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아들 때린 놈 나와!!
[사건 전말]
며칠 전 어린이집에서 아내와 아들 한울이가 옷가지를 챙기며 하원 준비를 하고 있었다. 마침 한울이 같은 반 친구 호용(가명)이도 하원하려 교실을 나왔다. 호용이는 마중 온 아빠를 보고 달려갔는데, 그러던 중 옆에 서 있던 한울이 가슴을 주먹으로 치고 지나갔다. 퍽! 소리가 날 정도로 세게. 호용이는 한울이를 때리고는 아무런 말도 없이 지나갔다. 부모가 대신 사과할 법하지만, 호용이 아빠도 아무 말이 없었다. 갑작스러운 폭행에 아내와 한울이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아내는 이 상황을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 고민을 하다가, 일단 아무런 대응을 하지 않고 집으로 돌아왔다.
집에 돌아온 아내는 먼저 한울이를 살폈다. 다행히 다친 곳은 없었다. 의외로 한울이는 속상한 내색도 없이 평소처럼 해맑았다. 그렇지만 호용이가 예전부터 친구들을 때렸다는 사실을 알려줬다. 그 때문에 선생님도 호용이를 자주 혼냈다고 했다. 아내는 한울이 말을 듣더니 걱정이 더 커진 눈치였다. 한울이가 순진하고 연약해 보여서 호용이의 공격 목표가 된 건 아닐지 걱정하기 시작했다. 아내는 우선 선생님과 이번 일에 대해서 얘기를 나눠봐야겠다고 했다. 그 말은 사실상 아내가 직접 개입해서 잘못된 상황을 바로잡겠다는 선언과도 같았다. 차분한 한울이와는 다르게 아내는 아들이 맞고 온 일에 격양된 감정을 감추지 못하고 같은 얘기를 반복했다. 아내는 내게도 이런 상황에서는 어떻게 행동하면 좋을지 고민해 달라고 요청했다.
다음날 아내는 한울이를 등원시키면서 선생님에게 어제 일어난 일을 설명했다. 선생님은 호용이가 친구들을 때린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고 했다. 호용이가 폭력적인 행동을 할 때마다 타이르고 통제를 해봤지만, 호용이의 행동이 좀처럼 변하지 않는다고 알려줬다. 아울러 이미 다른 친구들의 부모님과도 호용이와 관련해서 여러 차례 상담을 했었다고도 말했다. 선생님은 호용이 부모님께도 이번 일을 알리고 도움을 요청해 보겠다고 했다. 아내는 선생님과 상담 이후에 한결 마음이 편안해진 것 같았다. 선생님도 이 사건의 심각성에 대해 인지하고 있었고, 또한 주의 깊게 호용이를 관리하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사건 발생 이틀째. 그날은 내가 한울이 등원을 시켰다. 교실 올라가는 계단에서 호용이를 만났다. 호용이는 한울이를 보자마자 "때려서 미안해"라고 사과를 했다. 한울이는 호용이를 쓰윽 한 번 보더니 별 다른 반응 없이 호용이를 지나쳐 교실로 올라갔다. 한울이가 사과를 제대로 받아주었으면 좋았을 텐데, 그런 일에 별로 신경 쓰고 싶어 하지 않는 눈치였다. 아직 사과를 주고받는 일에 익숙하지 않은 탓도 있는 것 같았다. 그래도 호용이가 용기 내서 사과를 했으니 이번 일은 이렇게 마무리될 것 같았다. 다행이었다. 뭐 애들끼리 놀다 보면 그럴 수도 있는 일 정도로 생각할 수 있는 수준이라 생각했다.
한울이를 교실로 데려다주고 나오는데 선생님이 잠깐 면담을 요청해 주셨다. 어제 선생님이 호용이 아빠와 면담한 내용을 설명해 주셨다. 호용이 아빠는 한울이가 맞았다는 얘기를 듣고는 미안해서 어쩔 줄 몰라했다고 했다. 아마 사건 현장에는 있었지만 호용이가 때리는 건 보지 못했던 모양이다. 그리고 집에 가서 호용이가 한울이에게 사과하도록 가르치겠다고 했다고 한다. 오늘 아침에 호용이가 한울이에게 사과한 걸 보니, 호용이 아빠가 상황을 잘 마무리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선생님도 호용이가 한울이에게 사과했다는 말을 듣고는 한결 마음이 편안해진 것 같았다. 선생님은 호용이 일로 걱정 끼쳐드려서 죄송하다며 내게 사과를 하려 했다. 선생님이 사과할 일은 아닌 것 같아서 서둘러 말을 끊었다. 오히려 선생님께 아이들을 세심하게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하다고 말하고 어린이집을 나왔다.
