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여행

[KTX매거진] 어제의 선물, 오늘의 낭만

부산 부산진구

by 우주

부산진구의 어제와 오늘이 깃든 공원, 마을, 거리를 걸으며 그 안에 숨은 낭만을 찾았다.


부산진구를 떠올리면 황령산 정상에 올랐던 일이 생각난다. 부산 토박이인 친구와 동행한 곳에서 손에 닿을 듯 가까운 도심 풍경과 마주했다. 뺨을 스치던 바람과 눈부신 햇살, 상쾌한 공기가 가슴에 남았다. 몇 해 전, 친구로부터 부산진구 한복판에 부산시민공원이 오픈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돗자리 하나 들고 가서 기분 전환하고 왔다는 말에 ‘도심에 좋은 공원이 생겼구나’ 했다. 그때는 알지 못했다. 이 공원을 자유롭게 오가기까지 얼마나 오랜 시간이 걸렸는지, 이 땅에 스민 애환이 어느 정도인지를.


모두에게 열린 땅, 부산시민공원

2014년 개장한 부산시민공원은 47만 4000제곱미터(14만 3000평) 규모로 한 바퀴 돌아보는 데 1시간 이상 걸린다. 어딜 가든 산이 반기는 도시에서 보기 드문 평지이니 먹을 것이 부족한 옛날엔 더욱 귀한 토지였을 것이다. 부전천, 전포천 등 하천이 가로질러 농사짓기에도 안성맞춤이었다. 이토록 비옥한 땅에 그늘이 드리운 것은 일제강점기인 1920년대부터다. 일제는 이곳에 경마장을 세웠고, 상황에 따라 임시군속훈련소나 전쟁 물자 야적장으로 활용했다.

광복 이후에도 사정은 비슷했다. 1945년 주한 미군 기지사령부, 1948년 유엔 산하 기구가 머물렀고 1950년부터 2006년까지는 주한 미군 부대인 캠프 하야리아가 주둔했다. 혼란한 역사의 발자국이 고스란히 남은 땅은 2014년 부산시민공원이란 이름으로 우리 곁에 돌아왔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높은 담장과 철조망에 둘러싸여 쉽사리 접근하기 어려웠던 곳, 이제는 멀리서도 청량한 기운이 느껴지는 공원 속으로 걸어 들어간다. 봄볕에 반짝이는 수목이 다정히 인사를 건넨다. 그 덕에 다소 긴장한 마음이 어느 정도 풀린다. 한결 가벼운 발걸음으로 공원을 구석구석 둘러본다. 나무 그늘 아래에서 수다 떠는 이들, 반려동물과 산책하는 사람, 명랑하게 뛰노는 아이들까지 모두에게 평화로운 시간이 흐른다. 그러다 문득, 다리가 아파올 때면 캠프 하야리아의 유류 탱크를 쪼개 만든 벤치에 앉아 보자. 여느 공원과는 다른 이곳만의 풍경이 눈에 띌 것이다. 부대에서 사용한 나무 전봇대 40여 개를 한데 모아 전시한 ‘기억의 기둥’, 과거 미군 부대 기지였음을 직접적으로 드러내는 망루, 1901년부터 2014년까지 부산 연대기를 기록한 ‘역사의 길’ 등이 이곳의 옛 모습을 조곤조곤 일러 준다.

학교, 병원, 스포츠 시설, 영화관, 식당 등을 두루 갖췄던 캠프 하야리아는 하나의 마을이었다. 부대 안에는 관사를 포함해 총 338동의 건물이 있었는데 역사적 가치를 따져 24동만 보존하기로 결정했다. 대표 건물은 장교 연회나 공식 행사를 진행했던 ‘장교클럽’이다. 1949년에 지은 건물로 현재는 이곳에 얽힌 생활사를 전달하는 역사관으로 쓰인다. 이 외에 하사관 숙소는 예술가를 위한 ‘문화예술촌’으로, 미군 자녀가 다니던 학교는 전시나 강연 목적의 ‘시민사랑채’로, 그 시절 영화관 일부는 ‘흔적극장’이란 이름의 야외 공연장으로 탈바꿈했다.

