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 사진 기행
피에솔레 구경을 마치고 유로 자전거나라 우피치투어 모임 장소에서 일행을 만나 미술관 입장한다. 우피치는 영어로는 오피스. 조르조 바사리가 메디치 가의 코시모 1세 데 메디치(국부 코시모가 아님)를 위하여 1560년도부터 짓기 시작하였고 1581년에 완성된다. 그들의 미술품 컬랙션은 마지막 메디치 가의 후손인 안나 마리아 루이자 데 메디치가 미술품을 피렌체 밖으로 반출하지 않는다는 조건하에 피렌체 시에 기부된다.
예전에 박물관을 가이드 없이 보고 나오니 뭘 봤는지도 모르겠고 보고 난 후 남는 것도 없었다. 물론 파리 루브르는 크리스마스 시즌이어서 가이드 투어가 없기는 했지만 그래도 설명 없는 루브르는 전리품 보관소에 불과했다. 그 이후로는 박물관과 미술관은 반드시 가이드 투어. 애들 엄마는 루브르는 무효라고 다시 보러 가야 한다고 하니 아무래도 파리는 한번 더 가게 생겼다.
위의 사진은 우피치 미술관을 아르노 강 건너편에서 바라본 모습. 사실 미술관 입구가 뒤쪽에 있고 출구도 다른 쪽이라 어디로 들어가서 어디로 나왔는지 가늠이 잘 되질 않는다.
시뇨리아 광장 다비스 상이 있는 곳에서 들어가면 마주하는 기다란 2개의 건물이 우피치 미술관.
수많은 인파를 헤치고 검색대를 통과하여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 르네상스 시대를 열었던 교황들 사진이 걸려 있다. 메디치 가문에서 교황을 3명이나 배출했으니 교황은 그들에겐 중요한 존재. 오른쪽부터 왼쪽 방향으로 자객을 보내 쥴리아노 메디치를 암살한 식스투스 4세, 인노첸트 8세, 면죄부 발부 등 비리 충만 알렉산데르 6세, 베드로 성당 공사를 시작하고 미켈란젤로의 천지창조를 의뢰한 카리스마 쩌는 율리우스 2세.
영화 <냉정과 열정 사이>에서 준세이가 걸었던 우피치 회랑 2층. 천정에 그려진 그림이 웬만한 유명 디자이너의 스카프 디자인보다 나아 보인다.
우피치 미술관의 주인공 산드로 보티첼리. 우피치에서 가장 큰 방을 배정받았는데 그에게 헌정된 방 사이즈만 해도 바로 옆에 있었던 다빈치 방의 4배나 되며 전시된 작품수도 단연 으뜸이다. 더군다나 다빈치는 밀라노에서 최후의 만찬이란 작품을 만들 때 젖은 벽에 그림을 그리는 프레스코 기법을 거부하고 마른 석고에 유채로 그리는 새로운 방식을 선택하지만 작품이 그의 생존중에 파손되는 비극이 발생한다. 이를 계기로 메디치의 후원이 완전히 끊겼으니 많은 작품을 남길 수도 없었다.
그림의 제목은 비너스의 탄생. 하늘의 신 우라노스와 땅이 신 가이아 사이에서 인간이 탄생하는데 그 아들 중 하나인 크로노스(시간의 신 크로노스와는 다르다. 헷갈리지 말자)가 폭행을 일삼는 우라노스를 제거하려는 가이아의 뜻에 동참하여 아버지의 생식기를 낫으로 잘라 바닷속에 던져버린다. 바닷속에 던져진 우라노스의 생식기에서 거품이 일어났고 그 거품에서 비너스가 탄생한다. 남성의 거시기에서 태어난 것도 모자라 바람기 넘치는 성향 덕분에 아프로디테 포르네 (음란한 아프로디테, 포르노의 어원)라는 별명까지 생길 정도. 비너스는 2가지 자세가 있었는데 하나는 손으로 몸을 가리는 베누스 푸티카(겸손한 비너스), 또 하나는 베누스 아나디오메네 (바다에서 솟아나는 비너스)로 다소 관능적인 비너스의 자세. 모델이 자신이 사모하는 인물이었던지라 보티첼리는 겸손한 비너스를 선택한다.
