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할머니 복남에 대하여, 복남에게
2003년 즈음, 남들 다 망하는 IMF 때도 버티던 우리 집이 망했다. 아니 이미 망했던 건데 내가 몰랐던 건지도 모른다. 어쨌든 엄마는 그즈음 세상을 등졌고 어떻게든 자식을 키워야 했던 아빠는 돈을 벌기 위해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잘 들어오지 않았다. 나의 부모는 제 부모에게 자식을 맡겨두고는 각자의 이유로 사라졌다. 제 부모라고는 했으나 오래지 않아 할아버지도 돌아가셨다.
그렇게 나의 할머니 김복남은 얼떨결에 홀로 우리 남매를 맡게 되었다.
내 부모는 맞벌이를 했다. 아기 때 사진을 보면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잠시 동안 엄마가 나를 키웠던 것으로 보이지만, 어쨌든 나의 가장 오래된 기억은 할머니가 동생을 등에 업고, 내 손을 잡고 동네 중국집에 짜장면을 먹으러 가던 기억이다. 내게 부모가 있을 때에도 할머니는 갓 태어난 나를 맡아 키웠다.
그리고 엄마가 죽었다. 엄마가 돌아가신 뒤 학교에 돌아왔을 때는 어떤 동정의 시선이 내게로 꽂혔다. 나에게는 딱지가 붙었다. 엄마 없는 애, 불쌍한 애, 엄마가 없어서 할머니가 키우는 애.
어느 날 옆 반 친구가 나에게 다가와 말했다. "야, 우리 반 선생님이 종례시간에 너 엄마 없어서 불쌍하니까 잘해주래" 그 애는 나를 위한답시고 그 말을 전했겠지만 글쎄, 내 마음은 그날도 와장창. 조각조각 부서졌다. 엄마 없는 불쌍한 애, 잘해줘야 하는 애.
엄마가 없다는 이유로 사람들이 나를 동정하기 시작했다. 그게 너무 싫었다. 엄마가 없는 것이 부끄러웠다. 할머니가 나의 부모라는 것을 인정하기 싫었다.
날씨 이야기만큼 가족 이야기를 쉽게 묻는 사회에서 엄마 없는 애로 사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엄마, 아빠, 자녀로 이루어진 "정상적인" 가족을 가정하고 묻는 수많은 질문들. 새 학기가 되면 부모님의 직업은 무엇인지, 나이는 어떻게 되는지를 묻는 가정통신문을 적어내야 했는데, 이미 죽고 없는 엄마의 나이와 직업을 매번 떠올려 적는 일은 나를 슬프고 곤란하게 했다. 그보다 가족신문에 들어갈 사진을 달라던 동생이 기어이 엄마가 들어간 사진을 가져다 엄마가 있는 척하는 것을 볼 때가 더 슬프긴 했지만 대체로 엄마, 아빠를 전제한 가족 이야기를 묻는 것은 곤란하고 또 슬펐다.
그럼에도 나는 복남으로 인해 살아남았다. 매 순간 세상이 나를 엄마없는 불쌍한 애로 낙인찍고 동정의 시선으로 마음에 생채기를 내는 동안, 사람들의 편견이 내 마음에 굳은살을 켜켜이 쌓을 동안에도, 복남은 늘 내 곁에 있었다. 아주 어린아이가 유치원에 다닐 때부터 회사에 취직해 출근을 할 때까지 단 하루도 빠지지 않고 조심히 다녀오라는 말을 듣다 보면, 학교든, 회사든, 여행이든 그 어딜 다녀와도 네 몸 하나 잘 왔으니 됐다는 안도 섞인 말을 듣다 보면, 당신보다 나를 더 아끼는 마음을 느끼다 보면, 그 아이의 마음에는 사랑이 자랄 것이다. 그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살아갈 용기를 얻을 것이다. 세상 사람들의 눈에는 불쌍하기만 한 엄마 없는 애가 누구보다 용감하게 살아낼 수 있었던 것은 복남이 있었기 때문이다. 복남이 있었기에 세상의 편견에 맞설 힘을 길렀다. 내 상처를 마주하고, 책을 통해 세상을 배우고, 글을 쓰며 상처를 이겨낼 용기를 얻었다.
여전히 같은 질문을 듣는다. "어디 살아요?"로 시작해서 "혼자 살아요?"로 이어지는 질문들. 거기에 "아뇨 할머니랑 (둘이) 살아요."라는 대답을 하면 질문한 사람의 얼굴에는 당황하는 기색이 스친다. 여전하다. 그러나 이제는 그 당황스러움이 내 알바가 아니라는 것을 안다. 잘못된 편견에서 기인한 것이라는 것을 안다. 다양한 가족의 형태가 있다는 것을 안다. “정상적인 가족”이란 누군가의 잘못된 편견이라는 것을, 신화라는 것을 안다. 또 다른 엄마 없는 애들을 위해서 나는 더욱 태연하게 말해야 한다. 할머니가 나의 가족이자 부모라고, 나는 엄마가 없지만 할머니가 있다고. 그렇게 내가 마주한 편견을 깨 나가다 보면 세상이 바뀌지 않을까. 그렇게 엄마 없는 애들이 동정받지 않는 날이 오지 않을까. 그런 작은 희망을 품는다.
엄마의 죽음, 경제적 어려움 따위와 함께한 쉽지 않았던 삶의 시간 동안 할머니는 늘 내 곁에 있었다. 돌아오면 늘 그 자리에서 나를 기다려주는 할머니가 있었기에 나는 엄마 없이도 걷고, 말하고, 먹고, 뛰놀며 건강하게 자랐다. 세상의 편견에 맞설 힘을 길렀다. 매일 아침 등굣길을 열던 할머니의 인사, 늘 나를 기다리던 할머니의 따뜻한 밥상, "우리 이쁜 사람~" 말하며 이마를 쓸어내리던 손길 같은 것들이 나를 키웠다.
잔뜩 움츠러든 채 잠든 내 이마를 쓰다듬던 밤, 당신은 천원짜리 하나에도 벌벌떨면서 교복을 사라며 아끼고 아껴 모은 몇십만원을 내밀던 밤, 배탈난 내 배에 손을 얹으며 "할머니 손은 약손~ 이제 안아프다~" 말하던 밤, 따뜻한 손으로 나를 쓰다듬던 그 모든 밤을 지나 손녀는 어느새 복남보다 훌쩍 자라 있었다.
말보다는 글을 쓰는 데에 소질이 있는 손녀는 그동안 고생이 많았다고, 미안하다고, 고맙다고 말하는 대신 나의 부모이자 친구인 나의 할머니, 복남에 대해서 적는다. 복남에게 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