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는 엄마한테 그 말을 하지 않을 것이다
15년 전으로 돌아간다면 엄마에게 절대로 이 말을 하지 않으리라. 냉랭한 병원 복도, 엄마 품에 안겨 아무도 듣지 못하게 속삭인 말이었다. 그 말은 밥 대신 눈칫밥만 배불리 먹은 한탄이었다.
갑작스러운 아빠의 암 판정이었다. 엄마는 간호를 위해 병원으로, 동생들과 나는 큰엄마 댁인 염창동으로 흩어졌다. 12살, 10살, 6살의 삼남매가 처음으로 집을 떠나 셋방살이 비스무리 한 것을 시작한 것이다. 집을 떠난 일상은 낯설기도 했지만 또 하나의 일탈이기도 했다. 공부를 하지 않아도 됐고 집에는 없는 만화 케이블 채널을 하루 종일 봐도 혼나지 않았다. 가장 큰 변화는 먹을거리였다. 우리 엄만 탄산도 과자도 쉽게 내주지 않는 철옹성 같은 존재였다. 그런 장벽이 허물어진 셈이었다.
큰엄마는 아침마다 수영장을 다니셨다. 집으로 돌아올 땐 주전부리를 한가득 사 오셨다. 눈을 뜨면 거실에 김밥, 떡볶이, 과자, 음료수같이 맛난 군것질거리가 우릴 반겼다. 엄마라면 절대 아침으로 먹지 못하게 하는 것들이었다. 우리는 울타리가 가득 쳐진 목장에서 들판으로 자유롭게 흩어진 양이된 기분이었다. 매일 아침 또 어떤 매콤 달콤한 음식들이 반기고 있을지, 일어나는 일이 재밌을 정도였다. 그러나 자유로움에서 오는 기쁨도 오래가지는 않았다.
금세 된장찌개, 고등어구이, 시금치무침 같은 집밥이 먹고 싶었다. 큰엄마는 큰아빠가 오시는 주말에만 밥을 해주셨다. 매일같이 시간만 되면 딱딱 나오는 흔하디 흔한 삼시 세 끼가 생각보다 유별난 존재라는 사실을 처음 깨달았다. 집밥이 먹고 싶었으나, 큰엄마께 해달라는 부탁을 할 수 없었다. 우리는 ‘맡겨진’ 존재라는 걸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밥이 먹고 싶으면 그저 서로 귀를 대고 소곤소곤 밥이 먹고 싶다고 말할 뿐이었다.
지금 와서 돌아보면 큰엄마의 사정도 어렴풋이 이해가 된다. 사고뭉치인 두 아들을 장성으로 키우고, 이제 막 전업주부의 삶을 벗어났던 때였다. 그런데 단지 8형제 중 첫째의 부인이랑 이유로, 급작스레 초딩 2명과 미취학아동 1명을 맡게 된 것이다. 큰엄마에겐 마른하늘의 날벼락같았을 것이다. 그러나 고작 12살의 나와 어린 동생들은 그런 큰엄마를 헤아릴 수 없었다. 대신 밥 못 먹는 설움이 마음 겹겹이 쌓였다. 결국 아빠의 병문안을 가던 날 사고를 치고 말았다.
“엄마 나 집밥이 먹고 싶어. 큰엄마가 밥을 안 줘."
엄마가 슬퍼할 걸 뻔히 다 알면서도 집밥이 먹고 싶다는 그 말을 뱉어버렸다. 순간 빨갛게 달아오른 엄마의 코끝과 눈가를 보았다. 철없는 행동이었다. 그러나 그날은 철없는 행동을 하고 싶었다. 맏딸의 이름으로 두 동생들을 어루 달래며 큰엄마의 눈치를 보기엔 아직 어린 나이었다. 자연스레 감정을 나누고 응석을 부릴 수 있는 존재가 필요했다. 아침마다 가지런히 댕기를 따주고, 따끈한 흰쌀밥에 생선조각을 얹히고, 꼬까옷을 입혀주는 존재가 바로 엄마였다. 고작 한 달 동안 엄마와 떨어져 있었지만, 내겐 우주를 잃은 듯한 날들이었다.
다시 돌아간다면, 엄마에게 밥이 먹고 싶다는 얘기를 하지 않을 것이다. 아무리 엄마라고 한들, 서른다섯의 여성이 견뎌내기에도 쉬운 날들이 아니었다는 걸 지금에서야 깨달았다. 대신 염창동을 가기 전, 엄마가 준 10만 원을 책임감 때문에 손가락 쪽쪽 빨며 아끼진 않을 테다. 왼쪽에는 여동생을 오른쪽에는 남동생을 잡고 근처 김밥천국으로 나들이를 갈 거다. 된장찌개와 제육볶음을 시킨 다음, 하얀 쌀밥 얹어 동생들 입에 넣어줄 테다. 배를 든든히 하고 나오면 문구점에도 들려야지. 여동생한테는 미미인형을, 남동생한테는 신식 탑블레이드도 하나 쥐어줄 거다.
인생에 단 한번 과거를 바꿀 수 있다면 이때로 돌아가고 싶다. 엄마가 너무나 그리웠지만, 삼 남매끼리의 우애를 시시콜콜 나눌 수 있던 추억으로 재구성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