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군산군도
섬은 휴식의 여백을 사색으로 채워 준다. 섬은 늘 무심하게 바다 한가운데 떠 있다. 또 섬은 매번 여러 가지 얼굴이다. 외롭고, 한가롭고 때로는 편안한 얼굴, 그래서 뭍에서 바라보는 섬은 늘 미지의 그림이다.
고군산군도도 내겐 그런 한 무리 섬들이었다. 게다가 남쪽 저 끝에 사는 내겐 쉽게 다가갈 수 없게 멀기조차 한 섬이었다. 그 먼 섬에 오늘 9월 13일에 내가 찾아왔다. 옆자리엔 편을 뒷자리엔 우리 집 맏이를 태우고서. 이번 군산, 고군산군도 여행도 맏이가 설계하고 추진했다.
군산 비응항에서 시작되는 새만금방조제 길을 드디어 들어선다. 직선 길을 제법 달리니 도중에 차를 세울 곳이 기다리고 있었다. 거기서 멈추고 올라서서 바라보니 선유도를 비롯한 여러 섬이 안개에 살짝 가려 신비롭게 시야에 들어온다. 먼 섬, 저렇게 먼 섬에 배를 타지 않고 이렇게 한달음에 달려 들어갈 수 있다니…. 바다 위에 떠 있는 섬을 자기 차를 몰고 연륙교와 연도교를 차례로 통과하며 건너가는 건 색다른 경험이다. 바다 위로 놓인 다리는 시간으로 측정되는 거리를 단숨에 압축한다. 시간을 확인하고 표를 끊고 기다리다 승선하여 연락선을 타고 가던 몇 시간의 거리를, 다리들은 불과 몇 분으로 단축한다. 배를 타고 느리게 당도하는 낭만은 사라졌지만, 대신 얻는 건 순간이동의 편리함이다.
고군산군도 선유도를 향해 달리다 보니 섬과 섬들이 육지의 산맥처럼 이어져 있다. 육지와 연결되기 전엔 먼바다 섬이던 그 먼 섬들이, 육지를 끌고 들어간 방조제와 다리들 덕분에 이제는 내가 이렇게 차를 몰고 쌩쌩 들어가는 육지의 어느 도착 지점 즉 내륙의 땅이 되었다. 신시도와 무녀도를 거쳐 드디어 그리던 선유도에 도착했다. 섬의 찻길 끝 지점으로 가니 망주봉 즉 신선이 마주 앉아 바둑 놀음하는 형상이라는 두 개의 흰 바위 봉우리 곁의 '고래포차'에 도착한다. 미리 점찍고서 도착한 고래포차 점심은 싱싱한 회였다. 그리고 장자도로 건너가 커피를 마셨는데 다리로 이어지는 마지막 섬 대장도는 들어가지 않고 커피를 마시면서 아름답게 바라만 봤다.
그 안으로 들어가서 보면 섬이라고 해서 육지와 별반 다른 건 없다. 즉 섬이라서 특별한 건 맞지만 이곳 역시 사람이 살아가는 삶의 터전인지라 육지처럼 그렇고 그렇다. 그래서 섬은 여행객에게 다른 무언가를 보여주려고 구태여 애쓰지 않는다. 그저 자신만의 진솔한 분위기나 아름다움으로 찾는 이의 여심(旅心)을 어루만질 뿐. 하지만 생각 속의 섬은 늘 신비롭고, 찾아 들어가 발 디딘 섬은, 배를 타고 들어갔건 차를 몰고 도착했건 간에 생각할 여유를 주는 품 너른 공간이다.
고군산군도, 참 와보고 싶던 이 섬을 드디어 내가 이렇게 다녀왔다. 차는 이제 새만금방조제 길을 거쳐 기차마을로 향한다. 고군산군도를 출발하여 군산 시내로 들어와 우리 셋은 '철길 마을'과 '말랭이 마을' 또 '초원 사진관' 길을 느릿느릿 어슬렁거렸다. 이제부터 감성은 복고풍(retro)이다.
