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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녹차라떼샷추가 Sep 08. 2023

일탈이 우연한 발견이 되고


오래간만에 군대 동기들을 만났다. 15년 전에 용산 카투사로 만나 2년을 함께 지낸 친구들이다. 나는 보통 집과 회사만 왔다갔다하기에 이렇게 가끔 저녁 약속이 잡히면 꼭 일탈하는 기분다.


동기 A는 일본계 디자인 회사 한국대표이다. 최근에는 콘텐츠 지적재산권 사업으로 영역을 확장하고 있다. 5살 딸아이가 특정 브랜드의 장난감 인형을 사달라고 매번 조르는 걸 보고, 콘텐츠 사업이 돈이 되겠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사업을 확장한 지는 4개월 정도 되었는데 벌써 여러 고객들하고 굵직한 프로젝트를 진행하게 되었다.


고객사 한 곳에서 애니메이션 캐릭터 론칭 작업을 같이 하고 싶다며, 한 가지 요구사항을 보내왔다고 한다. "애니메이션을 잘 아는 사람이 프로젝트에 같이 참여하면 좋겠다"라고. 동기 A는 아무리 주변에 찾아봐도 자기 인맥에는 소위 '오타쿠'를 찾을 수가 없어서 곤란해하고 있었다.


동기 B는 스펙 끝판왕 SW 개발자이다. 한창 일에 청춘을 불사르다가 지금은 건강이 안 좋아서 잠시 쉬고 있다. 오늘 모임은 동기 B가 말을 꺼내서 성사가 되었다. 이제 슬슬 다시 일을 시작해 보려고 한다고 했다.


동기 A가 애니메이션 캐릭터 론칭 프로젝트에 대해서 이런저런 고민을 털어놨는데, 동기 B 이미 이쪽 업계에서 소비자들이 어떤 걸 필요로 하는지 알고 있었다. 모델링은 어떻고, AI는 어떻게 붙야야 하고, 이걸 참고해 보면 도움이 될 거고 등등. 우리 모두 동기 B가 엄청난 애니메이션 오타쿠였다는 사실을 모두 잊고 있었다.


동기 A는 동기 B 얘기를 듣더니 "내일 당장 우리 회사로 좀 와주면 안 되겠냐"라고 사정을 했다. 이번 프로젝트가 규모도 크고, 현재 진행 중이라서 도움이 꼭 필요하다고 했다. 동기 B는 자신은 그저 팬 입장에서 얘기를 했을 뿐이라며 사양하는 듯했다.


그러다가 동기 A가 이번에 캐릭터 론칭을 하면 일본에서 12월에 열리는 코믹콘에 관계자로 참여할 수 있다는 말을 흘렸다. 동기 B는 코믹콘이라는 말에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러더니 "코믹콘이라면 말이 다르지, 한번 도와줄게"라며 둘 사이의 협상은 극적 타결되었다. 아마도 동기 B는 쉴 동안 부업을 할 겸 동기 A 프로젝트에 같이 참여할 것 같다. 거물급 인재의 마음이 이렇게 쉽게 움직인다니... 오타쿠에게 코믹콘의 영향력란.


오늘 만남으로 동기 A는 일을 풀어나갈 실마리를 찾았고, 동기 B는 무료한 휴식을 벗어나 당분간 자기의 관심사를 일로서 경험하는 재미를 느낄 수 있게 되었다. 그저 오래간만에 안부 인사나 하자고 만든 자리였는데, 얼굴을 맞대고 이런저런 일을 하다보니 각자 가지고 있던 고민이 스르르 풀려나간 결과가 되었다.


내 손에도 지금 풀어야 할 문제가 한가득이다. 올해부터 회사의 비즈니스 전략을 맡고 있는데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해 막혀 있는 부분이 부지기수이다. 오늘 동기들을 만나고 나니, 문제 해결의 실마리는 익숙한 반경을 벗어난 곳에서 발견하게 된다라는 점을 다시 한번 느꼈다. 아직까지 내가 못 풀고 있는 문제는 사무실에 앉아서 고민한다고 풀릴 문제들은 아니었나보다. 혼자만의 고민과 노력이 문제 해결의 능사는 아니니까. 문제 해결을 위해서도 일탈이 필요하다.


쉽게 풀리지 않는 문제를 들고 있다면, 일상을 벗어나 무엇이든 일탈을 한번 해보자. 일탈이 예상하지 못한 우연한 발견으로 이어질 수 있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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