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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진영 Oct 10. 2016

전주천변

온전한 고을, 전주의 변주

전주 풍납동 한 구석의 야트막한 언덕 오목대에 올랐다. 가을볕 쬐는 가가호호 팔작지붕이 발아래로 잔물결 일렁이듯 너르게 퍼져나간다. 천년고도라는 수식어가 이만큼 잘 어울리는 곳이 또 있을까. 더욱이 조선의 탯자리 경기전이 그 가운데에 있으니 예스럽고 고즈넉한 표정에 자박자박 젖어들게 되는데, 아뿔싸! 지금의 이 풍경은 일제에 저항하여 우리 것을 지키고자 했던 전주 사람들의 자존심이 일궈낸 것이었으니 이제껏 겉핥은 전주를 다시 들여다보게 된다. 


고종의 대한제국을 윽박지른 일제가 1905년 기어코 을사늑약乙巳條約을 단행한 이후였다. 호남의 양곡을 수탈하기 위해 전주에서 군산까지 40㎞에 달하는 도로 전군가도全群街道를 냈던 그들이었다. 도로를 뚫는데 전주를 감싸고 있던 전주읍성의 성벽과 성문은 고려의 대상이 되지 못했다. 그 틈에 서문 밖 전주천변에 머무르던 일본인들이 성안으로 들어와 본래 제 것인 양 자리를 차지했다. 그러나 이곳이 어디인가. 조선의 탯자리이기 이전에 백제로부터 이어진 천년고도의 예향藝鄕 전주가 아니던가. 전주 사람들의 자존심은 이를 가만 보고만 있지 않았다. 전주읍성의 남문이었던 풍남문을 기준으로 서쪽에 일본인들이 자리를 넓히자 그 반대편 동쪽으로 전주 토박이들이 하나 둘 한옥을 지어 살기 시작했다. 그렇게 들어선 한옥이 600여 채에 달하니 오늘날 전주 완산구 교동과 풍남동 일대는 이름 그대로 ‘한옥마을’이 되었다.      



근대 한옥에 깃든 온고이지신溫故而知新

전주의 한옥은 대부분 팔작지붕에 처마선이 미소를 머금은 듯 입 꼬리를 쌀짝 들어 올린 우리 전통 한옥의 멋을 그대로 품은 한편으로 근대 문물과 외세의 건축 양식을 십분 활용한 ‘근대 한옥’이다.  


제대로 된 근대 한옥을 마주하려면 학인당의 솟을대문을 넘어야 한다. 학인당은 수원 백씨 인재공 백낙중 종가의 고택이다. 하룻밤 잠을 청하는 한옥 숙박은 물론이고 종부가 들려주는 학인당 이야기 등 다양한 문화체험이 가능하니 근대 한옥을 감상하기 마침하다. 구한말 전주의 만석꾼이었던 백낙중은 경복궁 중건에 큰돈을 쾌척하면서 고종으로부터 99칸에 이르는 ‘큰 집’을 지어도 좋다는 허락을 받게 되었다. 흥선대원군과의 연이 있었던 종가는 궁궐 도편수와 대목장의 손을 빌리고 백두산 금강송을 비롯 최고의 자재를 들여 집을 지을 수 있었다. 덕분에 민가에서는 드물게 궁중 양식이 드러난다. ‘ㄱ자’ 형태의 본채는 우물마루로 된 복도를 따라 연결되고, 방문도 3중으로 되어 있는데 모두 궁궐에서만 사용했던 양식이란다. 궁의 양식을 차용한 전통 한옥의 태를 갖추었지만 약한 지반을 보완하기 위해 콘크리트와 벽돌을 사용해 기초를 다지고, 사랑채 전면은 문풍지 바른 창호 대신 비바람을 이겨낼 수 있는 유리로 여닫이문을 달았다. 더불어 국악과 소리에 조예가 깊었던 백낙중은 집을 공연장으로 사용하고자 천장을 높게 하고 대청마루는 마루 좌우의 문을 들어 올려 필요시 넓게 쓸 수 있도록 했다. 채광도 좋고 드나드는 바람도 좋다. 천장은 다락에 광창을 낼 수 있었을 만큼 높다. 덕분에 정면 지붕에 올린 박공면에 창이 내달렸으니 2층 집의 모양새다. 여기에 전기 시설과 수도 시설이 더해졌다. 개화기 최신식 한옥 학인당은 근래 장삿속에 휘뚜루마뚜루 구색만 갖춘 한옥과는 차원이 다르다. 이를테면 온고이지신溫故而知新. 멋스럽고도 지혜롭다. 1908년에 완성되었으니 한옥마을에서 가장 오래되었거니와 그 자체로도 으뜸가는 집채이니 충분히 근대기 전주 한옥의 모델이 되었음직하다.

