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의 기억

by 지오쌤

서울 수원 파주 하남에서 경이의 선후배들이 조문했다.

밤 아홉 시가 되자, 경이는 조문객들을 하나둘 배웅하고 있었다.

그때, 낯선 초로의 여자가 찾아왔다.

얼굴은 모르는 사람이었지만,그 찡그린 표정이 이상하리만큼 익숙했다.

기억은 허공에서 느리게 맴돌았다.

아무리 떠올리려 해도, 끝내 잡히지 않았다.

‘누구지… 저 사람은?’

빈소와 식당 사이, 경이가 서 있었다.

끝내 기억해 내지 못한 이 여인.

경이는 고개를 기울인 채, 낯선여인의 얼굴을 오래 빤히 들여다보았다.

그러곤 조심스럽게 물었다.

“저... 혹시 누구신지요”

그 순간, 여자가 불쑥 경이를 끌어안았다.

뜻밖의 포옹이었다.

품은 따뜻했지만, 낯선 냄새가 스쳤다.

바로 그때, 막내 시누가 소리쳤다.

“언니—!”

지방에서 올라온 시댁 식구들이 막 도착한 참이었다.


“응 아가씨 왔어”

경이를 안고 있던 여자가 막내 시누에게 되물었다.

그제야 경이는 이 여자가 동서, 주희임을 알아차렸다.

주희는 얼굴을 잔뜩 찡그린 채,

낯설면서도 어디선가 본 듯한 표정으로 경이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순간 경이는 자신이 너무 무방비했음을 깨달았다.

쿵쾅대는 심장 소리, 튀어 오르는 혈관, 가빠진 숨결이 한꺼번에 덮쳐왔다.

잠시나마 자신이 품고 있던 공기마저 털어내고 싶었다.

한때 같은 동네에 살며, 자신의 사생활을 훤히 꿰뚫던 여자.

7년여의 공백은 서로를 낯선 사람으로 만들어 버렸다.

정작 기억해야 할 사람은 남편이었건만—

그날, 경이는 기억하지 못한 얼굴을 남편보다 오래 마음에 새겼다.

남편의 형 석철부부가 그렇게 모습을 드러낸 것이었다.

석철은 지방에서 올라온 형제들을 분주하게 맞았다.

그날 밤, 그는 그들을 데리고 자신의 집으로 돌아갔다.

경이는 그사이 잠시 남편의 빈자리를 느꼈다.

분주한 손길과 목소리 사이에서,

남편과 아버지의 부재를 감지하는 이는 경이와 인서 인후뿐이었다.

슬픔은 이들만의 몫처럼 고여있었다.

남편을 잃은 여자의 감정, 아빠를 잃은 딸들의 마음은

마치 향불처럼 타올라 이내 허공으로 스러지는 듯했다.

그들이 상주석을 지키는 무게는, 누구에게도 보이지 않았다.

이른 아침, 낯선 화환 하나가 도착했다.

상가집 화환답지 않은 꽃바구니처럼, 큼직하고 화려했다.

빨강, 노랑, 색색의 꽃들이 뒤엉킨 유난히 화려한 것이었다.

사위가 물었다.

“어머니 박주희란 분 아세요? 이걸 보내서 사인해 주었습니다.”

리본엔 ‘김주호’라는 이름이 적혀 있었다.

작은아버지 빈소에 오지 않은, 아들을 대신해 주희가 보낸 듯했다.

아침 주희가 들어서자마자 말했다.

“꽃 도착했지? 그거, 입구에 잘 보이게 두세요.”

그녀의 뜻대로 화환은 방명록 옆에서 장례 내내 존재감을 뽐냈다.

빈소로 밀려드는 화환들은 다 세울 수 없을 만큼 겹겹이 늘어서 있었다.

낯선 이름들이 매달린 리본 사이로 국화 향과 향 타는 냄새가 뒤섞여 석훈을 배웅하고 있었다.

입관 전갈이 왔다.

반듯하게 누운 남편 그의 얼굴은 평온했다.

경이는 그의 머리부터 이마, 양 볼, 몸까지 천천히 쓸어내렸다.

손끝으로, 손바닥으로 기억을 붙잡듯 더듬었다.

한때 만져졌던 목의 종양은 사라지고,

화장한 얼굴과 단정한 머리, 소박한 수의는 오히려 더 엄숙해 보였다.

경이는 남편의 미동 없는 몸을 마지막으로 꼭 껴안았다.

손끝으로, 가슴으로, 그가 남긴 모든 것을 느끼며.

출장 중이던 인후가 돌아왔다.

수의를 입은 아빠를 부둥켜안고 목청 높여 울었다.

“그까짓 출장이 뭐라고… 아빠, 미안해. 정말 미안해…”

이마, 두 눈, 코, 입술, 목과 귀, 머리카락 사이사이까지

두 손으로 어루만지며 아빠를 기억 속에 새겼다.

