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길영 <시대예보: 핵개인의 시대>
드디어 책 값이 2만 원대를 넘어섰다. 물론 더 비싼 책도 많겠지만, 330여 페이지가 정가 21,000원이라니 꽤 비싸게 느껴졌다. 과연 그만큼의 값어치를 하는 책인가 시작 전부터 벼르고 읽어서일까. 이 책에 대해 한 줄 평을 하자면 '다 아는 얘기 아니야? 였고, 다 읽고 느낀 점은 내 안에 자리 잡은 열등감이 생각보다 크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이 책이 별로라고 말하려는 건가? 절대 아니다.
우선 '다 아는 얘기 아니야?'라고 느낄 정도로 쉽고 술술 읽힌다. 어디선가 그런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특히 이처럼 트렌드와 관련된) 어떤 책을 읽으며 이미 다 아는 내용처럼 친숙하게 읽힌다면, 이미 우리 삶이 된 트렌드, 세태를 일목요연하게 정리한 글이겠고, 그것은 꽤 훌륭한 내용이라는 것. 이에 대해 나는 전적으로 동의한다. 그러니 '다 아는 얘기'가 쓰인 이 책은 굉장히 잘 쓴 책이다. 그러나 아쉬운 건 특별히 새로운 인사이트가 없었다는 점인데, 이는 내가 이 분야에 꽤 관심이 있어 대부분의 내용들이 친숙할 탓일지도 모르겠다. 그의 전작 <여기서 당신의 욕망이 보인다>(2012)와 <그냥 하지 말라>(2021)를 읽었고, 첫 번째 책을 무척 흥미롭게 읽어 '데이터'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가 되었다. (TMI, 그 덕에 데이터 관련 자격증을 취득, 다른 직무로 입사하긴 했으나 취업에 도움이 된 것도 사실이니 꽤 덕을 본 셈이다.)
'핵개인'(자기 삶의 결정권을 가진 성인)이라는 개념을 도입해 설명하고 있는 점이 꽤 흥미로운 그 정도뿐.
그렇다면 내 안에 열등감을 확인하고 불편했다는 건 무슨 얘기냐면.
인적 경험에 축적된 노하우만을 무기 삼아 커리어와 자신의 일을 지키려 하면 곤란해질 수 있습니다. 계속해서 새로운 도구, 새로운 기술, 새로운 연결성에 대한 적응이 요구됩니다. 큰 재난으로도 다가올 수 있는 급격한 환경 변화를 자신만의 기회이자 스스로의 축복으로 변화시키는 방법의 기본은, 시대의 큰 흐름을 읽고 그 안에서 끊임없이 자신을 현행화하는 것입니다. (p. 143)
권위 빅뱅으로 탄생한 핵개인은 자기 삶의 결정권을 가진 성인입니다. 과거에 기관이나 조직만 제공할 수 있었던 교육과 훈련을 온전히 스스로 해낼 수 있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자체 역량 강화가 가능한 시대에 스승은 유튜브이고 그것을 돕는 조교는 AI입니다. 기업은 앞으로 더 노골적으로 '가능성 있는 신입'이 아닌 '처음부터 완성된 숙련자'를 모시게 될 것입니다. 기업의 다음 고민은 완성된 숙련자로서의 새로운 개인들, 그들의 연합체로서의 조직에 어떻게 새로운 형태의 소속감과 공통의 정체성을 부여하는지가 될 것이다. (p. 175)
기업들도 '공개 채용'이 아닌 '인재 영입'으로 구성원을 찾는 형식을 바꾸고 있습니다. 영미권에서는 이미 영입 업무를 담당하는 팀의 명칭이 'talent acquisition(인재 확보)'으로 변모하고 있었습니다. (p. 177)
개인이 영입 대상이 되기 위한 전략은 명료합니다. 세상에 접점을 만들고 사람들에게 인정받아 증거를 획득하는 것입니다.... 깃허브 스코어와 롤티어처럼 크든 작든 특정 도메인의 애호와 조예가 있는 동료들에게 꾸준한 성과를 인정받는 것이 중요합니다. 본인의 자산을 객관화할 수 있다면 더 이상 채용의 일방적 조건에 맞춰 조직에 자신을 설득할 필요가 없습니다.(p. 209)
핵개인은 끊임없이 자기 계발을 통해 시대의 변화에 맞춰 스스로 현행화해야 하며, 이미 완성된 숙련자로서 영입의 대상이 되는 인재가 되어야 한다. 이 현행화의 과정은 실시간으로 세상과의 접점을 통해 증명할 수 있어야 하며, 꾸준한 성과를 인정받아야 한다.
그렇다면 나는 현재로서는 기능하는 핵개인이 아닌 거다. 벌써 회사라는 조직을 떠난 지 한참 됐고, 오랜 시간 동안 자기 계발은커녕 무기력에 침잠하고 있는 중이기 때문이다. 열등감 때문에 침잠하고, 침잠하기 때문에 계속해서 열등감이 증폭되는 악순환이다. 잠시 쉬어가는 기간이라고 하기엔 내가 너무 무력하고 한심하다. 내 주변만 해도 열심히 자신을 현행화하고 끊임없이 성과를 내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그들을 보며 열등감을 느끼면서도 도무지 내 안에서 행동하는 무언가가 발동하지 않는다.
물론 기능하는 핵개인이 되기에 충분히 젊은 나이도 늦은 때도 없다는 것도 왜 모르겠는가. 다만 여전히 기능하고 싶어 하는 욕구의 자아와 행동하는 자아가 일치하지 않는 괴리 속에서 괴로워하고 있다. 기능하고자 하는 욕구가 있다는 걸 그나마 위안 삼을 정도로 나는 아직 수면 위로 한참 올라가야 한다.
