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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업 7개월, 10가지 소회

2025년 상반기 늦은 회고

by 녹차라떼샷추가

올해 1월부터 마케팅 회사 공동창업자가 되었어요. 벌써 상반기를 마무리하고 7개월도 며칠 남지 않았네요. 그동안 창업자, 남편, 아빠 그리고 나로 살아오며 느낀 10가지 소회를 정리했어요.



1. 월급은 받고 살고 있어요.

상반기 결산을 했어요. 다행히 손해는 아니네요. 휴우. 창업하면서 1년은 손해 볼 걸 각오하고 있었는데, 천운이네요. 중요한 고객을 먼저 확보하고 창업을 결정한 점이 주요했어요. 이전 직장 대비 월 소득은 1/3 수준으로 줄었어요. 처음에는 아쉬운 마음도 있었죠. 그런데 이제는 제 회사에서 월급을 받을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감사한 마음을 갖고 있어요. 무엇보다 제 자신을 포함해 함께 일하는 6명의 생계를 지탱했다는 점에 가장 큰 보람을 느껴요. 경영철학이니 뭐니 상관없고, 일단은 직원들 월급 안 밀리는 회사 만들기가 가장 큰 목표입니다.


2. 잘하는 일에 집중하고 있어요.

사업 방향을 고민하면서 한동안 이런저런 유혹이 많았어요. 평소에 하고 싶었던 일, 요즘 뜨고 있는 분야, 누가 봐도 멋있어 보이는 일이 많더라고요. 그렇지만 방향을 정리하면서 유혹에 대한 부분은 잘라내려 노력했어요. 오로지 지금 팀이 가장 잘할 수 있는 일에 집중하고자 했어요. 선택과 집중에서 가장 어려운 과정은 '만약에 다른 새로운 기회가 온다면?'이라는 질문에 답을 내리는 일이라고 생각해요. 지금까지는 '애초에 그런 기회는 없다'라며 단호하게 대처하고 있어요. 지금 회사는 ▲ 유럽과 일본의 중소형 생활소비재 브랜드를 대상으로 ▲ 한국 시장 진출 전략 수립과 ▲ 마케팅 커뮤니케이션 현지화에 집중하고 있어요. 국내 마케팅 회사 중에서도 저희 정도 규모에 글로벌 역량과 산업 전문성을 보유한 업체는 많지 않더라고요.


3. 사실 기대만큼 잘 안 풀렸어요.

상반기에도 새로운 고객과의 협업을 적극적으로 발굴하려 했어요. 대략적으로 10건 중에 1건 정도만 사업으로 연결되었네요. 여기에는 두 가지 문제가 있었어요. 10건 보다 훨씬 더 많은 협업 기회를 만들었어야 했고, 10%보다 더 성공률을 높였어야 했죠. 두 가지 측면에서 모두 아쉬움이 남아요. 인바운드, 아웃바운드 가릴 것 없이 고객을 만나려고 노력했어요. 회사 소개까지는 문제가 없었어요. 그렇지만 과거 실적을 묻는 질문에서 매번 어려움을 느꼈어요. 아직 1년도 안 된 신생 회사라 특별히 내세울 실적이 없었거든요. 계약 직전까지 가서도 "아직 새로운 회사인데 당신들을 어떻게 믿고 이만한 돈을 지불하냐?"라는 말을 들은 적도 있었죠. 그럴 때마다 속상했어요.


4. 그렇지만 반전의 기회는 있더라고요.

한창 고객한테 거절당하며 속상해할 무렵, 영국대사관과 영국상공회의소에서 주최하는 세미나에 연사로 초대를 받았었어요. 한국 시장 진출에 관심 있는 12곳의 영국 브랜드 담당자에게 한국 소비재 시장에 대해 설명해 주는 자리였어요. 처음 요청이 왔을 때 "이게 웬 행운이람?"이라 생각했어요. 당시에는 돈을 내고서라도 잠재 고객들 만나러 다니던 때였어요. 다행히도 세미나를 성공적으로 마쳤어요. 이후 이어진 네트워킹 자리에서 만난 사람들은 저와 회사의 전문성을 높게 평가해 줬어요. 순식간에 급이 달라졌다는 걸 새삼 느낄 정도였어요. 게다가 영국대사관에서 보증을 서준 셈이니 잠재 고객들은 저희를 더욱 신뢰할 수 있었겠죠. 그 자리에서 만난 사람들에게는 더 이상의 회사 소개가 필요하지 않았어요. "당신네 같은 신생 회사를 어떻게 믿어?"라는 말도 듣지 않았고요. 그 자리 이후로 그렇게 찾아 헤매던 새로운 프로젝트 기회가 여러 건 만들어졌어요.


5. 다행히 사업은 나아지는 중이에요.

하반기는 상반기보다 더 잘 될 것 같다는 기대감을 갖고 있어요. 새로운 프로젝트 기회가 많아지니 자연스럽게 조직에도 활력이 넘치고요. 감사하게도 팀원들 역시 회사가 전환점을 맞이하고 있다는 걸 체감하고 있는 것 같아요. 필요한 안건은 먼저 제안해 주고, 더 잘 해내기 위한 아이디어를 공유하고, 바쁜 와중에도 하나라도 일을 더 해내겠다고 나서주고 있어요. 그런 동료들에게 병목이 되지 않으려고 저도 노력하고 있어요. 이 좋은 분위기를 결과로 연결시켜 나가는 것이 경영진인 제 몫이겠죠. 아직 매출로 연결된 기회는 많지 않아요. 섣불리 들뜨기보다는 하나하나 성심껏 결과를 만드는 데에 집중해야겠어요.


