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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a촌자 Jan 19. 2020

걸작의 절정, 바티칸 (2)

이탈리아 사진 기행

미술관을 빠져나오면 바로 시스티나 예배당. 불후의 명작 천지창조와 최후의 심판이 있는 곳.  


본격적으로 미켈란젤로의 작품을 감상하기 전에 그의 작품 일생을 잠시 살펴보면  

피에타: 1498~99 (23세~24세), 

다비드: 1501~04 (26세~29세), 

천지창조: 1508~12 (33세~37세), 

최후의 심판: 1537~41 (62세~66세), 

베드로 성당 돔: 1547~63 (72세~88세).  

1564년 89세 사망. 

10대 후반에 메디치가에서 인문학 수업을 받고 20대 초반에는 무연고 시신으로 해부를 할 수 기회까지 얻어 예술을 위한 만반의 준비를 마친 후 로마로 내려와 피에타 작업을 필두로 하여 베드로 성당 돔 작업을 하며 마지막 숨을 거둘 때까지 한평생을 전력 질주하며 살았다.

 

천지창조나 최후의 심판 때문만이 아니라 작품 전반에 걸쳐서 삶에 대한 진지함과 작품에 대한 열정이 다른 천재들과는 차원이 다른 불세출의 거장. 시스티나 예배당과 베드로 성당 또한 미켈란젤로로 인해서 완성된 또 하나의 거대한 작품이다.

출처: http://www.museivaticani.va/content/museivaticani/en/collezioni/musei/cappella-sistina.html

예배당 복원을 처음 시작한 식스토 4세의 이름에서 유래하여 시스티나 예배당이라 불리며 차기 교황을 선출하는 콘클라베가 열리는 곳. 


오른쪽 끝에 보이는 작은 문을 통해서 들어오면 5분~10분 정도 그림을 감상한 후 사진 제일 아래에 있는 가운데 문을 통해서 나가게 된다. NO PHOTO를 외쳐대는 경비원. 그 와중에 사진기 셔터를 눌러대는 사람들. 2014년 작품 복원을 마친후부터는 사진 활영은 금지. 예전에는 사진 촬영이 가능했었다고 하니 사진 인연도 닿아야 찍는다.  


구약성서에 나오는 솔로몬의 성전과 같은 규모로 천정 높이가 20미터 길이 40미터 너비 13미터. 직접 눈으로 보니 규모에 압도당해서 그림에 감동을 할 여유가 없다. 더구나 그림은 멀어서 잘 안 보이고 사방 천지가 그림으로 꽉 차있으니 뭐가 뭔지 몰라서 더더욱 안 보인다. 미켈란젤로의 천정화와 사진 한가운데 보이는 최후의 심판, 보티첼리의 <모세의 일생>, <그리스도의 유혹>, <코라의 형벌> 등 3점의 벽화가 양옆으로 있고 페루지노의 <성 베드로에게 하늘나라의 열쇠를 주시는 그리스도>가 있다는 걸 집에 와서라도 알게 되니 얼마나 다행인가? 

 

바티칸 박물관 홈페이지에 가면 360도 뷰를 포함해서 그림 감상은 고화질로 충분히 할 수 있게 되어 있다. 로마를 가실 분들은 꼭 링크를 클릭해서 살펴보고 가시라. 관련 링크: http://www.museivaticani.va/content/museivaticani/en/collezioni/musei/cappella-sistina/tour-virtuale.html

출처: https://en.wikipedia.org/wiki/Sistine_Chapel_ceiling

조각가 미켈란젤로한테 그림을 의뢰한 것도 모자라 높이 20미터의 천정에 가로 13미터 세로 40미터를 채우라니 고분고분할 리가 없다. 누가 봐도 뻔한 브라만테의 엿먹이기 기획의도는 작품 주제조차 흔하디 흔한 12 사도. 그림을 그리게 함으로써 중간에 작업을 포기하고 카톨릭 교회와의 계약위반으로 인한 업계 매장 등의 수순을 기대했을 것. 하지만 미켈란젤로의 뒤집기 한판이 있었으니 그림 주제는 12 사도 대신 구약성경의 창세기를 근간으로 천정화의 중심부를 천지창조, 아담과 이브의 창조 그리고 노아 이야기 이렇게 각각 3 부분 3 작품으로 완성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조상과 그 패밀리를 작품에 포함시킨다. 가족을 천지창조와 동급으로 놓았으니 트집 잡을 여지를 아예 없애버린 것. 미켈란젤로의 작품을 이해하다 보면 매번 카타르시스 같은 것을 느끼게 되는데 이번에도 예외가 없다. 시원하고 멋지다.  

출처: https://en.wikipedia.org/wiki/Sistine_Chapel_ceiling

구약에는 나(하느님)의 모습을 그리지 말라고 되어 있어 하느님의 모습을 그리는 것이 금기시되어 있으나 신약에 나오는 구절에 근거하여 하느님의 모습을 그려 넣는 미켈란젤로의 대범함. 33세~37세 사이에 작업을 했으니 이때만 해도 젊었다. 하지만 젊다고 겁도 없이 하느님 얼굴을 그릴 수는 없는 일. 그의 용기 덕분에 하느님의 얼굴을 본다. 