우리는 항상 선택의 기로에 있습니다. 하지만 늘 과거로 회귀해서 질문합니다. 그때 수능을 잘 봤으면 내 삶은 바뀌었을까? 그때 관계를 깨지 않았다면 지금은 더 행복했을까요? 거꾸로 그 선택은 지금도 일어나고 있는데 왜 옛날만 후회하고 지금은 함부로 살까 생각해 봅니다. (p. 261)
더불어 비슷한 맥락의 또 다른 열등감. 이 책은 분명 디지털 도구와 인공지능 시스템의 도래에 관해 이야기하지만, 소위 '이과 출신'이 유리하다고 말하지는 않는다. 그런 내용은 전혀 없다. 하지만 우리 사회에 '문송합니다.' (문과라서 죄송합니다.)라는 말이 주는 충격은 적지 않았다. 직무에 따라 자신을 얼마든지 객관화해서 보여주는 게 가능하고 깃허브나 링크드인에 자신의 성과를 서술할 수 있겠지만, 과연 지난 내 직무를 스스로 어떻게 평가할 수 있을지 생각하면 제법 난감하다. 사실 방법을 찾으려면 충분히 찾을 수 있겠지만, 그만큼 내 직무와 커리어에 대해 무지하고, 깊은 성찰을 하지 않았던 것 같다.
회사 다닐 때 한 직원이 며칠 째 지각을 했다. 상사가 해당 직원이 무슨 문제를 겪고 있는 건 아닌지 면담을 해보라고 했다. 나는 인사담당자였다. 면담을 요청하자 해당 직원은 자리하게 된 연유를 이미 알고 풀이 죽은 모습이었다. 지하철에서 자다가 급하게 하차하는 바람에 우산을 두고 내렸는데, 이를 찾으러 종점에 다녀왔다고 했다. 지각을 각오할 만큼 중요한 우산이었는가? 아니면 며칠째 계속되고 있던 지각은 대수롭지 않은 일이었는가? 둘 다 아니라고 대답하면서 더 이상 이을 말을 찾지 못하는 그 직원과 그날 한참 대화를 나눴다. 그 직원은 기면증과 비슷한 증상을 겪고 있기도 했는데, 어디서든 잠을 잤다. 심지어 대화하는 중에도 갑자기 졸았다. 그 증상이 심해졌다고 한다. 수면 클리닉도 소용이 없다고 했다. 무엇을 도와줘야 할지 끝내 찾지 못했다. (*덧붙이자면 그 직원은 같이 일하는 후배였는데 내가 업무 지시하는 동안에도 졸고, 화장실에 가서도 잠이 들었고, 늘 과업을 제시간에 마치지 못했으며, 일도 더럽게 못했다. 그 때문에 내가 정신과에 다녔다.)
그 직원의 고충을 들어주는 걸로 내 직무가 충분히 의미 있다고 하더라도 늘 내가 제대로 된 일을 하고 있는지 의심스러웠다. 스스로도 그러한데 타인이라고 나를 평가할 객관적인 도구가 있었을까. 물론 굉장히 뜬금없는 이야기를 꺼내 주제에서 벗어난 이야기를 한 것도 같긴 한데, 늘 내 직무에 만족하지 못하고, 이를 어떻게 현행화할 수 있을지에 대해 고심하지 못했다는 걸 이 책을 통해서 다시 한번 상기했다.
더불어 내 대학 시절 전공에 대해서도 늘 회의를 갖고 있었다. (이렇게 말하고 보니 후회형 인간이네.) 내 주전공은 그럴싸한 전공 명칭과는 다르게 꽤 시대에 뒤떨어진 커리큘럼을 가지고 있었는데, 예를 들면 영어로 진행되는 회의를 속기로 받아 적어야 한다든가, 상사와 함께 배석하게 되었을 때 어떻게 자리 배치 해야 하는지 진지하게 고민해야 하는 따위였다. 수십 년 전이 아니라 불과 10년 전 커리큘럼이다. 이미 훌륭한 음성 번역기가 한/영 완벽하게 기록하는 세상이 된 지 오래전인데도 왜 내가 조사 하나 놓치지 않고 받아 적고 평가받아야 하는지 의문이었다. 탈권위를 인정하지 않는 회사는 이미 구식으로 치부되는 시대에 살고 있지만, 여전히 위계와 권위의 질서가 만연하다는 건 안다. 그렇지만 나는 그런 권위적인 회사에서는 근무하고 싶지 않은데, 상사의 '개인 취향'을 고려하고, 비즈니스와 무관한 상사의 개인사도 내 업무로 받아들일 수 있는 마음 가짐 따위를 왜 대학에서 배워야 했을까.
내 전공과 내 이전 직무가 어떤 경쟁력을 가질 수 있는지에 대해 늘 의심했던 것 같다. 그래서 이 책을 읽으며 나를 현행화한다는 것, 핵개인으로서의 제대로 된 역량을 펼치며 경쟁력을 확보하는 게 너무 먼 얘기처럼 느껴졌던 것 같다. 그러나 늘 그랬듯이 나는 답을 찾을 것이다. 지금의 침묵이 내 삶의 (커리어를 포함해) 목표와 방향을 설계하고 나아가는 과정에서 잠시 부침이라면, 침잠에서 벗어난 이후의 삶은 이전과 같은 평행선 위에 있진 않도록 부단히 노력해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