비너스의 주인공은 시모네타 베스푸치. 제노바 출신으로 마르코 베스푸치와 결혼하면서 피렌체로 오게 되는데, 미스 피렌체 수준의 미모로 유부녀인데도 메디치 일가의 흠모 (특히 메디치가의 공동 통치자 쥴리아노 데 메디치가 심하게 좋아함) 했다고 알려져 있다. 그 당시 베스푸치 패밀리는 나중에 아메리고 베스푸치가 아메리카 대륙에 이름을 올릴 때에도 메디치가와 연락을 주고받을 만큼 세력이 막강했고 보티첼리는 베스푸치 패밀리의 후원을 받는 예술가로 일하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시모네타를 보고 첫눈에 반하고 짝사랑을 하게 되면서 이후 보티첼리가 그린 많은 그림에 시모네타가 등장한다.
루브르 박물관에 소장 중인 프랑스 낭만주의 화가 테오도르 샤세리오의 비너스 아나디오메네. 1838년 作. 비너스의 상징 조개를 밟고 있으며 방금 물에서 올라왔는지 머리에선 물이 떨어지고 있다. 베누스 푸티카와는 달리 어딜 가리지도 가릴 생각도 없어 보인다. 아프로디테 포르네의 컨셉에 좀 더 충실한 비너스의 모습이다.
마상 시합에서 우승한 후 낮잠을 즐기고 있는 마르스 (쥴리아노)와 속이 다 비칠 듯한 옷을 입고 있는 비너스 (시모네타). 시모네타는 마상 대회에서 실시된 미스 피렌체 선발대회에서 우승한다. 그런데 또 한 가지 우연의 이름으로 진행된 인연이 있다. 마상 대회 겸 미스 피렌체 선발대회가 실시된 것이 1475년, 시모네타가 폐결핵으로 사망하는 것이 1476년 4월 26일, 쥴리아노가 암살당하는 것이 그로부터 2년 뒤 4월 26일. 그림을 그릴 때 보티첼리가 본 것은 과연 무엇일까? ^^
신화적 주제로 그린 최초의 작품 ‘라 프리마베라(봄)’. 그림 감상 순서가 오른쪽에서 왼쪽이라고 하는데 바람의 신 제피로스가 바람을 부는 방향도 그림 왼쪽이고 인물들의 자세도 다들 그림 왼쪽을 보고 있으니 그림 감상 순서가 그러한 까닭이 납득이 간다. 비너스가 가운데 서있고 제일 오른쪽에서 바람의 신 제피로스가 그 옆에서 피하려는 클로리스를 잡고 있고 클로리스는 꽃의 여신 플로라로 변신중. 변신 중인 대상 2가지를 동시에 그려 넣은 것이 특이하다. 왼쪽으로는 애욕, 순결, 아름다움을 상징하는 삼미신이 있는데 가운데 순결의 여신이 큐피드의 화살을 맞은 듯한 표정으로 왼쪽의 전령의 신 헤르메스를 쳐다보고 있다. 로렌초 메디치 조카 결혼선물로 제작한 것이어서 그런지 등장인물들 대부분이, 심지어는 큐피드까지 약간 아랫배가 나온 모습인데 순풍순풍 아기 많이 낳으라고 임신을 상징하는 모습을 그림에 넣었다.
꽃의 여신 플로라에 시모네타를 그려 넣었는데 시모네타가 22살에 폐결핵으로 사망할 당시의 창백한 모습. 안타까운 보티첼리는 시모네타가 폐결핵으로 사망했다고 비너스 어깨 뒤로 오렌지 나무 숲 사이에 폐를 그려 넣었다고 하는데 다시 보니 그리 보이기도 한다. 역시 아는 만큼 보인다.