뺨을 아빠 뺨에 겹치며 인후가 가만히 물었다.

“아빠, 바람 쐬러 가는 게… 이런 거였어?”

경이는 남편의 빈자리를 다시금 느꼈다.

인후의 울음과, 손끝으로 아빠를 더듬는 모습을 바라보며

남겨진 일상의 무게가 한순간 몰려왔다.

인서는 동생과 아빠를 번갈아 껴안으며 소리쳤다.

“아빠, 미안해… 정말 미안해 주말에 다시 오겠다고 했잖아.

왜 안 기다려줘… 내가 다시 올 거라고 했잖아-아빠-”


이제 정말, 이별이었다.

경이는 숨을 고르며, 말을 삼키고 조문객을 맞았다.

석훈은 오랜 시간 해외에서 근무했지만

그를 기억하는 직장 동료들과 친구들이 하나둘 빈소를 찾아왔다.

경이는 마치 연극의 주연 배우처럼, 슬픔을 연기하며 마음을 다잡았다.


화장장 화구에서 막 나온 아빠를 인서가 품에 꼭 안았다.

하늘은 더 높아지고 태양은 뜨겁게 열기를 토해 냈다.

경이는 그 순간, 아직 손 끝에 남은 남편의 숨결을 느꼈다.

장례지도사가 말했다.

“고인께 마지막으로 한 말씀씩 하세요.”

경이 친정 오빠가 먼저 입을 열었다.

“김 서방… 잘 가게.” 이내 목소리가 끊겼다.

석훈이 그토록 사랑했던 그의 형은 말했다.

“석훈아, 다시 만날 땐... 어릴 적 그 모습으로 만나자.”

울음을 삼키며 고개를 떨궜다.

그 말을 들으며 경이는 생각했다.

이 사람도, 무너진 가족의 옆 기둥을 짊어지고 있었구나.

다만, 그 무게를 모른 척하며 버틴 방식이 자신과 달랐을 뿐.

그렇게 믿었다. 아니 그렇게 믿고 싶었다.

경이는 마음속으로 다짐했다.

“오늘만 울고 다시 울지 않을게”

지킬 수 없는 약속이란 걸 알면서도 그렇게 중얼거렸다.

보현스님의 ‘무상계’가 흘러나왔다.

‘곱디고운 베옷 입고, 꽃신 신고 가는 님아...”

경이는 숨을 죽이며 그 노래에 남편을 실어 보냈다.

이승의 짐 훌훌 벗고 떠나는 길,

자신만 홀로 남는 길.

아이들의 울음이 그의 마지막 길과 맞물려

경이의 마음을 더욱 찌르듯 다가왔다.

인후가 흐느끼며 말했다.

“왜 지금 이 자리에서 내가 아빠를 불러야 하는지 모르겠어 아빠-.”

인서와 함께, 대답 없는 아빠를 부르며 목이 메었다.

화창한 날이었다.

철쭉이 만개한다는 곳에 석훈을 안치했다.

녹음이 짙어가는 6월, 그는 흙으로 돌아갔다.

그의 영혼은 또래의 사람들을 앞질러 먼저 떠나 버렸다.

마치 달리던 경주에서 혼자 결승선을 통과해 버린 사람처럼.

그는 이미 다른 세계로 사라졌다.

홀로 남겨진 경이는 그와 거리가 얼마나 멀어진 것인지

아득히 헤아려 보았다.

“당신은 지금 어디쯤 계신가요.

숨 쉬지 않아도 괜찮은 그곳에서... 정말로 편안하신가요?”

장지에서 나오는 길 주희가 갑자기 경이 어깨를 가볍게 감쌌다.

“동서 그때는 내가 너무 어려서 뭘 몰랐어.

줄 건 없지만, 마음만은 도와줄게 언제든지 연락해”

경이는 그 말을 잠시 믿고 싶었다.

그러나 동시에, 마음만이라도 나누고 싶지 않다고 말하고 싶었다.

장례를 마친 뒤, 인서는 와주신 모든 분들께 메시지를 드렸다.

큰아버지에게도 짧은 문자를 보냈다.

“큰아빠,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부족해 보였을지 모르지만, 저희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습니다.

아빠도 고향을 좋아하셨지만 그곳은 아빠가 계실 곳이 없어,

이곳에 모셨습니다. 이해해 주세요. 감사합니다.”

이 메시지를 경이는 여러 번 읽었다.

비난도, 억지 감정도 없었다.

그러나 누구나 알 수 있었다

인서는 ‘말하지 않는 방식’으로, 단호하게 말하고 있었다.


- 이 소설은 실화를 바탕으로 한 창작물입니다.

일부 사건과 인물은 픽션이 가미되어 있으며 실존인물이나

단체와는 무관합니다.-

수, 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