사용할 때를 떠올리며 나도 모르게 브레이크 페달은 왼발을, 가속 페달은 오른발을 사용했다. 차가 제대로 움직이지 않아서 진땀을 뺐다. 곧 적응했지만, 긴장된 순간이었다. 교차로에서는 끝까지 주의를 기울여야 했다. 처음에는 교차로의 맨 앞에 서지 않고 다른 차량의 뒤에 서서 앞서가는 차를 따라가며 신호기 보는 법을 익혔다. 몇 번 교차로에 서다 보니 신호기에 익숙해졌다.      


렌터카를 이용한 덕분에 시 외곽에 있는 이멜다의 집에 머물 수 있었고, ‘테이블 마운틴’을 비롯한 명소에 쉽게 갔고,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해안도로 ‘채프만스피크’를 달렸고, 아프리카 최남단이라 불리는 ‘희망봉’, 외곽의 와이너리와 근교 도시까지 여행했다. 렌터카 이용은 탁월한 선택이었다. 누군가 케이프타운을 여행할 계획이라면 렌터카 이용이 최선이라고 말해주고 싶다.      


테이블 마운틴에서 바라보는 사자머리와 케이프타운 시내. 높이가 1천 86m가 넘는 테이블 마운틴을 제대로 즐기려면 운이 따라야 한다.

     

프리 워킹 투어로 보는 케이프타운          


웬만한 관광도시에는 ‘프리 워킹 투어’가 있다. 약간의 팁만 내고 참가하면, 그 지역의 주요 명소와 역사를 대략 알 수 있는 좋은 프로그램이다. 케이프타운에는 세 가지 종류의 프리 워킹 투어가 있다. 우리는 1994년에야 사라진 아파르트헤이트의 흔적을 답사하는 투어에 참가했다.      


투어는 아파르트헤이트 저항 운동의 시작점인 세인트 조지 대성당에서 시작해 노예 매매의 슬픈 역사가 담긴 그린마켓과 노예 나무, 고등법원 건물 앞의 흑백 분리 의자, 넬슨 만델라와 위니 만델라의 벽화가 그려진 곳을 지나 케이프타운을 건설한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의 흔적인 ‘컴퍼니스 가든’까지 이어졌다.      


“민주주의가 없이는 평화가 있을 수 없다.”

“용감한 사람은 두려움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이 아니라 그 두려움을 극복한 사람이다.”    

  

곳곳에 벽화로 표현된 넬슨 만델라의 행적과 흑백 분리의 아픈 역사는 여행자들을 숙연하게 했다. 남아프리카공화국에 진정한 평화가 찾아왔는지도 마음속으로 묻게 했다. 케이프타운 시내를 걷다 보면 해가 진 뒤 시내를 돌아다니는 일은 아주 위험한 행동이라는 것을 피부로 느꼈다. 길거리에서 구걸하는 흑인을 자주 볼 수 있었고, 도로 한가운데 서 있다가 정차 신호를 받은 차가 멈춰 서면 잽싸게 달려가 차를 닦아주고, 팁을 얻는 사람도 있었다. “배가 고파요. 마른 빵이라도 주세요.”라는 팻말을 들고 도로에 선 사람도 있었다. 남아프리카공화국에 민주화는 찾아왔지만, 흑백 간의 빈부격차가 좁혀지기는 여전히 멀다는 생각이 들었다.      

 

차별의 아픈 역사를 간직한 흑백분리 의자

   

그린마켓. 기념품 등 볼거리가 많은 이곳은 노예들을 매매하던 슬픈 역사를 지닌 곳이기도 하다. 
보캅지역. 예쁜 색깔의 외벽 덕분에 여행자들에게 인기 있는 촬영지. 케이프타운을 건설할 당시의 아픈 역사가 서린 곳이기도 하다.
케이프타운은 택시비가 비싸고 대중교통을 이용하기가 쉽지 않다. 혼자 여행하는 사람이나 시간이 부족한 여행자는 시티투어를 이용하면 편리하다. 


만델라의 흔적을 찾아서로벤섬          


마지막으로 로벤섬을 여행했다. 로벤섬은 자유와 민주주의, 인권을 위해 평생 투쟁한 만델라가 18년간 투옥되었던 곳이다. 로벤섬은 아파르트헤이트 이전에도 영국의 식민 지배에 투쟁한 정치범을 투옥해, 제국주의의 탄압과 인종 차별을 상징하는 장소였다. 지금은 섬 전체가 박물관이 되었다.     


로벤섬으로 가는 페리는 ‘V&A 워터프런트’ 항구에서 출발한다. 승차권 판매소에서 페리 탑승장까지 가는 길은 ‘넬슨 만델라 게이트’라는 작은 전시관으로 꾸며져 있다. 만델라의 행적이 담은 사진과 아파르트헤이트에 대한 투쟁의 역사가 읽으며 로벤섬으로 향할 수 있다.     


배에서 내리면, 모든 여행자는 버스를 타고 박물관으로 향한다. 버스에는 안내자가 동승해 관람을 마칠 때까지 함께한다. 안내자는 대체로 로벤섬에 정치범으로 투옥되었던 사람이어서 그들의 안내가 더 뜻깊게 다가왔다. 투어는 섬 전체를 둘러본 후 마지막으로 넬슨 만델라와 정치범들이 수용되었던 교도소를 방문하는 순서로 이루어져 있다. 여행자들은 로벤섬에서 대체로 침묵했고, 섬을 떠나는 순간까지도 숙연했다. 만델라의 수용실 앞에서는 쉽게 떠날 줄을 몰랐다.     


 “우리는 로벤섬이 억압과 굴욕에 대한 자유와 인간의 존엄성을 보여주기를 원한다.”라는 문구가 쓰인 광고판 앞에서 안내자는 안내를 마쳤다. 철조망이 쳐진 교도소가 지금은 ‘자유의 기념관’으로 바뀌고, 남아프리카공화국에 민주화는 찾아왔지만, ‘자유롭고 존엄성 있는 삶’은 얼마나 자리잡혔을까? 여전히 평화롭지 않은 도시 케이프타운에서, 진정한 평화를 꿈꾸며 한 달간의 아프리카 여행을 마쳤다.      

    

워트프론트. 시티투어 버스와 로벤섬으로 가는 배의 출발지라 여행자들로 북적이는 곳. 
넬슨 만델라가 18년간 수감되었던 로벤섬 박물관.  정치범으로 투옥되었던 사람들의 안내가 뜻깊게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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