수십 년간 잃어버린 땅, 부산시민공원이 그간의 설움을 딛고 일어선 데에는 시민의 공이 컸다. 1980년대 후반 미군 기지 반환을 주장하는 시위가 간헐적으로 열렸고, 1990년대 들어 시민이 주도한 본격적인 운동이 이어졌다. 되찾은 후에 열렬한 환영을 받은 것은 당연지사다. 2013년 공원 조성을 위해 진행한 ‘내 나무 심기’ 기부 행렬엔 수천 명이 참여했다. 그때 모인 것을 금액으로 환산하면 10억 원이 훌쩍 넘는다. 이런 애정을 바탕으로 꾸민 ‘참여의 숲’엔 크고 작은 나무 5500여 그루가 쑥쑥 자라는 중이다. 이를 포함해 부산시민공원에 자리한 100여 종 수십만 그루의 나무가 아늑한 그늘을 만들어 사랑에 보답한다.


내 심장이 원하는 대로, 호천마을

다 그런 거라고, 아프니까 청춘이라며 다독이던 시절이 있었다. 부산진구에선? “사고 쳐야 청춘이다!” 2017년 5월 드라마 <쌈, 마이 웨이>가 화려한 출발을 알렸다. 이력서 한 장으로 지원자의 열정과 패기를 판가름하는 세상에서 꿈을 향해 달려가는 네 청춘의 이야기를 담은 드라마다. 세상은 말한다. 현실과 타협하라고, 너에겐 과분한 꿈이라고. 청춘이 응답한다. “그냥 더 가슴 뛰는 거 해.” 믿을 거라곤 건강한 몸과 마음뿐인 네 청춘은 지친 하루 끝에 ‘남일바(bar)’로 모여 든다. 마을이 내려다보이는 주택 옥상에 주인 몰래 마련한 아지트다. 네모난 평상에 무릎 붙여 앉은 이들은 누구보다 진지하게 울고 웃는다. 마음껏 응석도 부린다. 그러고는 술잔을 부딪치며 내일을 맞이할 용기를 얻는다. 고단한 청춘을 힘껏 안아 주는 남일바의 실제 촬영지, 호천마을이다.

한국전쟁 당시 부산으로 몰려든 피란민은 인파에 밀려 산자락까지 올라왔다. 나무, 판자, 골판지 같은 것으로 바람만 겨우 막고서 몸을 뉘었다. 집들은 가파른 산비탈에 다닥다닥 붙어 온기를 나눴다. 호천마을 역시 전쟁 중 고향을 잃은 사람들이 새로이 개척한 곳이다. 삶을 흔드는 거센 바람을 여기서 이겨 냈다.

시내버스를 타고 호천마을 입구에 내리면 마을 여행이 시작된다. 정류장 근처 자그마한 슈퍼 앞에 놓인 커피 자판기와 아이스크림 냉장고, 작은 평상이 정겹다. 슈퍼 옆에는 이 마을의 하이라이트, 180계단이 자리한다. 계단 앞에 서서 머리 위에 어지럽게 얽힌 전깃줄에 시선을 빼앗긴다. 그러다가 조금씩 시야를 넓혀 계단 너머 풍경에 집중한다. 복잡한 미로를 빠져나가듯, 구불구불한 산비탈 마을을 재주껏 가로지르는 산복도로의 행방을 눈으로 좇는다. 맛보기가 끝났으니 이제는 몸으로 부딪혀 볼 차례다. 느린 속도로 계단을 밟아 내려간다. 높이가 제각각인 계단을 가운데 두고 아담한 주택이 늘어선 모양새다. 열 걸음쯤 걸었을까. 양옆에 있는 대문에서 금방이라도 주민이 나타날 것 같다. 혹시 누군가 마주친다면 눈인사를 건네리라 다짐하며 여정을 이어 간다.

