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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a촌자 Jan 24. 2020

콜로세움에 감춰진 네로 이야기

이탈리아 사진 기행

오전엔 콜로세움과 포로 로마노, 팔라티노 언덕을 가이드 투어의 도움을 받아 구경하고 오후에는 베네치아 광장, 캄피돌리노 언덕을 지나 해질녘의 콜로세움과 대전차 경기장을 둘러보는 여정이다. 이탈리아 여행은 걷는 일정이 많다 보니 신발은 편안한 것이 필수고 여름 로마는 체력이 필수.  

평균 6만5천 명 규모의 육상 및 수상 경기가 가능한 원형경기장 콜로세움. 상암 월드컵 경기장이 66,000석 정도니까 비슷한 규모. 각 층마다 80개 총 320개의 아치가 있어 30분이면 전체 인원이 한꺼번에 들어가거나 나올 수 있도록 설계한 아치 건축의 정수. 아치는 기원전 2500년 인더스 문명에서 최초로 사용되었지만 콜로세움 공사하면서 주인을 제대로 만난다. 역시 가진 자가 주인이 아니라 쓰는 자가 주인. 억울하지 않으려면 아끼지 말고 많이 써야 한다. 물론 가끔 관절이나 와인처럼 아낄수록 가치가 올라가는 것이 있기는 하다. 하지만 그것도 너무 아끼면 ㄸㅗㅇ되는 것은 마찬가지. 

Fire in Rome by Hubert Robert, 출처:https://en.wikipedia.org/wiki/Great_Fire_of_Rome

로마 대화재 이후 사태 수습에 실패한 것도 모자라 폐허가 된 동네 한복판에 황금궁전을 지었으니 네로가 폭군이라 낙인찍힌 이유를 알겠다. 네로 이후 3명의 황제가 불과 1년 안에 암살과 피살을 반복하고 난 후 동부 유대 전선 사령관이었던 베스파시아누스가 황제로 추대되어 로마로 돌아온다. 


로마 재정은 이미 거덜이 난 상태이고 로마 시민의 불만은 사그라들 줄 모르던 시기여서 황제는 뭔가 획기적인 해결책을 제시해야만 했기에 대규모 토목건축 프로젝트를 추진한다. 정복지에서 획득한 노예와 전리품으로 공사 예산을 충당하면서 네로의 황금궁전에 있던 호수의 물을 빼고 그곳에 <플라비안 원형 경기장>을 신축한다.

 

CC BY Jaime Jones SA 4.0 License출처: https://en.wikipedia.org/wiki/Colossus_of_Nero#

자유의 여신상이 111피트인데 네로 청동상이 103피트라니 그 당시 저런 걸 어떻게 만들었을지 궁금하긴 하다. 콜로세움이라는 이름은 네로의 황금 연못 옆에 서 있던 네로의 거대 동상 콜로서스(Colossus)에서 유래한 것. 

그리스의 3가지 기둥 양식이 모두 적용되었는데 1층은 도리아식, 2층은 이오니아식, 3층은 코린트식. 도리아식은 주춧돌이 없고 기둥머리는 사발과 정방형으로 되어 있다. 이오니아식은 주춧돌이 있고 기둥머리에는 양머리 모양의 소용돌이가 있어  여성스러운 양식. 코린트식은 주춧돌이 있고 아칸서스 잎을 겹쳐놓아서 외관상 가장 화려해 보인다. 


사진 가운데 하얀 대리석 십자가 표시는 콜로세움의 붕괴위험이 알려지자 곧바로 복구 지시를 내린 비오 9세의 표식.

로마 카톨릭의 순교 현장의 흰 비둘기 한마리. 노아의 방주에서 올리브 가지를 물고 돌아온 역할하고 평화의 상징이 된 덕분에 개체수 증식에 제한이 적은 운이 좋은 놈들이다. 

사진을 확대하여 살펴보면 쉽게 알아볼 수 있다. 고교시절 세계사 수업 시간에는 별로 알고 싶지도 않더니 여행 가서 이렇게 모아놓고 비교해 보고 있다.  4층 처마엔 햇빛 가림 차양막을 펼치는 기둥을 지탱하던 홈이 보인다. 로마인들은 참으로 다양한 시도를 했다. 그 시절 차양막이라니. ^^

실내 관중석은 총 4개 층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1층은 원로원 지정석, 2층은 귀족과 기사, 3층은 중산층, 4층은 여자, 외국인 그리고 노예한테 배정했는데 4층은 입장료가 무료여서 로마 거주민 모두를 위한 공간으로 기획되었다. 