프리마베라 작품에서 보티첼리가 그린 꽃의 묘사에 드린 공이 예사롭지 않다. 그 종류만 해도 190가지가 넘는다고 하며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상상의 꽃도 그려 넣었다. 피렌체에 본사를 둔 구찌(GUCCI) 본사 디자인팀에서 프리마베라에 나오는 꽃과 식물을 아직도 참조하고 있을 정도.
산드로 보티첼리의 <동방박사의 경배>. 이 작품은 은행가인 구아스파레 델 라마가 1475년 금융업(이라고 쓰고 고리대금업이라 읽는다)으로 벼락부자가 된 이후 메디치가와의 친분 과시용으로 보티첼리에게 의뢰하여 산타마리아 노벨라 성당에 봉헌한 것. 아기 예수 앞의 코시모 메디치, 동방 박사 2명은 그의 아들 피에로와 조반니. 손자인 로렌초와 쥴리아노는 왼쪽 끝에 그려져 있다. 오른쪽에 머리 허연 백발의 중년 남성이 의뢰자 델라마. 그리고 오른쪽 제일 아래 끝이 산드로 보티첼리 화가 본인이다. 보티첼리는 "작은 술통"이라는 뜻이니 덩치가 크지 않아 보이고 술을 어지간히 사랑했나 보다. 눈에서 읽어지는 표정이 적어도 맨 정신은 아니지 싶다. 수면이 부족하거나 산소가 부족해 보인다.
이 작품을 완성할 당시가 1476년. 그림 속의 쥴리아노는 유일하게 홀로 칼을 들고 자신의 말과 함께 그려져 있는데 2년 뒤 1478년 두오모 대성당에서 암살당한다. 암시라면 섬뜩하고 우연이라면 절묘하다.
우피치 미술관 2층에서 밖으로 보이는 베키오 회랑. 로렌초 데 메디치와 함께 피렌체를 공동 통치하던 동생 쥴리아노 데 메디치가 피렌체 대성당에서 암살당한 후 로렌초는 암살 공포증에 시달려서 우피치에서 강 건너 피티 궁으로 이동할 때 개인 통로를 이용한다. 사진에 보이는 기와지붕 2층이 메디치가의 비밀통로. 우피치는 오피스의 이탈리아어. 일은 우피치에서 하고 집은 강 건너 피티 궁이었으니 중간에 아무도 접근하지 못하게 2층 통로로 다닌 것. 인페르노라는 영화에서 소개되어 더 많이 알려지게 되었고 실제 성베드로 성당 설계할 당시 우피치 미술관 설계도를 참조했는데 당연히 비밀통로도 포함이다. 성당의 비밀통로는 로마 대학살 당시 교황 클레멘스 7세가 산탄젤로 성으로 도망갈 때 요긴하게 사용된다.
쥴리아노는 법적으로 미혼이었지만 서자 쥴리오 데 메디치를 두고 있었으며 쥴리오는 이후 교황 클레멘스 7세가 된다. 메디치가에서 배출한 교황이 3명. 메디치 가문 초창기 폐위되고 쫄딱 망한 교황한테 거금을 신용 대출해줘서 그 신용으로 메디치 은행이 교황청의 공식은행이 되면서 엄청난 부를 축적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쥴리아노가 암살된 것도 교황 식스투스 4세가 보낸 자객 때문인데 식스투스 4세는 메디치한테 대출을 신청했는데 로렌초가 거절하자 앙갚음을 한 것이다. 알고 보면 이 모든 것이 결국은 돈 때문~~
동생이 암살당하고 나서 로렌초의 의뢰로 미켈란젤로가 쥴리아노의 조각상을 만들었는데 이를 본 로렌쵸가 실제와는 다르게 너무 잘 생기게 만든 것 아니냐고 묻자 미켈란젤로가 “괜찮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앞으로 이 얼굴로 기억할 것입니다”라고 했다는 뒷 이야기. ^^ 바로 그 흉상이 오늘날 미대 입시 석고데생의 단골 모델인 쥴리앙. 비현실적 턱선의 원조 꽃미남.