네 청춘의 아지트 남일바에 가 보기로 한다. 남일바 장면은 호천생활문화센터 근처 실제 주민이 거주하는 주택 옥상에서 촬영했다. 가파른 계단을 올라 도착한 곳엔 나무 평상이 하나 자리한다. 드라마의 여운을 전하려는 주인장의 마음 씀씀이가 따스하다. 평상에 엉덩이를 붙이고서 잠시 쉬어 간다. “내 말 믿어. 누가 뭐라든 넌 될 놈이야.” “울고 싶을 땐 센 척하는 게 쿨한 게 아니고, 울고 싶을 땐 그냥 우는 게 쿨한 거야.” 어느 순간, 드라마 <쌈, 마이 웨이> 속 청춘이 말을 붙여 온다. 괜스레 울컥 쏟아지는 마음을 애써 부여잡는다. 안녕, 고마워. 마음으로 인사를 전한다.

호천마을을 여행하는 방법엔 정답이 없다. 마음이 이끄는 대로 움직이면 된다. 졸졸졸, 물이 흐르는 소리를 향해 걸음을 옮긴다. 층층이 쌓인 집 사이로 얕은 천이 흐른다. 호랑이가 나오는 골짜기라 해서 호계천이라 부르는 물길을 따라 조성한 덱 길을 걷기로 한다. 월월! 낯선 이의 발소리에 청각이 예민한 개 한 마리가 제 본분을 충실히 수행한다. 담벼락에 기댄 채 으르렁거리는 소리가 고요한 동네를 깨운다. 익숙한 일인 듯, 이웃 주민이 무심하게 지나간다. 그 모습이 왠지 정답게 느껴진다. 다음으론 주민들의 캘리그래피 작품이 눈길을 끈다. “얼음 깨고 빨래하던 시절, 참 힘들고 고달픈 세월이었지만 그 시절이 그립기도 하네.” “상추, 열무, 깻잎, 부지깽이 자라던 곳에 큰 건물, 작은 건물, 주차장, 집들이 들어섰다.” 기교 없는 담백한 문장이 마음에 콕 박힌다. 얼굴 모를 누군가의 삶이 파노라마처럼 스친다.

호천마을에서의 마지막 목적지는 호천문화플랫폼으로 정했다. 드라마 명대사가 쓰인 술병 트리, 네온사인 간판, 평상과 담금주 등을 비치해 실제 촬영지보다 더 남일바 같은 곳이다. 바 뒤로 각양각색의 파스텔 톤 옷을 입은 집들이 그림처럼 펼쳐지고, 저 멀리 부산항대교도 보인다. 시원한 전경에 가슴이 탁 트인다. 산자락에 옹기종기 모인 집들을 찬찬히 눈에 담으며 드라마 명대사를 다시 한번 되새긴다. “네가 있는 데가 너한테 메이저 아냐? 네가 좋은 데가 너한테 메이저 아니냐고. 그냥 더 가슴 뛰는 거 해!”


낙후한 공구 골목의 변화, 전포카페거리

두 발 딛고 선 자리를 메이저로 만든 청춘이 가득한 전포카페거리로 이동했다. 한국전쟁 이전까지 전형적인 농촌이던 이곳은 산업화를 거치면서 완전히 달라졌다. 전쟁 당시 미군이 들여온 군용 차량을 정비하는 육군 차량 재생창이 전포동과 인근 지역에 자리 잡았다. 이후 차량 부품을 취급하는 공구상과 관련 공장이 차츰 늘었다. 한국지엠의 시초인 신진공업사도 1960년 이곳에 부산 공장을 준공했다. 그러다 보니 1960~1970년대엔 500여 개의 상점이 밀집할 정도로 번성했다. 울산이나 경남 지역에서 부품을 구하러 일부러 찾아 오기도 했다. 경남모직, 대양고무, 흥아타이어 같은 기업도 이곳을 발판 삼아 힘차게 성장했다.