십자가가 놓인 자리가 황제가 앉았던 곳이고 그 옆으로 베스타 사제들이 함께 있었다. 1749년 베네딕토 14세는 이곳을 그리스도인들이 박해를 받았던 상징적인 곳이라며 성지로 지정하고 2000년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십자가가 세워진다. 


곳곳에 보이는 구멍은 대리석이 붙어 있던 흔적인데 성당 공사용으로 떼어내기도 했고 도둑맞기도 하여 현재는 남은 대리석은 없고 그 흔적만 즐비하다. 

기독교 순교자들의 마지막 기도, by Jean-Léon Gérôme (1883)출처: https://en.wikipedia.org

네로는 로마 대화재의 원인을 기독교인의 탓으로 돌리며 네로의 원형경기장에서 이런식의 박해를 했고 그곳에서 베드로와 바울이 순교하여 그 자리에 성 베드로 성당이 지어졌다. 


베스파시아누스의 둘째 아들, 콜로세움의 또 다른 폭군 도미티아누스도 네로 코스프레를 하면서 기록 말살형을 받으면서 폭군의 자리에 이름을 올린다. 부자 3대 못 간다고 하더니 아버지는 건물 짓고 형은 전쟁터에서 챙겨온 전리품으로 실컷 공사를 마무리했더니 결국 놀고먹던 동생은 그걸 또 말아먹는다. 

베스파시아누스 황제의 첫째 아들 티투스 황제는 콜로세움 완성 100일 축제기간 동안 진행된 모의 해상전투 나우마키아를 선을 보였는데 워낙 준비하는 과정도 복잡하고 시간도 오래 걸려서 나우마키아는 세 차례 진행했다. 하지만 도미티아누스 황제가 즉위하면서 본격적인 검투사와 동물들 간의 시합을 보기 위해 해상전투를 위한 호수는 다른 곳으로 옮기고 지하공간은 사진에서 보이는 것처럼 동물들을 보관할 수 있는 밀림 같은 건축물이 들어선다.

시멘트 콘크리트와 아치가 없었다면 불가능했던 아치에 의한, 아치를 위한, 아치의 건축물.

복구작업을 마치고 단장을 해놓은 건물 남쪽을 보니 이 덩치 큰 건물이 곱다. 역시 아름다움은 디테일이다. 

콜로세움에서 포로 로마노 방향으로 보이는 비너스와 로마 신전. 로물루스의 건국 이야기를 신화로 만들자니 비너스 출동하고 로마 에테르나까지 거든다. 


이민족 융합정책으로 다신교였던 로마이기에 모든 신을 다 믿었고 그중에서 제일 으뜸 베스타 여신. 그리스 신화에서 평생 처녀로 살겠다고 맹세한 헤스티아와 같은 신이다. 

포로 로마노 한복판에 위치한 베스타 여신을 모시는 사제들의 거주지. 로마 건국 신화의 주인공 로물루스와 레무스의 엄마 레아 실비아가 베스타 여사제였으니 신전은 그 당시 로마 문화의 핵심인 셈이다. 베스타 사제와 눈이 마주쳐도 사형수의 사형 집행을 면하게 해 줄 만큼 그 권세가 막강했는데 그들은 불 그리고 순결 딱 2가지만 지키면 임무완수. 불은 꺼지지 않게 지키면 되고 결혼도 하면 안 되고 순결을 잃어서도 안된다. 불과 순결 중 하나만 잃어도 목숨을 잃는다. 40세가 되어 은퇴하면 결혼을 할 수 있었는데 그 당시 평균수명이 40세였다는 것을 고려하면 말이 그렇다는 것이지 사실은 결혼하지 말라는 얘기다.

베스타 신전 옆 사제 거주지에 있는 연못. 불을 지키는 것이 목숨과도 같았으니 항상 불이 활활 타올라야 안심이다. 그러자니 옆에 물이 한 말통은 넘어야 한다. 그러고 보면 로마의 집집마다 베스타 여신을 모셨으니 항상 화재의 위험이 도사리고 있었고 집집마다 저런 우물이 있었을 리는 만무하다. 귀족들이 집에 목욕탕을 만들어 물을 채워놓았던 까닭이 로마가 너무 더웠던 때문만은 아니지 싶다.

파괴되고 남은 베스타 신전의 모습. 역사상 로마의 약탈은 세 번. 기원전 390년 갈리아족에 의한 약탈이 첫 번째, 서기 410년 서로마 제국 멸망의 계기가 된 서고트족에 의한 약탈이 두 번째, 그리고 세 번째는 1527년 신성로마제국 카를 5세에 의한 약탈인데 로마 대화재 당시보다 피해가 컸다고 할 정도. 두 번째는 기독교가 국교였으니 묵인했을 것이고 세 번째는 신전이고 뭐고 챙길 여력조차 없었을 것.

