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성향 테스트 결과
‘정치 성향 테스트’인 ‘정치혈액형 검사’를 했다. 이는 MBC가 2025년 코리아리서치와 함께 선거 참여 캠페인의 일환으로 설계·진행한, 웹 기반 시민 참여형 성향 진단 서비스다. 주로 젊은 층을 염두에 두고 만들어졌다고 한다.
나는 나 자신을 꽤 안다고 생각해 왔다. 그러나 이 나이에 이르러서도, 여전히 모르는 부분이 남아 있음을 부정하기 어렵다.
어느 해 만들어진 ‘나이 연하장’이라는 파일이 있다. 심심할 때마다 꺼내 읽는다. 거기에는 이런 문장들이 적혀 있다. 71세는 전설을 쓰기 시작하는 나이, 72세는 서서히 하늘과 가까워지는 나이, 73세는 누가 곁에 있어도 방귀를 뀔 수 있는 나이, 75세는 살아온 이야기로 돈을 벌 수 있는 나이, 76세는 ‘옹(翁)’자를 붙여 주는 나이. 78세는 대사가 있으면 영화에 출연하기 어려운 나이, 79세는 무슨 일을 할 때마다 ‘이것이 마지막인가’를 생각하는 나이, 그리고 80세는 누구에게나 반말을 해도 무방한 나이라고 한다.
지금의 나는, 혹여 영화 출연 요청이 올까 싶어 미리 피하고 있는 쪽에 가깝다.
이런 나이에 며칠씩 이런 테스트를 붙들고 있는 스스로가 못마땅하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었다. 나잇값을 못 한다는 자책이 오갔다. 그럼에도 체크 리스트를 찾아보고 또 확인하는 일은 멈추지 않았다. 그러다 마지막으로 붙든 것이 이 ‘정치성향 혈액형 검사’였다.
사회적 양극화가 누적되던 가운데, 조국 사태를 비롯해 이재명을 둘러싼 각종 의혹, 그리고 윤석열의 비상계엄 선포 논란 등을 거치면서, 지인들 사이에서도 의견 충돌이 잦아졌다.
한때 종교·문화계의 시국선언과 거리의 집회는 시대적 요구에 응답하는 행위로 받아들여졌고, 많은 이들이 그 진정성에 공감했다. 그러나 이후 특정 정당 집권시기에만 집중되는 선언과, 점차 거칠어지는 표현을 접하면서 판단은 달라지기 시작했다. 반복과 과잉은 설득력을 약화시켰고, 언어의 강도는 공감을 넘어 피로를 유발했다.
요즘 나는 문학작품을 고를 때, 저자가 남발된 시국선언에 얼마나 참여했는지를 무심코 확인하게 된다. 작품 바깥의 태도가 작품 읽기에 개입하는 상황이 불편하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펼치는 문학작품은 대개 오래 전에 출판된 것들이다. 더 나아가, 종교 지도자들의 언어가 점점 공격적인 구호로 변해 가는 장면을 보면서, 나는 조용히 그 제도적 틀에서 한발 물러나기로 했다.
극단적인 양극화 속에서, 특정 정파를 거의 일관되게 옹호하는 상대의 경직된 사고를 접할 때 피로를 느낀다. 때로는 만남 자체를 피하고 싶어진다. 다만, 입장을 바꿔 보면, 그 역시 나를 같은 방식으로 인식하고 있을 가능성을 부정하기 어렵다.
이러한 이념 충돌의 경험 속에서, 나 자신의 위치를 점검해 볼 필요를 오래전부터 느껴 왔다. 이번에는 그 점검을 구체적인 방식으로 진행해 보았다.
‘정치혈액형 검사’에서 도출된 결과에 대해서는 대체로 수긍한다. 그동안 나는, 어떤 가치관과 세계관 위에서 정치적 판단을 내리고 있는지 스스로 명확히 설명하지 못하는 순간들이 있었다. 내가 서 있는 지점이 중간인지, 우측인지, 그 사이 어딘지 확신이 서지 않을 때도 있었다. 말과 삶 사이에 불일치가 있는 것은 아닌지 점검해 보고 싶었다. 지금 내가 나이가 몇인데 이런 덜 떨어진 소릴...
