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대에 접어들면서 사회 속에 나를 찾기 위한 고민
20대는 학교에서 공부하면서 내 인생의 꿈과 목표를 세우고 이를 이루기 위해 살아 왔다. 그러나, 30대가 되고 사회에 나와보니 내가 꿈꾸던 모습과는 다르다. 무엇보다 나를 있는 그대로 인정해주지 않는다. 그런 과정 속에서 내 꿈과 목표가 다른 사람들의 꿈과 목표보다 더 가치있다고 말할 수 없음을 알게 되었다. 40대 혹은 50대가 되면, 내가 기득권이 되면 또 어떻게 느낄지 모르겠다.
여튼 나의 꿈과 목표가 그리 특별하지 않다고 느낀 뒤로는 '과거에 내가 꿈과 목표가 있었나?' 싶을 정도로 큰 고민없이 살고 있다. 배고프면 밥 먹고, 해야 될 일이 있으면 일하고, 가족들과 시간 보내고, 흥미로운 책을 읽는 등 그때그때 본능과 책임에 따라 움직인다.
꿈과 목표를 잊고 살다보니 좋은 게 있다면 마음 속에 강박관념이 사라졌다는 것이다. 목표를 이루는 일과 관련있는 활동을 하면 스스로 뿌듯했지만, 그 외에 친구를 만나거나, 게임을 하면 스스로 죄책감과 한심함에 시달렸다.
달려가야 할 목표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사실 마음의 안정이 된다. 그 목표가 정말로 내가 달려갈 만한 가치가 있는지에 대해서는 끊임없는 회의가 들겠지만... 그 목표를 향해 내 시간과 노력을 상당히 투자한 상황이라면 목표를 바꾸기는 쉽지 않을 거다. 목표를 부정하는 순간 내가 인생을 헛되게 산 것 같은 두려움에 빠지기 때문이다. 그렇게 내 인생의 의미는 제쳐둔 채 목표 그 자체만을 보고 달려가는 삶을 살게 되지는 않을까...
뭐 그런 인생을 살까봐 두려웠다. 의미를 잃어버린채 목표만 향해 달려가는 인생. 다른 사람에게 내 목표와 꿈을 설득하는 데에 열심히인 인생. 내 목표를 쫓느라 나와는 다른 사람을 배타적으로 바라보는 인생. 같은 목표를 공유하는 사람들끼리만 어울리는 인생, 그리고 그런 인생을 스스로 합리화하면서 살까봐 두려웠다.
우리 사회가 포용성이 부족하다고 느끼는데 그 이유가 자신들의 목표에 함몰된 인생을 살고 있기 때문은 아닐까? 그 목표가 이기적이든 사회공공성을 지향하든 별다른 차이는 없는 것 같다. 예를 들어, 환경보호를 인생 목표로 삼고 있는 사람이 있다. 이 목표에 함몰되는 순간 일회용품 사용, 전기낭비, 자동차 운행 등 수많은 다른 행동들을 포용하기 어렵게 된다. 내가 추구하는 목표로 인해 사실은 또 다른 갈등 상황이 만들어질 수 있다. 세상에 사는 모든 사람들이 서로 다른 인생의 목표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각자가 생각하는 더 나은 사회의 모습 역시 다르기 때문이다.
그럼 포용하는 삶이 가능한가? 포용하는 삶에는 서로 대화하고, 이해하고, 공감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내가 이미 알고 옳다고 믿는 것에 대한 공감이 필요한 건 아니다. 오히려 내가 모르고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했던 것들에 대한 공감을 할 수 있을 때 비로소 포용하는 삶이 가능하지 않을까.
이를 확인해 보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내 인생의 꿈과 목표를 잠시 내려놓고 있다. 그리고 나와는 다름에 대한 공감을 하고자, 다른 이들의 삶을 이해하고자 귀기울이고 질문을 해본다. 내 꿈과 목표를 내려놓으니 다른 사람들도 자신만의 꿈과 목표를 향해 달려가고 있다는 점을 발견할 수 있다.나와 다르다는 이유로 다른 사람의 인생을 폄하하지도 않고, 또 대단하다고 생각하지도 않고, 그냥 그런 인생들을 살고 있구나 덤덤하게 받아들이게 된다.
정작 나의 꿈과 목표가 없으니 내 인생이 어디로 흘러가는지에 대해서 나 스스로가 불안해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내 인생의 목적지를 정해두지 않고 그때그때 선택의 순간에 집중하면서 사는 삶도 괜찮을 것 같다. 결과에 제약을 두지 않으면 사회 속에서 내가 가장 잘할 수 있고 나에게 가장 어울리는 곳으로 흘러갈 수 있다는 막연한 희망을 가져본다. 좋게 얘기하면 젊음의 패기이고, 나쁘게 얘기하면 외곬수인데, 이런 부분도 좋지만 포용하는 사회를 위해서는 유연한 삶의 태도 역시 중요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