철길 마을, 1970년대의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곳 경암동 철길마을의 좁은 골목 철까시(레일) 길에서 우리는 과거로 향하는 타임머신을 타고서 느릿느릿 침목을 밟았다. 불량식품주식회사 상점을 지나칠 때 편의 허리춤을 잡고서 졸랐지만, 편과 맏이는 불량품 비과를 끝내 사주지 않아 아쉬움으로 돌아보며 걸었다. 아, 그 옛날 비과, 유과, 눈깔사탕, 박하사탕, 십리사탕 또 건빵….
말랭이 마을, 숙소인 '소설여행'에 도착하여 주차장에 차를 세운 후 둘러보니 ‘말랭이 마을’이라는 조형물이 눈에 들어온다. 이 마을은 철길 마을보다 조금 더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는 곳이라는데 이곳에 대한 사전지식 없이 안내판과 마주쳤기에 무심코 무말랭이를 많이 생산하는 곳으로 여겼다. 나중에 알고 보니 말랭이는 산비탈을 뜻하는 이 지역 방언이었다. 욕 잘하는 연예인의 생가가 있는 곳인지라 그 집 앞길은 '김수미 길'로 이름 지어졌다는데 거기까지 가보진 못했다. 1950년대의 생활상을 간직하고 있다는 말랭이 마을 답사는 다음 기회로 미루고 숙소인 '소설여행, 봄가을'로 들어갔다.
소설여행, 적산가옥인 일제식 건축물을 리모델링한 숙소인데 우리는 소설여행 중 ‘봄가을’에 여장을 풀었다. 일제강점기 역사가 담긴 적산가옥에서 하룻밤 머무는 것도 흥미로운데 집 이름이 소설여행인 것도 내 흥미를 더욱 돋웠다.
초원 사진관, 1998년의 영화 ‘8월의 크리스마스’를 촬영한 곳, 허름한 차고를 사진관으로 꾸며 촬영했다는 초원 사진관은 불치병에 걸린 사진사 한석규와 주차 단속원 심은하의 애틋한 사랑 이야기를 담은 영화였기에 찾아오는 발길이 끊이지 않아 철거했던 세트를 다시 복원한 것이라고 한다. 우리는 작은 차 옆에 서서 영화 이야기를 잠시 나누었다.
소설여행에서 군산의 하룻밤을 잘 보낸 후 남원으로 서둘러 출발했다. 추석 연휴가 시작되는 첫날이었기 때문이다. 남원의 춘향 테마파크 내에 위치한 ‘김병종 미술관’은 이곳 출신의 한국화가 김병종 작가가 자기 작품을 수백 점 남원시에 기증하면서 세워진 미술관이라고 한다. 김병종은 아주 오래전 어느 일간지의 '화첩 기행'에서 만난 화가인데, 섬진강의 봄을 묘사한 그의 글이 그때 막 인연을 맺고 드나들던 악양 산기슭 섬진강 길과 오버 랩 되어 내가 그 이름을 잊지 않고 있는 화가였다. 미술관은 지리산을 향해 겸손히 엎드린 형상이라고 하는데 다시 보니 그랬다. 여기서는 "산을 따라 흐르는 구름이 가장 바쁘고, 새소리가 가장 소란스러운 곳"이라는데 그리 보니 또 그렇다. 그리고 여기는 "사람이 느려지고, 말소리가 사치가 되는 곳"이라는데 둘러보니 사람들의 자세가 과연 그랬다. 또 과연, 이곳은 "자연과 미술, 그리고 문학이 있는 곳"이었다.
너무 맛있어서 미안 커피, 미술관 옆 커피점, '너무 맛있어서 미안 커피' 카페에서 미안 커피를 한잔하고서 곧바로 일어섰다.
군산에서 남원으로 이어진 여정을 ‘미안 커피’ 카페에서 마침표 찍고서 출발을 서둘렀다. 내비는 남원에서 밤재터널을 통과하여 산수유 마을, 구례로 이어지는 국도로 우리를 안내했다. 처음 타 보는 밤재터널 이 길, 추석 귀성길 번잡을 염려하던 나의 기우를 산기슭 길뫼재에 도착할 때까지 웃음거리로 만들었다. 구례 길로 들어설 때까지 움직이는 차는 우리 차 한 대뿐인 듯했다. 도착하니 테루가, 꼬리는 치지만 짖지는 않고서 기다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