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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로댄힐 Apr 18. 2024

덕수궁 모란제

그때 그 어느 때 01

필름 카메라로 찍은 사진 앨범을 정리하는데 여러 달 걸렸다. 시골집 다락에 둔 나의 기록이 몽땅 사라지는 통에 몇 장 남지 않은 ‘청춘의 귀한 사진’ 몇 장을 중심으로 <그때 그 어느 때>를 회상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이제는 가버린 아름다운 추억” 회상이다.


강원도 대성산은 여름에 가을이 오고 가을에 벌써 겨울이 도착해 있는 곳이었다. 최전방과 반발자국 떨어져 있는 우리 포대는 늦가을에 철책선 침투 사건이 발생하면 GOP가 있는 DMZ 인근 천불산으로 철책선 배후 경계를 나가야 했다. 졸병 때인지라 그때 포병 FDC(작전 상황실)에 근무하는 나도 병력이 달려 나가야 했다. 통일화 끈도 제대로 풀면 안 되는 야전 상황에서 두 눈을 뜨다시피 보내고 나니 한 일주일쯤 되었을 때 정신이 몽롱해지기 시작했다. 공포감과 신체적 고통, 정신적 압박이 가중되기 시작했다.


어느 낮, 밤에 경계를 서니 낮에 눈을 붙여야 했는데, 그날따라 텐트 부근에 버려진 신문 한 장이 눈에 들어왔다. 집어 보니 대학신문이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대전의 어느 국립대학교 출신 학사 장교가 받아보고 버린 신문이었다. 반으로 쪼개진 신문인지라 금방 읽었다. 그 가운데 네모 속의 글이 눈에 들어왔다. 필자가 1학년이었는데 이름이 남자인지 여자인지 짐작하기 어려웠다. 나중에 포대로 돌아온 후 군사우편 편지를 보냈다. 전기도 없던 FDC 상황실에서 야간근무 중 호롱불은 내 차지였기에 편지 쓸 시간은 있었다.


편지에 빠져나갈 틈은 만들어 두었다. 답을 보내주지 않을 것 같았고, 보면서 냉소할 것 같아서였다. “만일 남학생이라면 잘못짚었다고 너무 무시하지 말고 그냥 웃고 넘어가고, 여학생이라면 글씨, 또 글을 되게도 못 썼다고 너무 조롱하지 말아 달라. 답장해 주지 않아도 좋은데, 만일 답장을 받게 되면 그 기쁨, 이루 말할 수 없어 클 것이다.” 대충 이런 내용을 추신으로 달았었다.


기대도 기억도 못 한 채 한 보름이 갔다. 비가 겨울비처럼 내린 날이라고 생각된다. 포대장실로 호출이 왔다. 개봉된 편지를 내게 던지면서 큰 소리로 읽으라고 했다. 흰 타이프 지에 코스모스 그림을 볼펜으로 그려 넣은 정갈한 편지였는데 글이 참 따뜻했다. 자기는 여학생인데 편지를 받고 무시하거나 냉소하지 않았다고 그도 추신에서 말했다. 그렇게 군사우편을 주고받게 된 H에게, 나중에는 ‘모란이 피기까지는’이라는 악보 이야기를 하게 되었다. 내게는 별스러운 주제이지만 그에게는 아무것도 아니었을 악보 얘기에 그는 귀 기울여 주었다.(이상, 배채진의 산문집, 『길 위의 사색』, 116-118쪽, ‘잃어버린 악보를 찾아서’ 참조)


내 서울에 머물던 70년대 그때 덕수궁 모란제는 4월 말에 열렸었다. 시(詩)에서와는 달리 모란의 계절은 5월이 아니라 4월이다. 아주 여러 해 전에 ‘그로리치 화랑 개관 30돌 기념전’이라는 M 일보 기사를 읽은 적 있다. “붉은 모란이 활짝 핀 봄철 덕수궁에서, 또 희뿌연 담배 연기가 자욱한 도심 다방에서 스케치북에 무언가를 그리는 화가들을 적잖게 만날 수 있던 1960, 70년대.”