그것도 잠시, 1980~1990년대 제조사가 이전하는 등 상권이 변화하면서 하락세를 보였다. 가게 대부분이 영업을 마친 오후 5시 이후엔 인적이 뚝 끊기곤 했다. 건너편에 위치한 서면 번화가와는 분위기가 사뭇 달랐다. 활기를 잃은 골목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은 것은 다름 아닌 커피였다. 2009년 허름한 공구 상점 사이로 카페 불빛이 반짝였다. 번화가를 벗어난 외진 지역, 커피 맛에 집중한 자그마한 카페는 입소문을 타기 시작했다. 철 깎는 쇳소리가 울려 퍼지던 거리에 원두 볶는 소리가 더해졌다. 특색 있는 카페가 늘어나면서 골목 깊이 커피 향이 배어들었다. 그 결과, 오늘날 전포카페거리는 부산을 대표하는 명소로 발돋움했다. 카페뿐 아니라 공방, 빈티지 숍, 소품 가게 등 개성 넘치는 가게가 많아 시간 가는 줄 모른다. ‘고기로 하나 되는 순간’ ‘인생도 초밥처럼 날로 먹고 싶다’ ‘회사원 세트’처럼 짧지만 강렬한 문구가 호기심을 부르는 맛집도 곳곳에 보인다. 그러다 어느 틈에 고무 금형, 특수공구, 안전화 같은 단어가 쓰인 간판을 마주하며 이 길의 묘미를 다시금 깨닫는다. 공구와 커피라는 서로 다른 두 단어가 낯선 듯 절묘한 조화를 이룬다. 환상적인 궁합을 자랑하는 이 조합은 길 건너 전리단길과 전포사잇길까지 영역을 넓히는 중이다.

2018년 전후, 존재감을 드러낸 전리단길은 공구상과 카페, 공방이 가까워 한층 이색적이다. 골목 대여섯 개 규모에 대부분의 상점이 통유리로 이뤄져 천천히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하다. 무인으로 운영하는 서핑잡화점, 공항 라운지처럼 꾸민 카페, 손 글씨를 배우거나 가죽 지갑을 만드는 공방 등 시간 내서 방문하고 싶은 상점이 골목을 풍성하게 메운다. 마음에 쏙 드는 가게에서 추억을 쌓거나, 그저 걷기만 해도 즐거운 길이다. 지난 1월 개관한 전리단갤러리에서 전시를 관람하는 것도 좋겠다. 세월의 흔적이 묻어나는 건물 2층, 투박한 계단을 밟아 도착한 곳에서 예술을 만난다.

사실 이 거리엔 또 하나의 예술이 존재한다. 공업사 철문이 하나둘 닫히면 이곳은 전시장이 된다. 지난해 개최한 ‘전리단길 청년미로(美路)’ 디자인 공모전에서 수상한 작품을 철문에 그려 넣었기 때문이다. 무지갯빛 커피에서 뛰노는 아이, 친근하게 대화하는 바리스타와 손님, 턱을 괴고 무언가 바라보는 남자 등 저마다의 그림체와 색채를 지닌 작품이 공간에 생동감을 더한다. 전포카페거리와 전리단길 다음으로 형성된 전포사잇길은 다소 한적한 주택 단지에 속해 있다. 공업사뿐 아니라 세탁소, 미용실 등 생활감 넘치는 풍경에 아기자기한 카페와 베이커리, 브런치 가게가 스며들어 또 다른 낭만을 전한다.


오늘의 낭만, 내일의 역사

부산진구가 거쳐 온 수많은 역사를 헤아려 본다. 그속엔 잃어버린 땅을 되찾고, 새로운 터전과 문화를 일궈 낸 사람들이 있었다. 이들의 노력이 모여 오늘의 낭만이 탄생했다. 언제든 부산시민공원에서 해바라기하는, 호천마을의 평화로운 일상을 다독이는, 전포카페거리에 절묘한 화음이 울려 퍼지는 낭만 말이다. 고단했던 시간이 현재의 낭만을 선물했듯, 수고로운 오늘이 훗날 부산진구를 더욱 아름답게 빛낼 것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부산진구엔 낭만이 가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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