[대응 방법]
어쨌든 호용이가 한울이에게 사과하면서 상황은 일단락된 것 같다. 그렇지만 언제라도 비슷한 상황이 생길 수 있기에 '그럴 땐 어떻게 해야 해?'라는 아내의 질문이 머릿속에 계속 맴돌았다. 이참에 생각을 정리해 두면 나중에 도움이 될 것 같았다. 막상 같은 상황에 다시 놓이게 되면 나 역시 감정적으로 대응할 수 있기 때문에, 미리 대응 방법을 정리해 두는 게 의미도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정리했다. 내 아이가 폭력적인 친구에 맞서도록 도와주기 위한 5단계 행동 전략. 짜잔.
1. 다른 사람의 행동을 바꾸기 어렵다는 걸 인정해야 한다.
한울이에게는 가장 먼저 호용이가 변하기를 기대할 수 없다는 점을 알려줄 것이다. 호용이가 친구를 때린 건 분명 잘못된 행동이다. 지금까지 선생님한테도 여러 번 지적받은 걸 보면 호용이도 그 사실을 알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호용이가 계속해서 친구를 때리는 이유는, 자신이 원하는 걸 얻기 위한 최선의 전략이 '폭력'으로 굳어졌기 때문일 것이다. 호용이가 왜 이렇게 되었는지는 누구도 모른다고 봐야 한다. 호용이 자신도 포함해서. 폭력적인 행동의 근원을 모르면 이를 교정하기도 쉽지 않다. 경험에서 굳어진 믿음이 바뀌려면 정말 오랜 시간 동안 누군가 그 잘못을 교정해 줘야 하거나, 이전 경험을 뒤엎을만한 충격적인 사건이 일어나야 한다. 부모님이나 선생님이 잘못을 지적하고 통제하는 정도라면 단기간에 호용이의 성향이 바뀌기는 어려울 것이라 생각한다. 이런 이유로 호용이가 변하기를 기대하기보다는 호용이가 폭력적인 아이라는 걸 전제하고 대응 방법을 생각하는 게 현실적이다.
2. 원치 않은 상황은 스스로 피하는 게 상책이다.
다음으로 한울이에게는 호용이처럼 자신을 괴롭히는 친구가 있다면 무시하고 피하라고 알려줄 것이다. 어린이집에서는 모든 친구들과 사이좋게 지내야 한다고 배울 것이지만, 폭력을 당하면서도 사이좋게 지내야 한다는 의미는 아닐 것이다. 호용이와 한울이가 어린이집에서 같은 반이라고 할지라도 같이 어울리는 상황을 최소한으로 줄일 수 있는 방법은 있다. 예를 들어 호용이와 다른 놀이를 하거나, 수업 시간에 떨어져 앉거나, 등하원 시간을 조정하는 등 시도를 해 볼 수 있다. 이 말에 대해 '잘못은 호용이가 했는데, 왜 한울이가 호용이를 피해야 하는지?'라며 못 마땅하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옳고 그름을 따지기보다는 애초에 그런 상황이 발생하지 않는 편이 더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한울이가 갈등 상황 속에서 마음 쓰기보다는, 친구들과 더 즐겁게 놀 수 있다면 그게 더 만족스럽지 않겠나.
3. 피할 수 없다면 적합한 도움을 구해야 한다.
호용이가 한울이를 의도적으로 쫓아다니면서 폭력을 쓰려고 할 수도 있다. 그런 상황이라면 한울이에게 더 이상 피하기보다는 적합한 사람에게 도움을 요청하도록 알려줄 것이다. 이를 위해 도움을 줄 수 있는 가장 적합한 사람은 누구인지, 그리고 그 사람에게 어떻게 도움을 요청해야 하는지를 상세하게 알려줄 필요가 있다. 어린이집에서는 한울이가 도움을 요청할 수 있는 가장 적합한 사람은 담임선생님이다. 물론 이 과정에서 부모가 개입해서 선생님에게 대신 도움을 요청할 수도 있지만, 개인적으로는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이제 만 5살이면 스스로 지키는 방법들을 연습해야 한다. 평생 부모가 대신 따라다니며 도와줄 수는 없으니까 말이다. 아빠인 나는 한울이에게 도움을 요청할 수 있는 방법을 알려주고, 한울이가 스스로 실행할 수 있도록 기다려주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해야 문제 해결의 주체는 자신이 되어야 한다는 점을 명확히 알려줄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4. 도와줄 사람이 없으면 혼자서라도 맞서야 한다.