작업 기간이 4년 넘게 걸린 것으로 되어 있는데 실제로 작업하는데 오롯이 4년 걸린 것은 아니고 교황청에서 중간에 급여를 주지 않아 조수들이 도망가고 미켈란젤로도 피렌체로 가버린다. 그 후 교황이 사람을 보내 사정사정하여 모시고 오는 등 애증의 다툼이 1년 넘게 있었던 것. 교황 율리우스 2세는 앞편에서 라오콘 이야기할 때도 언급을 했지만 영묘 제작하라고 불러놓고 베드로 성당 신축한다고 임의로 계약 파기한 바로 그분이다. 그때도 그러시더니 천정화 작업하는데 또 약속 불이행. 미켈란젤로 입장에서 뚜껑이 열릴 만하다. 물론 교황님 입장에서도 베드로 성당 신축공사를 시작해버렸으니 자금 부족이야 당연한 것. 

제목: 노아의 방주 출처: https://en.wikipedia.org/wiki/Sistine_Chapel_ceiling

천정벽화 작업 중 제일 처음 그린 작품  <노아의 방주>. 등장인물 숫자도 많고 처음 그리다 보니 실수도 많아 3개월 가까이 걸려서 완성한다. 작업을 하고 아래에서 올려다보니 작품이 뭔지 보이지도 않고 그림이 작으니 감동도 적었다고. 그 후로는 등장인물수를 줄여 인물을 크게 하고 프레스코 벽화에 대한 기술적 이해도도 상당한 수준으로 올라가서 마지막 작품을 완성할 땐 40일 정도밖에 걸리지 않았다고 하니 무서운 천재임에는 틀림이 없다.


미켈란젤로가 프레스코화를 그려보지 않아서 초기에 그린 작품은 떨어지고 훼손된 부분이 있다고 한다. 하지만 그 또한 그의 작품이라 교황청에서는 그대로 두기로 결정한다. 프레스코화 작업이 석회를 바르고 마르기 전에 물감을 칠해서 물감과 석회가 동시에 말라야 하기에 타이밍이 생명인데 너무 일찍 칠을 하면 석회가 떨어지고 늦게 칠을 하면 나중에 그림이 떨어진다.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프레스코 대신 마른 석고에 작업을 시도한 것이 밀라노에 있는 산타마리아 델레 그라치에 성당의 그 유명한 <최후의 만찬>. 이 그림은 다빈치 생존중에 파손되어 이후 메디치가에서 완전히 후원을 끊게 만들었으니 다빈치로선 비운의 작품. 

출처: https://en.wikipedia.org/wiki/Sistine_Chapel_ceiling

하루 만에 어둠에서 빛을 나누신 하느님처럼 미켈란젤로도 하루 만에 이 그림을 완성한다. 하기사 어둠을 밤이라 하고 빛을 낮이라 하셨다고 하니 이틀 걸리면 밤낮이 헷갈리니 그 또한 큰일이긴 하다. ^^ 

제목: 천지창조 중 아담의 창조 출처: https://en.wikipedia.org/wiki/Sistine_Chapel_ceiling#/media/

창세기 중 하느님이 인간을 흙으로 만들고 코로 숨을 불어넣어 생명체로 만들었는데 이에 대한 직접적 묘사는 동성애에 대한 오해의 소지가 있어 간접적으로 표현한 것. 아담의 육체는 이미 만들어진 상태이고 영혼을 불어넣을 때 하느님과 거의 수평적 구도를 취한 것이 주목할 만하다. 르네상스의 인본주의 사상이라고는 하지만 추기경들 미사 보고 교황 선출하는 예배당 천장에 하느님과 인간을 대등한 위치에 놓고 그림을 그렸다는 것은 엄청난 발상인데 그걸 행동에 옮겼다는 것은 목숨을 거는 용기가 필요한 대단한 일. 옷을 입고 있지 않은 것만 목숨을 건 게 아니다. 


하느님을 둘러싸고 있는 망토는 인간의 뇌를 닮았다. 하느님의 왼쪽 팔 안에는 이미 이브가 들어 있어 이미 운명처럼 정해져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아담의 왼쪽 다리 무릎에서부터 발 아래쪽으로 보면 머리를 제외한 여성의 가슴 배 다리가 보이는데 이브의 몸이 아담 안에 이미 준비되어 있음을 나타내고 있다. ‘내 안에 너 있다’의 미켈란젤로 버전. ^^ 이 당시만 해도 남자의 정자가 뇌에서 나온다고 알고 있었기에 뇌 그림 안에 이브를 넣어 둔 것이라는 의견도 있으니 참고하셔도 되겠다. 

출처: https://en.wikipedia.org/wiki/Sistine_Chapel_ceiling

손가락이 붙지 않고 떨어져 있는 실제 간격 3/4인치, 1.9cm. 흔히 인간이 완벽해질 수 없음을 이야기할 때 언급되는 그림이다. 2% 부족한 게 아니라 2cm 부족한 것. 


아담의 창조는 영화 ET에서 모티프로 사용되기도 했는데 스필버그 감독은 손가락이 만나는 모습만 쓰면서도 로열티를 지불했다고 하니 그 또한 마케팅의 천재. 천지창조에 나오는 장면으로 영화의 상징성을 부각시켰으니 마케팅은 기가 막히게 성공한다.

