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여행

[KTX매거진] 느림의 여운, 충남 아산

by 우주

느린 시간을 간직한 충남 아산에서, 그래도 괜찮다는 확신을 얻고 돌아왔다.


이마와 콧잔등에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힌다. 겨울과 봄을 지나 올해의 세 번째 계절이 코앞에 다가왔다. 뜨거운 태양 아래, 눈길 닿는 곳마다 초록 잎이 가득하다. 이름 모를 들꽃과 풀잎이 빛나는 이때, 조금은 느린 여행을 하기로 한다. 목적지는 아산. 서울 용산역에서 새마을호를 타고 1시간 20여 분이면 도착하는 곳이다. 그리 멀지 않은 데다 기차 여행의 낭만을 즐기기 충분하다. 열차에 탑승해 차창 밖으로 시선을 돌린다. 탁 트인 들판이 펼쳐지다가도 높낮이가 다른 건물이 나타났다 사라진다. 빠르게 스치는 풍경의 속도가 마치 지나간 두 계절 같다. 눈 깜박했을 뿐인데 어느새 한 해의 중턱이다. 여행하는 동안만이라도 시간이 멈추길 바라며 아산역에 발을 디뎠다.


느린 시간 속으로, 아산외암마을

역에서 차로 20분 거리인 아산외암마을로 향한다. 이곳 시계는 더디게 움직이는 듯하다. 임진왜란 전후 형성된 마을은 500년간 흔들림 없이 우리 곁에 남았다. 해발 440여 미터의 설화산을 배경으로 초가와 기와집이 옹기종기 모인 모습이 감탄을 자아낸다. 한 폭의 수채화처럼 아름다운 풍광을 눈에 담느라 발걸음이 점점 느려진다. 산과 마을 사이의 빈틈은 푸른 자연이 가득 메웠다. 산들바람에 나부끼는 나뭇잎이 반갑게 손을 흔든다. 안녕, 정답게 화답한다.

설화산에서 내려온 물이 마을 앞을 졸졸 흐른다. 개울가에 놓인 다리를 지나 마을로 들어선다. 초가와 기와집을 두른 돌담이 어여쁘다. 조선 중기에 예안 이씨가 정착한 후, 집성촌을 이루어 대문이나 담장은 큰 의미가 없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집집마다 돌담을 착실히 만들었다. 예부터 돌이 많은 지역이라 논밭을 일구면서 캐낸 것이 이만큼 쌓인 것이다. 마을 곳곳을 휘감은 담의 길이는 6킬로미터에 달한다. 돌의 크기와 모양이 제각각인데도 안정적인 모양새에 자꾸만 눈길이 간다. 이끼, 담쟁이넝쿨이 무채색 담에 생기를 불어넣고, 뜰 안 나무에서 떨어진 매실, 밤송이, 살구가 담 주위를 맴돌며 정겨움을 보탠다. 가만히 걷기만 해도 즐거운 길이다.

그 옛날, 마을엔 돌뿐 아니라 양반도 많았다. 참판댁, 병사댁, 참봉댁 등 가옥 주인의 관직명을 딴 고택이 한 집 건너 한 집일 정도로 흔한 이유다. 그중 조선시대 영암군수 이상익 선생이 살던 건재고택은 마을을 대표하는 고택 중 하나다. 1869년 현재 모습으로 건축한 이래 150년간 건재한 이곳은 1998년 국가민속문화재 제233호로 지정됐다. 사랑채, 문간채, 안채, 정원을 조화롭게 구성해 조선 후기 사대부가의 전형을 보여 준다. 마을에 자리한 가옥 60여 채 중 80퍼센트가 100년 세월을 견뎌 냈다. 나무와 흙으로 지은 집이 아직도 제 몫을 다한다는 사실이 놀라울 따름이다. 돌담을 따라 마을 구경을 이어 간다.

텃밭엔 대파, 감자, 마늘이 쑥쑥 자라는 중이다. 몇몇 주민이 “씨는 다 뿌렸는가?” 하며 안부를 주고받는다. 이제 보니 마을 주변이 온통 경작지다. 사람 사는 온기를 느끼며 참판댁에 다다랐다. 조선 말기 이조참판을 지낸 이정렬 선생이 퇴임할 때 고종이 하사한 집이다. 이를 증명하듯 사랑채엔 영친왕이 아홉 살 때 썼다는 현판이 걸렸다. 후손이 대대로 거주해 온 고택에는 또 하나의 전통이 흐른다. 바로 충청남도 무형문화재 제11호 아산연엽주다. 예안 이씨 가문에 내려오는 가양주로, 누룩과 고두밥을 연잎에 싸서 맛을 낸다. 오늘날에도 옛 방식 그대로 술을 빚는다. 술 한 잔에 150년 넘는 세월이 녹아들었다. 이 마을의 정취를 만끽하고 싶다면 숙소로 운영 중인 여러 고택에서 하룻밤 쉬어 가도 된다. 떡메 치기, 손두부 만들기, 천연 염색 같은 체험 프로그램도 흥미롭다. 배가 출출할 땐 마을 초입 저잣거리에서 수구레 국밥, 연잎 정식, 잔치국수 등 다양한 음식을 맛본다.