혹시나 선생님에게도 도움을 받지 못하는 상황이라면, 한울이가 호용이의 폭력에 대응할 방법은 하나밖에 없다. 한울이가 스스로 맞서 싸워서 호용이의 폭력을 제압하는 것이다. 어린이집도 인간 사회의 어두운 단면이 얼마든지 적용되는 곳이라고 생각한다. 어린이집에서 선생님의 존재는 사회의 규칙과 제도로 볼 수 있다. 그런 선생님의 도움을 받지 못한다는 말은 '법은 멀고 주먹은 가깝다'로 대변되는 힘의 논리가 작동하는 영역도 존재한다는 의미이다. 폭력에 맞서 싸우려면 그보다 더 큰 힘을 키우는 수밖에 없다. 힘이 있으면 나를 지키는 용도로도 쓸 수 있지만, 힘이 없으면 그저 당하는 수밖에 없다. 한울이와 레슬링과 태권도 시합을 자주 하는데, 종종 한울이가 '악'에 받칠 때까지 밀어붙여보곤 한다. 그러면 한울이는 소리를 지르거나 울음을 터뜨리면서도 있는 힘을 다해 나를 때리거나 밀치려고 한다. 그런 식으로라도 놀이를 겸비한 일종의 호신술 연습을 해두면 싸워야만 하는 상황에서 조금은 도움이 될 것이다.
5. 싸움에서 이겼다면 힘을 올바로 사용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한울이가 호용이와 싸워서 이겼다면, 앞으로 그 '힘'을 어떻게 활용해야 하는지에 대해 알려줄 것이다. 이 단계야 말로 부모가 적극적으로 개입할 지점이라고 생각한다. 싸움에서 이긴 한울이는 스스로 호용이보다 힘이 세다는 걸 깨닫게 될 것이다. 그 짜릿한 감정이 잘못된 방향으로 발현될 가능성도 있다. 일례로 이전에는 호용이가 한울이를 때렸다면, 싸움 이후에는 한울이가 호용이를 무시하고 때리게 될 수도 있다. 그 과정에서 한울이는 '폭력'으로 자신의 상황을 원하는 방향으로 손쉽게 변화시킬 수 있다는 경험을 축적할 가능성이 있다. 그렇게 되면 한울이 역시 호용이와 같은 행동을 하게 될 수 있다. 이를 방지하기 위해서라도 '힘'은 자신을 지키고 다른 사람을 도와주는 목적으로 사용해야 함을 강하게 교육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한울이가 계속해서 '힘'으로 상황을 해결하려 한다면, 부모된 입장에서 한울이를 때려서라도 가르쳐줘야 하지 않겠나.
[마치며]
위 다섯 가지 행동 전략이 당연히 정답은 아니다. 그렇지만 보통의 부모들이 취하는 방식과는 크게 세 가지 측면에서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첫째는 폭력 상황에서 문제 해결의 주체는 아이 자신이 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둘째는 상대방의 잘못을 비난하기보다는 갈등 상황 자체를 해소할 수 있는 방법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점이다. 마지막으로 상황에 따라 단계적으로 행동을 맞춰나간다는 점이다. 자식이 폭행당한 경험이 있는 부모들의 사례를 들어보면, 아이 대신 부모가 직접 나서거나, 바뀌기 어려운 걸 요구하거나, 감정적으로 대응하며 상황을 악화시키는 경험들이 더러 있음을 알게 되었다.
헛!! 이 글을 마무리할 즈음에 새로운 소식을 들었다. 오늘 아침에 호용이가 한울이에게 사과를 했는데, 오후에 같이 놀다가 한울이를 또 때렸다고 한다. 그 소식을 들은 아내는 지금 화가 나서 어쩔 줄 몰라한다. 당장이라도 선생님께 연락을 드리고 싶은 기세지만, 간신히 감정을 추스르고 있는 듯하다. 나도 화가 난다. 그렇지만 화를 낸다고 해결될 일은 아니니 차분하게 해결 방안을 고민해 봐야겠다. 아내가 동의할지는 모르겠지만 이번에 세워 본 단계별 대응을 생각보다 빨리 적용해 보게 생겼다.
우리 삶에 좋은 일만 가득하면 좋겠지만 때로는 이렇게 걱정스러운 일도 일어난다. 이 지점에서 중요한 건 왜 내게 이런 일이 일어나는지 분노하기보다는, 차분하게 문제를 잘 풀어내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아... 이건 너무 T적인 발상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