베스타 신전과 캄피돌리노 광장 사이의 포로 로마노. 부루투스가 카이사르를 암살하고 나서 암살의 당위성을 시민들에게 연설을 한 곳이고 안토니우스가 카이사르의 장례를 치르면서 카이사르의 모든 재산은 로마 시민들에게 돌려준다는 연설을 한 곳이기도 하다.

베스파시아누스 황제가 콜로세움 공사를 할 수 있도록 전쟁을 통해 재정적 뒷받침을 확보한 그의 아들 티투스 황제의 개선문. 그는 고대 유대 왕국을 정복하고 수많은 전리품을 챙기고 귀국한다. 그 당시만 해도 갈리아 지방(프랑스, 독일, 벨기에, 네덜란드 등 포함)보다 그리스 동쪽 지방의 살림살이가 좋아서 많은 지휘관들이 갈리아 지역을 기피하고 동방원정을 선호하였다. 알렉산더 대왕이 자꾸 동쪽으로 간 까닭이 거기에 있었다. 

4두 마차 에쿠스. 예전의 황제들은 4마리의 말이 끄는 마차를 사용했는데 도로의 기준이 되는 마차가 2마리니까 4두 마차를 많이 썼다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 그런데 진시황은 특이하게 5마리 마차를 좋아했다. 물론 5마리 마차를 여불위가 타고 다녔다는 이야기도 있기는 하다. 누가 되었건 5마리 마차는 그걸 좋아하는 것으로 끝날 일이 아니다. 도로를 5마리에 맞춰 넓혀야 하니 백성들이 죽어난다. 움직였다 하면 욕을 먹는 걸 본인만 모른다.

시간이 방향을 잃어버린다는 로마. 포로 로마노 중에서도 고대와 중세 그리고 근대의 시간이 동시에 존재하는 곳이 있으니, 제일 하부는 고대 로마, 중간 정도는 중세, 그리고 상층부는 현재 로마 시청사로 사용되고 있는 사진 정면으로 보이는 건물이 그것. 건물 바로 뒤쪽은 로마 7 언덕 중 가장 신성시된다는 캄피돌리노 언덕이다. 


사진 오른쪽에는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개선문. 

The Arch of Septimius Severus painted by Canaletto in 1742 출처: https://en.wikipedia.org/wiki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황제가 서기 203년 파르티아(이란)와의 전쟁에서 승리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서 세워졌다. 가운데 아치문이 하나 있고 양 옆으로 보조 아치문이 2개 있어 근대 개선문 양식의 기본이 된다. 그림을 보니 포로 로마노 발굴 이전에는 이렇게 절반이 땅속에 묻혀 있고 양쪽의 보조 아치도 막혀있다. 역시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다.  

출처: https://ko.wikipedia.org/wiki/로마의_일곱_언덕

로마의 7 언덕이 어딘지 궁금하여 찾아보니 도심에서 동남쪽이 거의 다 언덕이다. 테베레 강의 범람이 심해서 아마도 언덕을 선호했지 싶다. 언덕들 한가운데 콜로세움이 있고, 캄피돌리노 언덕은 로마 도심과 포로 로마노를 연결하는 위치에 있다.  팔라티노 언덕은 로마 왕국의 설립자 로물루스가 제일 처음 정착한 곳이고 팔라티노 언덕과 아벤티노 언덕 사이에 대전차 경기장이 보인다.


바티칸 언덕이나 자니콜로 언덕은 테베레강 서쪽이라 7 언덕에 포함되지 않는다. 

오전 콜로세움 일정을 마치고 서쪽 출구로 나오면 산타마리아 인 코스메딘 성당에 있는 <진실의 입>을 들여다볼 찬스가 생긴다. 영화 <로마의 휴일>에 등장하여 유명해져서 관광객이 많다. 사진 한 장 찍겠다고 표를 사고 1시간을 줄을 서서 기다려야 할 수도 있으니 다른 일정이 있으면 패스해도 무방하다. 


헤라클레스 신전의 하수도 뚜껑으로 쓰였을 거라고 추측되는 대리석 가면 조각이다. 중세 시대에 '거짓말을 한 자는 이 조각의 입에 손을 넣어서 잘려도 좋다'라는 서약을 한 데에서 진실의 입이라고 불렸다. 벽 뒷면에 손을 자르는 사람이 도끼를 들고 서 있었다는 설도 있는데 중세시대라면 충분히 그러고도 남았지 싶다. 그 시대에 태어나지 않은 것에 감사드리며 오후 일정을 준비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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