제목: 궁창 가르심 출처: https://en.wikipedia.org/wiki/Sistine_Chapel_ceiling

<궁창 가르심>  4명의 이누디와 방패 2개. 남자 모델에 대해선 설명이 명확하지 않지만 20명 모두 앉아 있는 자세라서 뒤틀기를 많이 하지 않았다고 하는데 저렇게 뒤틀고 앉아 있으면 1분도 되지 않아 쥐가 나지 싶다. 로뎅의 생각하는 사람은 여기 비하면 편안한 자세. 천정화엔 총 20명의 이누디(Ignui)와 10개의 방패(shields)가 그려져 있다. 


올 누드 작품이다 보니 작업 중간에 딴지 거는 사람들이 하도 많아서 천지창조를 그리는 동안 아무도 보지 못하게 문을 잠그고 작업을 한다. 바로 옆 건물에서 작업을 하고 있던 라파엘로가 중간 작업이 너무 보고 싶어 후원자 브라만테한테 열쇠를 받아 중간에 살짝 들여다보았는데 너무나도 감동을 받은 나머지 아테네 학당에 미켈란젤로를 추가했을 정도이며 이후 라파엘로의 그림에도 근육질의 인물들이 등장하기 시작한다. 

제목: 최후의 심판            출처: https://en.wikipedia.org/wiki/The_Last_Judgment_(Michelangelo)

천지창조 작업 이후 교회는 베드로 성당 신축공사에 일로매진하면서 자금 충당을 위한 레오 10세의 면죄부 발행으로 종교적 문제가 발생하게 되고 더불어 정치적으로 스페인과 신성로마제국의 카를 5세와 발루아 왕가 프랑스의 프랑수아 1세와 그 후계자 앙리 2세 간의 대립관계에서 클레멘스 7세가 줄타기에 실패하여 국제적으로 고립되는 상황을 맞이하게 된다. 그러던 와중에 신성로마제국의 군대가 로마에 쳐들어왔는데 그중 일부가 통제에서 벗어나 무차별적으로 로마 시내를 약탈하는 이른바 사코 디 로마 (로마의 약탈) 사건이 발생한다. 이에 클레멘스 7세가 신성로마제국의 약탈에 대한 분노의 감정을 달래기 위해 1533년 미켈란젤로에게 제작을 의뢰한다. 클레멘스 7세의 선종으로 작업은 중지되었으나 뒤이은 교황 바오로 3세가 다시 작업 의뢰를 함으로써 1541년 마침내 <최후의 심판>이 완성된다.


평소 미켈란젤로가 단테의 신곡을 줄줄 외우고 성경에 대한 이해도가 웬만한 성직자보다 높은 수준이다 보니 작품의 종교적 완성도는 탁월하다. 신곡의 내용을 바탕으로 천국과 지옥 그리고 심판을 받는 연옥을 표현했는데 초기 작품에는 천지창조에 이어 이번에도 모든 등장인물이 실오라기 하나 걸치고 있지 않아서 미켈란젤로 본인도 이 그림을 완성하고 나면 이번에는 정말 종교 재판으로 죽을 수도 있다고 생각을 했을 정도.

출처: https://en.wikipedia.org/wiki/The_Last_Judgment_(Michelangelo)#

이 그림은 1549년에 추기경의 부탁으로 미켈란젤로의 제자 마르셀로 베누스티가 베껴놓은 것인데 나폴리 카포디만티 미술관에 보관 중이다. 미켈란젤로가 그림을 완성한 것이 1541년이니까 8년 뒤의 그림. 추기경이 앞으로 그림이 어떻게 될지 모르니 최대한 가릴 것은 가리고 원본에 가깝게 카피를 해달라고 부탁했는데 미켈란젤로 제자 아니랄까 봐 예수 그리스도를 제외하곤 여전히 아무도 옷을 입지 않았다. 심지어 성 베드로 조차 아무것도 걸치지 않았으니 나머지는 말할 것도 없다. 그림의 분위기로 봐서 아마도 초기 미켈란젤로 원작에는 예수 그리스도조차도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상태가 아니었을까 싶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림 속에 심어 놓은 신의 한 수가 있는데 그것은 수도복을 입고 무덤에서 올라오는 영혼을 돌보는 천사 얼굴에 바오로 3세를 넣은 것. 아무튼 그 때문인지 혹은 미켈란젤로가 베드로 성당 돔 작업을 하는 책임자였기 때문인지는 몰라도 바오로 3세 이후 교황이 3번 바뀌는 22년간 그림이 무사할 수가 있었고 1564년 미켈란젤로가 사망하는 그 해 트리엔트 공의회에서 그림 수정 결정을 내린다.  

출처: https://en.wikipedia.org/wiki/The_Last_Judgment_(Michelangelo)

신의 한 수 두 번째. 산채로 껍질을 벗기는 형벌로 순교한 성 바르톨로메오의 가죽에 자신의 얼굴을 넣어 추함을 극대화시킨 것. 이른바 셀프 디스. 살가죽이 신고 있는 장화로 미켈란젤로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https://en.wikipedia.org/wiki/The_Last_Judgment_(Michelangelo)