아무튼, 세 차례 반복한 검사에서 동일한 결과가 나왔다. 나는 나의 이념적 좌표를 ‘품격 있는 고전파’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이제 이 위치를 전제로, 나의 판단과 발언을 정리해 나갈 생각이다.
다음은 검사 과정과 내용 요약이다.
정치 성향을 네 가지 심리·가치 요인으로 분석하여 16개 유형으로 분류하는 방식이다. 개인의 ‘기질’과 삶의 과정에서 형성된 ‘가치관’을 36개 문항을 통해 확인하고, 이를 바탕으로 정치적 스펙트럼상의 위치를 제시한다.
(1) 공감 헤모글로빈
타인의 고통이나 사회적 상황에 대해 감정적으로 반응하는 정도를 나타낸다.
검사 결과는 ‘중간(58/100)’이었다. 감정적 공감이 과도하지도 부족하지도 않은 수준으로, 타인의 고통을 인지하되 그것이 곧바로 정책 판단을 좌우하지는 않는 유형이다.
(2) 초기화 백혈구
현실 사회 구조에 대한 불만과 변화 욕구의 정도를 의미한다.
결과는 ‘없음’에 가까웠다. 급진적 변화나 체제 전환에 대한 선호는 낮고, 기존 구조를 보완·개선하는 방식에 더 가까운 성향이다.
(3) 전통 호르몬
판단의 기준을 개인 내부에 두는지, 혹은 사회적 전통과 규범에 두는지를 보여준다.
수치는 비교적 높은 편(41/100)이었다. 이는 감정적 직관보다는 축적된 관습과 규범을 판단의 준거로 삼는 경향을 의미한다.
(4) 우열 수용체
인간 사이의 서열과 위계를 정당한 질서로 받아들이는지에 관한 지표다.
결과는 ‘저활성’이었다. 질서 자체는 중시하되, 권위나 서열을 자연스럽게 정당화하는 태도와는 거리가 있다는 뜻이다. 보수적 성향을 지니되 권위주의와는 일정한 거리를 둔다.
경제와 사회 인식에서는 보수적, 변화의 방식에서는 점진주의, 권력에 대한 태도에서는 비권위주의, 인간관에서는 온건한 현실주의로 나타났다. 이를 종합하면 ‘자유주의적 보수(Liberal Conservative)’ 또는 ‘온건 보수(Moderate Conservative)’에 가깝다.
검사 결과 나에게 내려진 혈액형 즉 이념적 좌표는 ‘품격 있는 고전파’에 찍혔다.
이는 전체 응답자 중 약 7.3%에 해당하는 유형이다. 전통과 책임을 중시하면서도 약자에 대한 배려를 병행하는 보수적 성향으로 설명된다. 질서를 지키되 다양성을 배제하지 않으며, 역할 윤리를 중시하는 유형이다.
이 유형의 모델은 드라마 ‘나의 아저씨’의 박동훈, 그리고 『삼국지』의 황충이었다. ‘나의 아저씨’는 안 봤는데 이 기회에 봐야겠다.
이제 이 결과를 하나의 결론으로 내세우기보다, 하나의 기준점으로 삼으려 한다. 나의 판단이 어디에서 출발하는지, 어떤 경향으로 기울어지는지를 스스로 점검할 수 있는 좌표로서다. 중요한 것은 유형의 이름이 아니라, 그 이름에 부합하는 삶의 일관성일 것이다. 말과 태도, 선택과 실천 사이의 간극을 줄여 가는 일, 그리고 타인의 다른 좌표를 불필요하게 재단하지 않는 절제. 그 정도의 균형을 지키며 살아갈 수 있다면, 이 늦은 나이에 굳이 이런 검사를 붙들었던 시간도 헛되지는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