잔잔한 풍경이 건네는 위로, 신정호수공원

이번에는 시곗바늘의 속도를 높여 신정호수공원으로 이동한다. 1926년에 생긴 인공 호수인 신정호 풍경은 조금씩 변해 왔다. 2000년대 후반부터는 수변을 따라 여러 가지 테마 공원을 조성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언제든 걷고 싶은 호수 공원으로 자리매김했다. 몇 해 전 근처에 카페와 음식점이 들어서면서 신정호 카페거리도 만들어졌다. 마음에 드는 카페를 골라 여유롭게 시간을 보내기 알맞다. 화창한 계절이니만큼 호수 가까이 가 보기로 한다. 주변 카페에서 대여해 주는 돗자리, 바구니, 테이블로 구성한 피크닉 세트를 챙겨 호숫가로 향한다. 서울을 떠나올 때만 해도 이곳에서 피크닉을 즐길 줄은 몰랐다. 빈손으로 왔다가 이런 호사를 누린다. 92만 제곱미터(약 28만 평)에 이르는 너른 호수를 가만히 바라본다. 시간의 속도가 다시금 늦춰진다. 잔잔한 물결이 가까이 왔다가 금세 멀어진다. 두 시간쯤 지났을까. 슬슬 자리를 털고 일어난다. 피크닉 세트를 반납하고, 호수를 크게 한 바퀴 돌아보기로 한다.

우선 잔디 광장, 조각 공원, 음악 분수로 꾸민 신정호 관광지로 발걸음을 옮긴다. 여기서 출발하는 산책로에 볼거리가 많기 때문이다. 초반부터 수상스키를 타는 사람에게 시선을 빼앗긴다. 힘차게 수면을 가르는 모습에 덩달아 스트레스가 풀린다. 고요한 듯 분주한 호수 풍경을 눈에 담으며 앞으로 나아간다. 장미 터널을 지나 수변 덱 길에 닿는다. 발아래 호수 물이 잔잔하고, 옆에는 수생식물이 흔들거린다. 두둥실 구름 위를 걷는 기분이다. 덱 길이 끝나는 지점에는 수생식물 전시장을 마련했다. 부레옥잠, 수련, 부처꽃, 부들을 포함해 이름표가 붙은 50여 종의 식물을 하나하나 살펴본다. 그러다 마음에 드는 식물을 발견하면 이름을 외우려 노력한다. 다양한 수생식물의 터전인 신정호 상류에는 6만 6000제곱미터(약 2만 평) 규모의 연꽃 단지가 펼쳐진다. 여름마다 황련, 백련, 홍련 등 여러 빛깔의 꽃이 만개하는 곳이다.

호수를 두른 산책로는 4.8킬로미터 길이로 둘러보는 데 1시간 20여 분이 걸린다. 수변 덱, 수생식물 전시장뿐 아니라 미로 공원, 어린이 놀이터, 생태 학습관 같은 시설이 연이어 나타나 지루할 틈이 없다. 다리가 아플 땐 느티나무 쉼터나 정자에서 쉬어도 된다. 걷다 보니 다시 원점이다. 잔디 광장 나무 그늘 아래서 숨을 돌린다. 그 사이 반려동물과 뛰노는 사람들이 곁을 스친다. 나들이 나온 아이들의 웃음소리도 들린다. 꽃을 향해 가는 나비의 날갯짓이 가벼워 보인다. 모두 저마다 방법으로 신정호수공원을 즐기는 중이다.


기꺼이 맞이할 새로운 나날

아산 여행이 끝났다. 잠시 멈춰 달라는 바람과 달리, 시간은 정직하게 흘러 서울로 돌아가야 한다고 재촉한다. 천안아산역에서 KTX를 타면 40여 분 후 서울역에 내린다. 느림의 미학을 알려 준 아산의 여행지와는 사뭇 다른 속도다. 쉴 새 없이 바뀌는 차창 밖 풍경을 바라보며 아산외암마을과 신정호수공원을 떠올린다. 500년 세월을 간직한 마을이 나눠 준 여유를 품고서 너른 호숫가를 걸었다. 서툰 걸음이나마 나만의 속도를 유지하려 노력했다. 성큼 다가온 여름을 기꺼이 맞이하기 위해 꼭 필요한 과정이었다. 이제 절반쯤 남은 올 한 해도 잘해 보자고 스스로 다독이며 여행을 마무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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