그리고 신의 한 수 세 번째. 목욕탕에나 어울릴 그림이라고 악담을 날린 채세나 추기경을 지옥에 떨어진 예술을 알아먹지도 못하는 당나귀 귀를 한 미노스로 표현해 놓으면서 뱀이 남성의 거시기를 물고 있어서 그와 관련하여 당시 성적으로 부정한 인물들에 대한 단죄의 의미도 함께 넣은 것. 하지만 이것은 간접적인 의미의 보복이고 직접적으로 채세나 추기경과 그의 추종자들을 기함(氣陷)하게 한 것은 최후의 심판이 그려진 곳이 교황을 선출하는 콘클라베가 열리는 곳이고 추기경이라는 직책은 교황을 꿈꾸는 카톨릭의 꽃이라는 것. 지옥에서 처벌을 받고 있는 추기경을 누가 교황으로 추천할 것이며 설사 추천한다고 하더라도 누가 찬성표를 던지겠는가. 앞으로 교황이란 자리는 꿈도 꿀 수 없도록 만들어 버렸으니 채세나 입장에선 미치고 환장할 노릇. 채세나 추기경이 교황한테 본인 얼굴을 빼 달라고 요청을 하자 본인도 천국에 간신히 올라온 입장이라 지옥은 자신의 권한 밖이라며 한발 물러섰다고...^^ 


채세나 추기경 왼쪽 발 옆에 우골리노 백작과 루지에리 대주교가 있다. 단테의 신곡 9번째 배반자의 지옥에 등장하는 인물로 배신과 배반으로 얼룩진 삶의 주인공들. 스승을 은 30냥에 팔아먹은 가롯 유다도 9번째 지옥 동반자.

출처: https://en.wikipedia.org/wiki/The_Last_Judgment_(Michelangelo)

왼편은 제자 마르셀로 베누스티의 작품이고 오른편은 제자 다니엘 볼테라의 터치.


세월이 흘러 미켈란젤로 임종 직전 미켈란젤로의 제자 볼테라가 중요부위 가리개 작업을 한다. 하지만 스승의 작품을 다른 사람이 손대게 해서 망치게 할 수는 없다는 사명감으로 기저귀 전문 화가라는 비아냥까지 감수했던 그는 결국 자살로 삶을 마감하니 그 당시의 긴장과 갈등이 얼마나 심했는지 알 수 있다.


성 캐서린과 성 블라시우스의 그림인데 자신의 상징인 바퀴를 들고 있는 캐서린은 여자. 하지만 원작에서는 남성적으로 그리고 가슴만 추가한 것처럼 보인다. 이를 두고 예배당에 여성 누드모델을 구해 놓고 그릴 수가 없어서 남자 모델로 그림을 그리고 마지막에 여성의 가슴만 그려 넣었다고 하는데 그건 어째 선뜻 동의할 수가 없다. 성 블라시우스는 양털을 손질하는 솔로 고문을 받다가 순교하여 손에 솔을 쥐고 있다. 그런데 무슨 이유에서인지 수정 후엔 왼쪽 겨드랑이 사이에 있던 얼굴이 없어졌고 얼굴 포지션을 바꿔 고개를 돌리고 있다. 어쨌거나 성 블라시우스를 검색하다 보니 그는 크로아티아 두브로브니크의 수호성인. 그곳에는 성 블라시우스 이야기가 넘쳐난다. 이래서 또 두브로브니크를 가봐야 할 이유가 한 가지 추가된다. 

총 391명의 인간의 모습을 그려 넣었는데 인간의 모습을 제외한 파란색 바탕만 생각하며 눈을 지그시 감고 다시 보면 해골의 윤곽이 느껴진다. 물론 그림의 전반적인 분위기도 서늘하다.


인터넷에서 누군가가 스타워즈의 다스베이다가 최후의 심판에서 모티브를 얻어 만들었다고 하길래 한번 겹쳐보니 그 비율이 비슷하다. 굳이 아니라고는 못하겠다. 


독일의 시성 괴테는 공직생활을 하다가 다소 늦은 나이인 37세에 이탈리아로 가서 1년 10개월을 머무는데 그중 특히 로마를 떠나지 못하고 로마에서만 13개월을 머문다. 그를 로마에 붙잡아 둔 여러 곳 중의 하나가 바로 이곳. <이탈리아 기행>에서 “시스티나 예배당을 보지 않고서는 인간이 지닌 위대함의 가능성이 어느 정도인지 평가할 수 없다”라고 할 만큼 시스티나 예배당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다. 그렇다면 로마는 2번이 기본? ^^

시스티나 예배당을 나오면 곧바로 베드로 성당. 입장료는 무료지만 박물관 투어를 하지 않는 경우 광장에서 줄을 서야 한다. 