이제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방. 예전에는 보티첼리 방 옆에 있었는데 최근에 리모델링하면서 방을 옮겼다. 안드레아 델 베로키오와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그리스도의 세례>. 베로키오는 제자인 다빈치에게 그림 왼쪽의 천사 두 명의 얼굴을 그리게 했는데 다빈치는 천사 두 명의 얼굴이 명확할 리가 없다며 윤곽을 흐릿하게 처리하면서 공기 원근법 스푸마토 기법을 적용한다. 이를 본 베로키오는 제자의 재능에 탄복하며 붓을 꺾고 이 후로는 그림을 그리지 않는다.
제목 수태고지. 투시 원근법과 대기 원근법을 적용하여 그렸을 뿐만 아니라 보는 각도에 따라 그림이 달라지는 왜곡 기법까지 포함하고 있다.
천사 가브리엘의 세 손가락은 은총을 뜻하며 천사 가브리엘 얼굴 앞에 그려진 백합은 순결을 상징한다. 마리아가 읽고 있던 책이 놓여 있는 책상은 그 당시 다빈치가 일하던 베로키오 공방에서 작업 중이던 지오반니 메디치와 피에로 메디치의 무덤용 석관의 모습과 닮았다.
피렌체 가기 전부터 우피치를 다녀와야 하는 단 하나의 이유가 이 작품이었으니 그림의 설명 외에 좀 더 살펴본다. 노란색 구분선은 피보나치의 0.618 황금분할선. 다빈치는 거의 종교처럼 황금분할선을 따르고 있다. 빨간색 구분선은 두오모 돔을 완성한 부르넬레스키가 2차원의 종이 위에 3차원을 그릴 수 있게 해주는 원근법을 개발한 이후 다빈치의 또 다른 종교가 된다. 다빈치의 천재성은 부르넬레스키의 선형 원근법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대기 원근법을 개발하여 먼 곳에 있는 물체는 희미하게 표현하여 원근감을 구현한 것. 사진으로 말하자면 심도(Depth of Field)에 해당한다. 마지막으로 찾은 다빈치의 천재성은 왜곡기법. 현재의 그림에서는 성모 마리아와 천사 가브리엘의 시선이 소실점과 일치하지 않는다. 보통 소실점은 작가의 시점이며 두 주인공의 시선과도 일치한다. 이제 파란색 구분선이 소실점과 일치하게 되는 다빈치의 또 다른 천재성을 살펴보자.
의뢰를 받을 당시 이 그림은 산 바르톨로메오 올리베토 교회의 제단화로 좌측 상층부에 전시될 예정이어서 다빈치는 작품 감상의 공간적 왜곡까지 염두에 두고 그린 것. 성모 마리아와 천사 가브리엘의 간격이 이제는 적당해 보이고 두 인물 사이의 시선과 소실점 위치와의 간격이 좁혀져 보인다. 더 아래로 내려가서 위로 쳐다보아야 제대로 감상할 수 있다는 점을 감안하자.
미켈란젤로의 유일한 패널화 톤도 도니 (도니에게 준 동그란 그림이라는 의미) 성모 마리아, 성요셉 그리고 아기 예수를 그린 성가족(사그라다 파밀리아)화. 사그라다 파밀리아? 어디서 많이 들었다 싶어서 찾아보니 바르셀로나의 가우디 성당이 그것. 뒤쪽에 옷을 걸치지 않고 있는 이들은 이교도를 상징하며 그림 오른쪽의 세례 요한은 양가죽을 걸치고 있다.