 

3대째 같은 자리를 지키고 있는 또 하나의 터줏대감 삼원당 한약방을 비롯 풍채는 학인당에 비할 게 못되지만 처마 낮은 기와지붕이 어깨동무하고 있는 골목을 따라 자존심으로 일군 근대 한옥이 옹기종기하다. 때문에 한옥 생활이 낯선 도시인들이 부담 없이 하룻밤을 청하고, 전주 한옥 특유의 살갑고 정겨운 맛을 음미하는 것이리. 한편으로는 가장 한국적이고 전통미 돋보이는 이곳의 역사가 100년 남짓이라. 의외로운 한편 그 속사정에 탄식이 새나온다. 1930년대 말 전라도의 몰락해 가는 양반가를 배경으로 한 대하소설 <혼불>에서 작가 최명희는 이런 전주를 두고 ‘꽃심을 지닌 땅’이라 했다. “가슴에 꽃심이 있으니. 피고, 지고, 다시 피어.” 중한 것은 가슴 깊이 품어 무엇에도 굴하지 않고 새로운 꽃으로 피워내는 힘, 이것이 전주의 품격이리니. 

 



전주천변의 동상이몽同床異夢 

한옥마을을 찾는 이들이 한옥에서 잠을 청하지는 못할지언정 빼놓지 않고 걸음 하는 곳이 있으니, 경기전 맞은편에 위치한 전동성당이다. 화감암 기단 위에 붉은 벽돌을 쌓아 올렸다. 문과 창문, 천장 등에 반원형의 아치가 돋보인다. 굵직한 기둥과 두꺼운 벽이 그 아치를 탄탄하게 떠받친다. 건물 머리 중앙의 커다란 종탑을 중심으로 좌우 대칭을 이루는 작은 종탑도 멋스럽다. 전혀 다른 생김새이지만 한옥마을과 또 다른 고풍스러움이 주변의 기운과 잘 어우러지기에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당시 개항지를 중심으로 서양식 근대 건축물이 들어섰던 것을 감안하면 전주에 이토록 웅장한 성당이 들어선 것이 의아할지 모르겠으나 알고 보니 우리나라 천주교 최초의 순교자인 윤지충과 권상연이 1791년 신해박해 때 처형당한 곳이 전주 풍남문 밖 형장이었다. 성당의 주춧돌은 일본 통감부가 전주읍성을 헐면서 나온 풍남문 인근의 성돌을 전주부의 허가를 얻어 가져다 썼다고 한다. 1914년에 완성된 벽돌조의 성당 외형은 중국인 인부 100여 명이 직접 구워서 쌓은 것이란다. 이때 만든 벽돌 일부도 전주읍성을 헐면서 나온 흙으로 구웠다고. 근대기에 지어졌다는 이유만으로 근대문화유산의 의미를 부여할 수는 없다. 전동성당이 전주를 대표하는 근대문화유산으로 돋보이는 것은 그 시기 우리의 역사가 치러낸 격변을 근저에 품고 있기에 가능한 것이다.


전동성당 건립에 동원되었던 중국인 벽돌공들의 손때는 한옥마을에서 타박타박 걸어 10분 남짓 거리의 다가동에서도 찾을 수 있다. 등록문화재 제174호로 지정된 전주 다가동 구 중국인 포목상점이다. 1920년대에 지은 단층 건물로 두 개의 상점이 이어져 정면에서 바라봤을 때 가로 폭이 기다랗다. 건물명에서 짐작할 수 있듯 중국 벽돌공들이 지은 상가에서 중국 상인들이 중국 비단을 가져다 팔았다. 지금은 이발소와 인쇄소가 자리를 지키고 있다. 중국 상하이의 비단 상점을 본 따 지은 외관은 옛 모습 그대로이다. 이 일대가 근대기 일본인들이 상권을 장악했던 곳이었으니 그들의 흔적 또한 가까이에 남아 있더라니. 등록문화재 제173호 전주 중앙동 구 박다옥이다. 박다옥은 우동집이었다. 보통 우동집은 아니었던 듯하다. 타일과 인조석으로 마감한 3층짜리 건물이다. 전주에 들어선 최초의 대형음식점이었다고 한다. 이후 목욕탕, 은행 등으로 사용되다 지금은 한복집과 양복점이 나란히 들어서있다. 풍남문 앞으로 난 대로를 사이에 두고 한옥마을과는 사뭇 다른 풍경이다. 100여 년 전 그때에는 훨씬 더했겠지. 전주천을 끼고도는 이 땅에 동상이몽의 기묘한 동거가 아닐 수 없다. 


길 건너 한옥마을 골목으로 다시 들어섰다. 유명 관광지가 되면서 음식점, 카페, 노점 등이 어지럽게 들어선 모습이 다소 아쉬운 마음을 들게 하지만 허울 좋게 단장한 보여주기 식의 한옥이 아니라 주인이 바뀔지언정 사람의 온기를 잃지 않고 지난 한 세기를 지내온 ‘살아있는’ 한옥이 여전히 한옥마을 특유의 빛깔을 자랑한다. 발길을 돌리기 쉽지 않다. 적산가옥을 카페로 단장한 ‘공간 봄’을 찾아 매실차 한 모금을 넘긴다. 보랏빛 맥문동이 곱게 피어난 소담한 정원을 감싸 안고 있는 카페는 한옥마을에서 손에 꼽을 만큼 차분한 곳이다. 자연스레 의자 깊숙이 기대앉게 된다. 의도치 않게 매일매일 번잡스러워지기 일쑤인 마음자리를 또 이렇게 달래고 온다. 



위 글은 2014년 2월부터 2015년 12월까지 농민신문사에서 발행하는 생활정보지 <전원생활>에 기고했던 '근대를 거닐다' 연재 가운데 2014년 10월호 '전주천변'편의 원문임. (글 : 서진영 / 사진 : 임승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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