거장 미켈란젤로가 나이 72세가 되어 시작한 베드로 대성당 돔. 하지만 그는 기둥과 돔 아래 원통형만 세워놓고 마무리된 것을 보지 못하고 89세에 생을 마감한다. 작업을 시작하기 전 바오로 3세가 세상에서 가장 크고 아름다운 돔을 만들어 달라고 요청하자 미켈란젤로는 피렌체 두오모보다 크게는 지을 수 있지만 더 아름답게는 지을 수 없다고 했다고 전한다. 아마도 피렌체 두오모의 동서남북을 둘러싸고 있는 화려한 대리석 조각 장식을 염두에 두었지 싶다. 하지만 크게 짓겠다는 약속을 지키겠다고 판테온 돔을 연구하던 중 판테온은 신의 작품이라 여기고 판테온 보다 더 큰 돔을 짓는 것은 신에 대한 도전이라 생각하고 43.3미터의 판테온 지름보다 1.8미터 작은 41.5미터로 돔을 설계한다. 그나마 높이 138미터로 설계함으로써 피렌체 두오모(높이 114.5미터) 보다 큰 돔을 짓겠다는 약속은 지킨다. 그렇지만 돔 자체가 피렌체 두오모 (내부 지름 45.5미터) 보다 작기 때문에 일말의 미안함은 있었지 싶다. 그래서 더더욱 돔 자체를 아름답게 지으려고 돔을 계란형으로 설계하고 돔 상단에 빛이 들어오는 랜턴의 모습도 왕관을 쓴 모습으로 설계한다. 하지만 미켈란젤로 사후(死後) 돔 내부 지름의 크기가 판테온보다 작고 피렌체 두오모 돔보다 작다는 것을 알게 된 교황 율리오 3세가 노발대발하며 당장 더 크게 바꾸라고 지시하지만 이미 돔 기둥을 마무리한 후라서 돌이킬 수 없는 상황임을 인지하고 포기하였다는 뒷이야기가 있다.  


메디치가에서 배출한 교황 2명은 역사에 지울 수 없는 치욕적인 흔적을 남기는데, 그중 한 명이 베드로 성당 신축 자금을 모으기 위해서 면죄부를 발행한 레오 10세, 그리고 또 한 명이 신성로마제국 카를 5세한테 무자비하게 약탈당하고 베드로 성당이 마구간으로 전락할 만큼 처참하게 뭉개지며 자신은 산탄젤로 성으로 도피하여 7개월을 자진 감금한 <로마의 약탈>의 주인공인 클레멘스 7세. 면죄부로 인해 종교 개혁이 시작되고 로마의 약탈로 르네상스는 사실상 종지부를 찍게 된다. 

그림: 네로 서커스 (네로의 원형 경기장) 출처: https://en.wikipedia.org/wiki/Circus_of_Nero

성 베드로 성당 건축 이야기를 하려면 고대 로마 네로 황제 때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역사상 최악의 대화재 (로마, 런던, 도쿄 대화재)에 이름을 올릴 만큼 그 피해가 엄청났던 대화재 이후 민심수습을 위해 물심양면으로 노력하지만 불타는 로마를 보며 시를 읊었다는 등의 유언비어가 사그라들지 않고 계속되자 네로 황제와 귀족들은 화재의 원인을 기독교인으로 몰아가며 기독교 탄압을 본격화한다. 이 과정에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가 경기장 한가운데 있던 오벨리스크 앞에서 서기 64년 순교한다.  

출처: https://en.wikipedia.org/wiki/Circus_of_Nero#/media/File:Plan_of_Circus_Neronis_and_St._Peters.g

순교 이후 베드로는 네로 황제의 경주장 옆에 있는 비아 코넬리아 옆 공동묘지에 묻히게 되는데 비석도 표지도 없이 이름이 뜻하는 붉은 돌만 있었고 이후 249년간 기독교의 박해가 이어진다. 서기 313년 대천사 미카엘과 가브리엘의 도움으로 기적적인 승리를 얻은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밀라노 칙령으로 하느님께 약속했던 베드로와 바오로의 무덤 위에 대성당을 세울 것을 공표하고 초기 베드로 성당이 건축된다. 그리하여 콘스탄티노 대성당을 건축하게 되는데 세월이 흐르고 15세기 말 아비뇽 유수를 거치면서 노화가 심해져서 교황 니콜라오 5세가 교회 재건축을 시도하지만 콜로세움에서 2,522개의 돌을 가져오도록 지시한 것 말고는 진척이 없다가 1506년 율리오 2세 때 시작되어 1626년에 완공되었으니 성당 건축에 120년이 걸린다. 120년이라니 그 기간도 참 오묘하다. 1년이 12달. 12달이 120번. 12X10이니 굳이 따지자면 완성의 완성이라는 의미.  


현재의 대성당 위치와 예전 네로 원형경기장을 함께 표시한 그림인데 성 베드로의 무덤이 정확히 돔 아래쪽에 있다. 

“너는 베드로이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 터인즉, 죽음의 힘도 감히 그것을 누르지 못할 것이다. 또 나는 너에게 하늘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 마태오 16장 17-19절 TV ES PETRVS ET SVPER HANC PETRAM AEDIFICABO ECCLESIAM MEAM. TIBI DABO CLAVES REGNI CAELORVM라고 적혀 있는 글씨가 돔 테두리를 둘러싸고 있다. 글자 하나의 높이가 2미터라고 하니 눈이 아무리 나빠도 못 읽을 일은 없지 싶다. ^^  베드로라는 이름은 라틴어로는 “페트루스(Petrus)”인데, 그리스어로 “돌” 또는 “바위”를 뜻하는 “페트라(petra)”에서 유래한 것. 어쩌면 베드로는 예수님이 베드로라고 이름 지은 순간부터 이미 순교의 운명이 정해졌고 그의 무덤 위에 성당이 지어질 운명이었는지도 모른다. 


하늘나라의 열쇠를 주셨다고 하여 성당의 모습을 십자가로 하긴 하는데 두 길이가 같은 그리스식 십자가로 할 것이냐 라틴십자가로 할 것이냐를 놓고 이견이 많았다. 결국 카톨릭의 성지에서 그리스식 동방교회 십자가는 맞지 않는다고 하여 나중에 라틴십자가로 설계 변경한다. 어찌 되었건 우린 십자가라고 쓴 것을 하늘나라의 열쇠라고 읽으면 된다. 