재미있는 것은 도니가 주문을 하고 나서 그림이 별로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취소를 했다가 주변의 지인들이 그래도 미켈란젤로 그림인데 나중에 돈이 될 테니 일단 갖고 있으라고 하자 다시 달라고 한다. 이에 미켈란젤로가 돈을 당초 주문금액의 2배로 줘야 한다고 하여 예술가와 주문자의 갑을 관계가 바뀐 흔치 않은 케이스. 그림인데 오히려 조각 같은 느낌인 데다가 성모 마리아의 자세는 미켈란젤로가 좋아하는 라오콘의 군상에 나오는 뒤틀기 자세이기까지 하다. 그러니 도니가 헷갈릴 만도 하다. 어쨌거나 1506년에 이 그림 마치고 1508년부터 미켈란젤로는 그 유명한 천지창조를 그리러 로마로 떠난다.
다비드 제작 당시 미켈란젤로는 피렌체 공화정이 수립되면서 로마로 쫓겨난 로렌초 메디치의 아들 피에로 데 메디치를 경계하라고 했는데 결국 메디치가(家)는 피렌체로 복귀한다. 그 후 메디치가(家)와 미켈란젤로의 어색한 동행이 이어지다가 미켈란젤로의 로마행으로 어색함은 일단락된다. 하지만 그 어색함이 우피치 미술관에는 아직 남아 있는 듯하다. 르네상스 최고의 예술가에게 방을 따로 준 것도 아니고 더구나 조각가 미켈란젤로는 없고 도니 패밀리의 요청을 받고 그린 성가족 그림 달랑하나 남아 있다.
파르미자니노의 목이 긴 성모. 고상하고 우아하게 표현하려는 마음에 목과 손이 길고 가늘며 다리도 비정상적인 자세를 하고 있다.
르네상스 이후에 조화와 균형의 완벽함을 벗어나고자 시도했던 예술 양식이 매너리즘인데 이 그림이 그 화풍을 담고 있다. 매너리즘의 직접적인 원인은 바로 미켈란젤로. 그의 철두철미한 완벽함이 매너리즘을 낳았고 미켈란젤로 이후의 예술가들이 창작활동을 하면서 매너리즘에 빠지게 된 것. 매너리즘의 사전적 의미는 예술 창작에 있어서 늘 같은 수법을 되풀이하여 신선미나 독창성을 잃는 일로 타성이라고도 불린다. 하지만 매너리즘은 단어의 본래의 취지는 사라지고 부정적 의미만 오늘날까지 남게 된다.
매너리즘은 제대로 된 대접을 받지 못하다가 이후 바로크 양식, 로코코 양식, 신고전주의와 아르누보라는 새로운 예술사조로 이어진다. 재미있는 것은 르네상스는 메디치 가문의 후원이 있었다면 바로크 양식은 대항해시대의 스페인 포르투갈 자본, 로코코 양식은 영국에서 시작된 산업혁명의 자본이 뒷받침되었고 신자본주의와 아르누보는 미국 자본이 뒷받침되었다는 견해가 있는데 일리가 있는 것 같아 옮겨놓는다. 자본이 뒷받침되지 않는 예술은 존재할 수 없다는 데 동의하기 때문이다.
티치아노의 우르비노의 비너스. 이후 앵그르, 고야, 마네 등 후에 누워있는 누드를 양산하는 촉매 역할을 한다. 300년 뒤 마네의 <올랭피아>에 영감을 주었는데 누드와 나체의 모호한 경계선을 걸어가고 있다. 왜냐하면 주인공 뒤의 검은 벽의 수직선이 가로로 누워있는 여성의 신체 중심과 만나기 때문에 시선을 모호하게 이끌고 있기 때문이다.
우피치에서 관람을 마치고 나오면 베키오 다리 입구가 보인다. 왼쪽 위가 바로 로렌조 데 메디치가 이용했던 2층 비밀통로.
미술관 집중탐구 4시간은 이후 모든 일정을 정리하게 만드는 마력이 있다. 간단한 저녁식사가 우피치 이후의 일정 전부이니 미술관 투어는 체력 좋을 때 해야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