그랬을 것이다. 1972년 5월 제대 후 아마 1973년 4월에 덕수궁 모란밭에 갔을 것이라고 지금 짐작한다. 이 사진은 그때 찍은 덕수궁 모란밭 사진이다. 덕수궁 정문 즉 대한문 앞에 ‘모란제’라는 글자와 ‘4월’이라는 글자가 들어간 플래카드를 서울에 머무는 동안 매해 4월 마지막 주에 봤다. 그때 그곳에 가면 큼지막한 꽃송이들이 이파리 속에 숨겨져 있거나 전모를 드러낸 모란 나무들 그루, 그루마다 사람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나이가 든 사람에서부터 어린아이까지, 또 시인, 화가에서부터 나 같은 별 볼 일 없는 사람들까지, 모란 송이 둘레에서 그리거나 쓰거나 보거나 생각하고 있었다.


수필집에서 읽은, 나처럼 덕수궁 모란밭을 잊지 못하는 어떤 분의 편지글이다. “오늘까지는 내 마당의 모란이 피기 전이라 나는 아직도 봄을 기다린단다. 덕수궁 후원의 모란밭은 아직 있더냐. 아마도 지금쯤 그 모란밭에서는 뚝뚝 모란이 지고 있을 터인데. 5월 저녁, 시청 앞 네온도 새삼 아름다웠으리라. 나도 자주 덕수궁에 갔었지. 이번에는 꼭 서울 가면 시간을 내어 덕수궁에 들러보아야겠다.” 또 다른 분은 이렇게 회상한다. “아주 먼 기억 속엔 실존이니 형이상학이니 읊조리며 검은 스타킹에 검은 머플러, 검은 코트에 온통 검은색으로 세상을 비웃던 때도 있었고, 덕수궁 모란밭에서 스케치할 땐 우린 모란보다 아름답던 때도 있었지.”


한참 후에 H는 자기 결혼식 청첩장을 내게 보냈다. 내 이름을 수신인으로 하여 온 최초의 청첩장이었다. 서울 생활을 접고 시골집에 내려와 대책 없이 막연히 머물던 실의와 좌절의 그때 청첩장 도안은 더욱 눈부셨고 인쇄된 글씨는 선명하기도 했다.(이상, 위의 책, 119-121쪽, ‘덕수궁 모란제’ 참조)     


덕수궁 모란 얘기를 H에게 한 것은 그때, 제대 후 한참 후였다. 그만두려다가 다시 시작하는 서울 생활, 몸과 마음을 다잡아서 하느라고 내 딴에는 애쓴다고 연락하지 않았다. 몇 해 후 4월, 덕수궁 모란제 얘기를 H에게 했더니 모란밭 거기서 한번 만나자고 했다.


나도 나를 못 믿을 때 그는 나를 믿어주었고, 나도 내 이야기에 귀 기울이지 않았는데 내 이야기를 진지하게 들어주던 그, 세월이 많이 흐른 노년기 지금 어쩌다 생각해도 참 고맙다. 나도 남의 얘기에 귀를 기울여 주려고 애를 쓰는데 닦은 도(道)가 모자라 지금도 더러 내 품성 바닥을 드러낸다. 2000년대 한참 이후 내 나이 들어서 거기 가보니, 덕수궁 그곳에 모란밭은 있지 않았다   


어저께, 부산에서 볼일 보고 내려오니 모란이 피면서 나를 맞을 채비를 하고 있었다. 오늘, 피지 않고 나를 기다리던 송이들이 거의 모두 꽃잎을 활짝 열었다.


1974년 4월의 ‘덕수궁 모란밭 사진 속의 나’와 ‘길뫼재 여기 모란 앞에 선 나’는 같은 듯하면서도 다른데 다시 보니 다른 듯하면서도 같다. 2024년 4월 17일의 여기 내 뜨락의 모란 앞에서 ‘서툴렀던 청춘의 나’를 회복한다. 이렇게 확보한 동질성, 내 여생에서 소중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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