구글 어스로 살펴본 열쇠의 모습. 열쇠의 핵심 부분 (Key)이 성당 중심부와 정확히 오버랩된다. 

CC BY Diliff SA License출처: https://ko.wikipedia.org/wiki/성_베드로_대성당#

가끔 돔에 올라가서 내려다본 광장에서 강가로 뻗은 길의 모습이 열쇠 모양이라고 하시는 분들이 계신데 그건 아니다. 설마 성당에서 키를 성당 바깥으로 그려놓을 리가 있겠는가? 천국의 열쇠가 성당 밖에 있으면 누가 성당 안으로 들어오겠는가? ^^


사진에서 보다시피 광장에서 성당으로 들어가는 길이 평행선이 아니고 사다리 모양으로 성당 방향으로 폭이 더 넓게 되어 있다. 그래서 성당이 더 커 보여서 결과적으로 더 가깝게 보이도록 기획된 광장. 출발은 부지 부족에서 시작했지만 결과적으로 원근법적 효과를 누리게 된다. 이런 식으로 의도된 모습의 원조는 미켈란젤로의 캄피톨리오 광장. 미켈란젤로는 기발하고 독특한 아이디어로 건축과 조각에서 새로운 지평을 열었던 천재임에 틀림이 없다. 캄피톨리오 광장은 다음 편 이야기에 등장하니 지금은 패스. 

아마도 성당 바깥쪽을 보면서 열쇠를 본다고 하신 분들은 그림과 같은 현대식 열쇠를 떠올리셨지 싶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현대식 열쇠에는 키(Key)에 해당하는 십자가가 없다. 십자가는 천지창조 첫 번째 그림 <어둠에서 빛을 나누심>처럼 어둠(陰, 一)에서 빛(陽, 丨)을 나누셔야 十(완전할 십)이 된다. 

베르니니가 설계한 높이 20미터 무게 37톤의 발다키노. 이곳에서 교황이 미사를 집전한다. 천정을 보면 천사들이 열쇠와 칼을 들고 있는데 열쇠는 성 베드로의 상징이고 칼은 성 바오로의 상징.   


여기에 들어간 청동을 구할 길이 없어 판테온의 천장에서 뜯어왔는데 초기 베드로 성당을 개축할 때는 돌이 부족하여 콜루세움을 뜯어오기도 했다. 자금이 부족하여 면죄부까지 발행했으니 무리가 많았다. 그래서 로마 교황청은 더 이상은 베드로 성당보다 더 큰 성당을 짓지 못하도록 교황령으로 금지한다. 그런데 딱 한 곳 베드로 성당보다 더 큰 규모의 건축을 허락해준 곳이 있으니 바로 바르셀로나의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 (일명 가우디 성당). 이러면서 그곳을 다녀와야 할 이유가 한 가지 추가된다. 

물감이나 염료를 쓴 곳은 단 한 곳도 없다. 대리석과 금 그리고 청동 등 변하지 않는 영원불멸의 재료로만 만들었다는 성당 내부. 공사를 하다 보니 규모가 너무 커져서 성당이 작아 보이도록 하려고 일부러 높은 곳의 조각이나 글씨를 더 크게 하여 원근감을 없애려 했다는 설명이 덧붙는다. 하지만 그것은 성당은 작게 보이고 메시지는 크게 보이는 일석이조를 의도한 것. 

중앙 제단 뒤쪽에 위치한 베드로의 의자와 성체 경당. 전하는 이야기로는 성 베드로가 로마에서 선교 활동을 할 때 앉았던 나무 의자의 조각들을 모아 5세기경 상아로 장식된 의자로 만들었고 그 후 교황 알렉산데르 7세가 베르니니를 시켜 그 의자 위를 무게가 약 75,000kg에 달하는 청동으로 입히고 장식한 것이라고...

미켈란젤로 돔 내부. 예수 그리스도와 성모 마리아의 모습.

성당 내부를 장식하고 있는 라파엘로의 유작 <그리스도의 변용>.  물감을 쓰지 않으니 그리스산 대리석을 색상별로 구해와서 연필심처럼 길게 밀어 넣어 완성한 그림. 연필심 대리석의 길이가 1미터가 넘는다고 하니 천년이 지나도 색상이 변할 염려는 없겠다. 피, 땀, 눈물이 따로 없다. <BTS>

대성당 입구를 들어서면 바로 오른쪽에 자리하고 있는, 미켈란젤로가 23세부터 다듬어서 24세에 완성한 피에타. 대리석으로 만든 작품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만큼 섬세하고 정교하다. 접힌 치마가 손으로 당겨 펴면 펴질 것 같다. 대리석의 부드러움을 극대화하기 위해 말가죽으로 2만 번 이상을 문질러서 윤기를 냈다고 하니 미끄러질 듯 반질거린다. 손목을 갈아 넣었다는 얘기는 이럴 때 하는 것. 


마리아의 얼굴이 매우 앳되게 표현되었다는 둥,  예수의 몸에 비해 마리아의 신체 비율이 비정상적으로 크다는 둥, 그리고 사망한 후 사후 강직이 일어났어야 하는 예수의 몸이 너무 부드럽게 늘어졌다는 둥 비판적인 의견도 있지만 역설적으로 그런 점들 덕분에 피에타의 독창성이 돋보이는 것이 아닌가 싶다. 보면 볼수록 빠져들어간다. 