6. 동업자와도 순탄하게 맞춰가고 있어요.

창업의 길로 인도해 준 동업자와도 잘 지내고 있어요. 저와는 성향과 역량, 경험 등 모든 측면에서 상반될 정도로 다른 친구예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로 오래 지켜봐 온 사이라, 상대에 대한 존경과 신뢰를 갖고 있어요. 오래전부터 이처럼 상반된 조합이 창업에는 적절하다고 생각해 왔어요. 회사 성장이라는 목표를 두고 서로가 맡아줘야 할 역할이 분명하고 또 상호보완적이니까요. 게다가 서로 대립할 수 있는 부분은 오랜 기간 쌓아 온 인간적인 신뢰가 풀어줄 수 있다고 생각하고요. 동업자와는 사업 방향과 조직 운영을 두고 많은 얘기를 나누고 있어요. 그 과정에서 동업자에게도 많이 배우고 있고요. 그리고 그러한 내용은 모두 회사의 원칙과 절차로 녹여내려 하고 있어요. 개인 역량을 넘어 조직 역량을 키워내는 일이야 말로 경영자의 역할이라 생각해요.


7. 일과 삶의 균형은 아직 만족스러워요.

바쁜 와중에도 한울이 어린이집 등하원은 주로 제가 맡고 있어요. 그리고 한울이가 잠들 때까지 최대한 같이 시간을 보내려 해요. 한울이와 보내는 시간도 적지 않고, 바쁜 아내에게 시간 여유를 줄 수 있음에 더할 나위 없이 만족을 느껴요. 그러다 보니 정작 사무실에 근무하는 시간이 하루에 5-6시간 정도밖에 되지 않아요. 민망하게도 흔히 생각하는 창업 초기 경영진에게 예상되는 삶과는 상당히 다를 거예요. 한 회사의 경영진이지만, 제 삶에서 가족을 지탱하는 역할을 포기하고 싶진 않아요. 가족은 제 삶의 가장 큰 이유이니까요. 그렇다고 회사 일을 여유롭게 대하는 건 아니에요. 한울이가 잠들고 나면 다시 회사 일을 시작해요. 사실 저는 취미도 없고 외부 모임도 잘 안 해요. 대부분 시간은 집에서 가족과 보내거나, 어디선가 회사 일 하고 있거나 둘 중 하나예요. 균형을 지키려면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도록 노력하는 일은 당연하겠죠.


8. 아내 외조에도 최선을 다하고 있어요.

아내가 박사 졸업하면 좀 여유로울 줄 알았어요. 그런데 더 바쁘네요. 아내는 독립연구자로서 자리를 잡아가는 중이에요. 독립연구자라는 표현이 생소하긴 한데, 쉽게 말하면 어느 조직에 소속되지 않고 자기 연구를 하는 사람인 거죠. 아내가 취직하려고 하길래 만류했어요. "돈은 내가 벌테니 당신은 연구를 하면 어떻겠냐?"라면서요. 아내가 쓴 박사 논문이 이 사회에 도움이 될 것이라 믿고 있어요.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도 아내 연구 내용이 의미가 있었나 봐요. 몇 달 사이에 한국연구재단에서 연구비 펀딩도 받았고, 국내 학회에서 부연구위원장으로 선임되었고, 정부 기관에서 초청받아 해외공무원 대상으로 세 차례나 강의도 했어요. 게다가 최근에는 미국 유명 학회에서 발표자로도 선정이 되었더라고요. 저랑 결혼하고 아이 낳아 키우느라 경력단절된 아내가, 다시 날개짓을 시작했으니 전심으로 응원하려고요.


9. 의사결정에 대해 공부하고 있어요.

경영진이 되고 더 나은 의사결정에 관한 고민을 많이 하게 되네요. 10년 넘게 직장 생활하면서 경영자의 의사결정 하나가 조직 성과에 미치는 영향들을 직접 눈으로 봐왔어요. 조그마한 조직이지만 이제는 제가 최종 의사결정자의 입장이 되었어요. 어떤 선택이라도 제 마음 내키는 대로가 아니라 조직에 가장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결정해야 한다는 부담감을 느껴요. 역할을 잘해보려고 그동안 의사결정에 관한 책을 깊이 읽었어요. 생각을 정리할 겸 관련된 글도 몇 편 썼었고요. 놀랍게도 꾸준히 조회수가 높게 나오더라고요. 주변에서 의사결정 관련해서 조언을 구하는 분들도 조금씩 늘어가고 있어요. 새로운 역량을 개발하는 과정은 늘 짜릿하네요.


10. 지금은 삶에 활력이 넘쳐요.

작년 9월, 이전 회사에서 육아휴직을 시작할 때에는 모든 상황이 암울했어요. 아내의 안타까운 유산과 불확실한 박사 졸업 여부, 그리고 단절된 제 커리어와 불안해진 가계 수입까지. 지금 돌이켜 보니 당시에 했던 걱정들은 1년 사이에 대부분 해소가 되었네요. 중요한 변화의 시기를 무사히 넘겼던 것 같아요. 제 선택이 탁월했다는 의미는 아니에요. 오히려 이제는 욕심을 점점 내려놓고 상황에 적응하며 사는 법을 터득해 가는 것 같아요. 이런 게 나이가 들어가는 걸까요? 여하튼 요즘은 즐겁고 행복합니다! 남은 한 해도 진득하게 살아보겠습니다. 우리 모두 화이팅입니다!


내 삶의 원동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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