처음에 피에타가 세상에 공개되었을 때 하늘에서 천사가 내려와서 조각을 했는데 다른 지방의 천재 조각가가 완성했다는 이야기를 듣게 된 미켈란젤로는 자신의 이름을 새기기로 하고 밤에 몰래 가서 “피렌체의 미켈란젤로가 만들다”라고 새겨 넣는다. 이후 일약 스타가 되면서 2년 뒤 다비드 상 제작 의뢰를 받는 등 유명세를 타게 되지만 신은 이 세상을 창조하고도 어디에도 서명을 남기지 않았는데 자신은 스스로를 드러내고자 서명을 남긴 것이 부끄러워 이후로는 서명을 남기지 않았다고 한다. 

그렇다면 다비드 상 오른쪽 다리에 새겨진 이니셜 M N은 무엇일까?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 그렇다면 미켈란젤로 본인 이니셜은 아니다. 아마도 후에 누군가가 미켈란젤로의 M과 자신의 이니셜을 소심하게 새겨 넣은 듯. 하지만 아직까지 아무것도 확인된 바는 없다. ^^

CC BY SCAN THE WORLD SA 4.0 License출처: https://en.wikipedia.org/wiki/Pietà_(Michelangelo)#

피에타를 위에서 바라본 모습. 균형과 조화가 위에서 내려다 본 모습에도 완벽하게 적용되어 있다.  “이 조각은 신에게 바치는 것이니 인간의 시선으로 이해하지 말라”는 미켈란젤로의 이야기가 비로소 이해가 간다. 

라즐로 토스라는 호주 거주 헝가리 출신 지질학자가 자신이 죽음에서 부활한 예수라고 하면서 본인 나이 33세 (예수님 사망나이 33세)가 되는 해 1972년 자신의 어머니는 저렇게 생기지 않았다며 망치로 12차례 내리쳐서 피에타상을 훼손시킨다. 코와 왼쪽 팔이 떨어져 나간 것을 후에 복원한 것.


사고가 나자 성당 측은 파편을 주워간 사람들에게 연락을 해서 일일이 수거하여 조각조각 맞춰가며 복원했다고 하는데 물론 전부 다 돌려받지는 못했지만 예술작품을 사랑하는 그 마음과 복원을 위한 과정이 아름답다. 

베드로 성당을 둘러본 후 밖으로 나오면 광장 한복판에 세워진 붉은 화강암 원석 이집트 오벨리스크가 보인다.

태양신을 숭배와도 관련이 있다고 알려진 오벨리스크를 베드로 광장 한복판에 세워둔 이유는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가 순교한 곳이 네로 경기장 한복판에 세워져 있던 오벨리스크 앞이었기 때문. 고대 로마의 아우구스투스 황제가 이집트에서 알렉산드리아로 옮겨 놓은 것을 칼리굴라 황제가 로마로 옮겨 왔고 이후 교황 식스토 5세의 지시로 현재의 위치로 옮겨진다.

1586년 오벨리스크 옮기기 By Niccola Zabaglia출처: https://ko.wikipedia.org/wiki/성_베드로_광장

100미터도 되지 않는 거리를 옮기는데 저렇게 많은 사람들의 공을 들인다. 베드로 광장의 오벨리스크가 한 번도 넘어지지 않고 옮긴 유일한 오벨리스크라고 하는데 그것을 지키기 위해서였는지 교황 식스토 5세의 지시로 태스크 포스팀을 만들어 6개월에 걸쳐 오벨리스크를 옮긴다.  


무게 320톤의 거대한 돌덩이를 세워서 옮겨야 하니 위험하기도 하거니와 극도의 주의를 기울여야 하기에 교황은 지켜보는 사람 중에 소리를 내는 사람은 사형에 처한다는 엄명을 내리는데 밧줄과 밧줄이 엉키면서 마찰을 일으켜 불이 붙고 마는데 아무도 말을 하지 못하고 지켜만 보고 있었다. 말을 하면 사형이라고 하니 누가 말을 하겠는가. 그런데 갑자기 누군가 “밧줄에 물을 부으시오”라고 외치면서 사태 해결을 하게 된다. 그 사람은 선원이었고 사태의 심각성을 파악하고 목숨(?)을 걸고 외쳤던 것. 덕분에 아무 문제없이 이동 작업을 마칠 수 있었고 교황은 성지주일에 성 베드로 대성전에 종려나뭇잎(성지 가지)을 공급할 수 있는 권한을 상으로 내리고 그 영광과 특권이 오늘날까지 그 후손들에게 이어지고 있다고 한다. 이래서 가끔은, 아주 가끔은, 목숨 걸고 일을 해야 할 때도 있는 법이다. 

110명 규모로 15세기 교황 식스토 4세 시절부터 로마 교황청 수비를 맡고 있는 스위스 근위대. 이들은 신성 로마제국의 카를 5세의 공격으로 로마가 폐허가 되었을 당시 다른 용병들은 모두 도망을 갔음에도 187명의 근위대 병력 중 147명이 전사하고 40명은 끝까지 남아 교황 클레멘스 7세를 대성전 안으로 무사히 피할 수 있도록 지키며 교황이 비밀통로를 통하여 산탄젤로 성까지 이동할 수 있도록 지킨다. 남은 40명도 교황이 산탄젤로 성으로 도피하는 동안 전원 전투 중 사망. 초기 베드로 성당 설계 당시 우피치 미술관 도면을 참조했는데 그때 만들어놓은 비밀통로가 결정적인 도움이 된다. 덴 브라운 원작의 영화 천사와 악마(로마 편)에 등장하는 그 비밀통로. 


공식 제복을 보면 노랑, 파랑, 빨강, 주황 등의 색상이 혼합된 르네상스풍. 이 제복의 디자인도 미켈란젤로와 라파엘로가 했다고 하니 도대체 이들의 손길이 닿지 않은 곳은 어디란 말인가? ^^ 옷의 스타일은 미켈란젤로. 색상은 라파엘로. 딱 보니 알겠다. ㅎㅎ

우피치 미술관 라파엘로의 방에 전시되어 있는 방울새의 성모라는 라파엘로의 작품. 빨강 노랑 파랑을 이렇게 화려하고 활력이 넘치게 사용한 작가는 단연 라파엘로 밖에 없다. 근위대의 제복을 보니 이 그림이 떠오른다.  

기왕 그림이 나왔으니 좀 더 살펴보고 넘어가자. 로렌초 나지라는 친구를 위해 결혼 기념으로 그려준 그림인데 지진으로 집이 붕괴되면서 그림이 조각조각 17갈래 찢어진다. 500년의 세월이 지나 복원작업이 시작되었고 완전히 복원하는데 1998년부터 10년이 걸렸다고 하니 작품 복원에 열과 성이 대단하다. 복원 전 그림은 약간은 칙칙한 색상이었으나 X-Ray 판독과 과거 작품과의 비교를 통해 거의 완벽하게 복구되었다는 것은 우피치의 자랑. 


성모 마리아 앞에서 세례 요한이 아기 예수에게 방울새를 건네고 있다. 가시나무 숲에 사는 검은 방울새는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의 언덕을 오를 때 이마에 박힌 가시를 부리로 떼어냈는데 그때 이마에서 피가 튀었다고 한다. 그래서 그런지 방울새 머리 부분이 붉게 물들어 있다. 이후 그림 속의 검은 방울새는 아기 예수의 고난을 상징하게 된다.

CC BY Andrew Bossi SA 2.5 License출처: https://ko.wikipedia.org/wiki/빈사의_사자상#/media/파일:6308_-_Luzern

스위스 용병하면 떠오르는 또 다른 이야기. 루체른에 있는 빈사의 사자상. 심장을 창에 찔려 죽어가면서도 부르봉 왕가의 상징 백합이 그려진 방패를 사수하고 있는 길이 10미터 높이 6미터의 사자 조각상이다.


프랑스혁명 당시 튈르리 궁을 사수하다 786명 사망한 라이슬로퍼 스위스 용병을 추모하기 위해 제작되었다. 당시 루이 16세는 상황이 궁극으로 치닫자 스위스 용병들에게 고향으로 돌아가도 좋다고 떠날 것을 허락하지만 충성서약을 한 스위스 용병은 살아서는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는다며 끝까지 싸웠다는 이야기. 그 당시 스위스에 먹고 살 일이 막연하여 해외로 용병으로 파견 나가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던 그들이었기에 충성서약을 어기면 그들의 후손들이 용병으로 일을 할 수 없음을 알고 죽음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가슴 아픈 사연. 

 

성당 전면 파사드. 건물 위로는 가운데 십자가를 들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와 12제자가 있고 아래 입구 양쪽에는 천국의 열쇠를 들고 있는 성 베드로와 칼을 들고 있는 성 바오로가 보인다. 

광장을 어머니의 팔처럼 둘러싸고 있는 베르니니의 회랑. 회랑을 구성하는 기둥 284개와 돌출 기둥 88개로 된 회랑 위에는 140개의 성인상이 조각되어 있다. 


오늘 이 정도의 대기줄은 그리 많은 편이 아니라고 하니 그것이 더 놀랍다. 

성당 전면부 오른편에 교황의 아파트가 있었는데 성당에서 보이는 것이 싫었는지 가림막 공사의 명목으로 회랑을 멋지게 지어놓은 것. 그래서 기둥이 4개씩이나 필요했고 그 기둥들은 동심원을 중심으로 하여 각각 일렬로 있어야 했다. 그래야 중심 지점에서만 4개의 기둥이 하나로 보이고 그 외의 지점에서는 사진처럼 기둥에 가려서 광장 밖의 아파트가 보이지 않는다. 따라서 베르니니의 회랑은 미적인 이유나 건축 구조학적인 이유가 아닌 다소 인간적인 필요에 의해 설치된 구조물.


베드로 성당까지 투어를 마치니 오후 2시. 오전 8시부터 입장하여 꼬박 6시간을 둘러보니 당도 떨어지고 기운도 없다. 구글맵을 찾아보니 한식당이 몇 군데 있는데 강 건너기 전 서울의 가로수길 같은 트레스테베레 지역에 딱 한 곳 한국 식당이 있다. 지하철 타러 갈 힘도 없다. 점심을 먹고 숙소에서 쉴 일정도 아니니 돈을 쓰고 체력을 아끼는 걸로 결정. 프리나우앱을 켜니 1분 만에 택시가 온다. 고맙다 프리나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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