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누구 덕분에 살았을까

야! 이 새끼야 너 누구 덕분에 지금까지 살았어?

by 지오쌤

만남이 있으면 헤어짐이 있는 법.

어제인 듯 메운 시집살이를 했던 경이새댁은

결혼생활 30여 년 만에 과부가 되었다.

그녀와 석훈은 누구 덕분에 살았을까?


경이는 휴일엔 늦잠을 자기도 했고,

새벽에 출근하는 남편을 보내고 다시 잠을 청하기도 했다.

출근 시간에 맞춰 아이를 맡기고,

출근하고, 퇴근해서 아이를 돌보는 반복되는 평범한 하루들

그러나 그녀의 기상 시간조차 누군가에게 감시당하는 듯했다.


한동네 사는 주희와 그녀의 지인(인서 봐주는 이모)은

경희의 일거수일투족을 알고 있었다.

며느리의 하루는 사적인 것이 아니었다.

감시와 충고, 침묵과 지적이 뒤섞인 세계에서,

그녀가 품은 가족의 크기는 커졌지만, 경이는 그 안에서 자꾸만 사라졌다.

남편은 형 석철 앞에서 형이 아니라 마치 아버지를 대하듯 굴었다.

가족 행사는 통보였고,

그 안에서 경이의 의사는 단 한 번도 물어본 적 없었다.

집안의 공기는 수조처럼 답답했다.

움직일수록 산소가 줄어드는 물속에서, 경이는 점점 가라앉았다.

그리고 아무도 그녀를 꺼내주지 않았다.

석훈은 형 석철, 그리고 그보다 더 강한 아내 주희 앞에서 늘 ‘을’이었다.

그리고 경이는 그‘을’보다 낮은 자리에서 숨죽이며 눈치를 봐야 했다.

경이는 묻고 싶었다.

'도대체 왜! 당신은 형 앞에 그토록 작기만 하느냐고...

석훈은 언제부터 이렇게 숙이고 살아냈을까?’


시계는 석훈이 대학입학을 앞두었던 때,

그는 서울 C대학과, 백강 D대학 사이에서 고민하였다.

그러나 형제들은 앞서거니 뒤서거니 동시에 대학을 다녀야 했다.

석훈이 서울로 가고 싶어도 형편이 허락하지 않았다.

그의 포기가 그날 아침 몇 장의 종이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집안의 서열’이라는 이름 아래 당연한 일처럼 받아들였는지,

경이는 알 수 없었다.

결국 석훈은 지방 D대 경영학과를 선택했다.

4년간 장학금을 받으며 다녔고, 졸업과 동시에 취업해야 했다.

석훈은 대학 졸업 전에 고향인 지방직 공무원 시험에 합격했다.

그의 성취는 크게 축하받거나 인정받지 못했다.

그저 부모님의 걱정을 덜어드리는 것이 그의 방식이었다.

하지만 그는 곧 ‘차이’를 느꼈다.

친구들은 1~2년 늦게 취업했지만,

월급봉투는 더 두껍고, 일터는 더 자유로워 보였다.

석훈은 형에게 진로를 고민했고, 형은 그에게 기회를 만들어 주었다.


정확한 계기는 경이는 알 수 없었다.

다만, 석훈이 형 덕분에 서울로 올라와 결혼한 형의 집에서 1년 남짓 신세를 졌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즈음부터 석훈은 형 앞에서 말끝을 조심했다.

누구도 그걸 빚이라 하지 않았지만,

그는 마치 빚을 진 사람처럼 조심하며 감정을 감췄다.

그 조심스러움은 경이에게도 전해졌다.

반복되는 경험 속에서도, 경이는 오랫동안 그것이 불편한 줄 몰랐다.

사랑은 때때로 사람을 무디게 만들고, 감정의 경고음조차 듣지 못하게 한다.

조금씩 굳어가던 마음이 어느 날,

더 이상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을 경이는 한참 뒤에야 알았다.


주희는 석철이 석훈을 취업시켰다는 사실을 무심하게 반복했다.

그 말들은 경이의 귓속을 사포처럼 긁었다.

수레바퀴 속에 갇힌 느낌이었다.

뛰어내릴 수도 깔려 죽을 수도 없는 상태에서,

경이는 점점 ‘을’의 위치에 익숙해졌다.

석훈이 서울로 올라와 취업 초반, 주희는 불편함을 꾹 참으며 그를 챙겼다.

어머니와 시누이들도 그 고마움을 반복해 말했다.

석훈 역시 그 은혜를 인정했고, 시어머니도 형 부부에게 미안해했다.

그 때문에 경이는 평생 석훈의 젊은 시절 이야기를 미담처럼 들어야 했다.

그러나 경이는 석훈의 젊은 시절을 직접 보지 못했다.

같은 공간에서 시간을 함께한 적도,

그의 가난이나 분투를 견딘 기억도 없었다.

그가 이 세상에 존재하는지도 몰랐다.

이상하게도, 그녀는 그 시간을 자주 들어야 했다.

주희의 입을 통해, 반복되는 말속에서,

마치 누군가의 전기를 필사하듯 그 시절을 외웠다.

“삼촌은 일요일엔 외출 한번 안 하고 집에서 자정까지 TV만 보더라.”


“와이셔츠는 다 다려줬는데, 석철이 난리 치더라.”


“어느 날 복숭아라고 사 왔는데 다 풋것이더라.”


“수박을 사 왔는데 누구 주먹만 해서 웃기지도 않더라.”


“우리는 부부는 삼촌 때문에 1년 365일 중 360일을 싸웠다.”

경이는 그를 몰랐고, 결혼은 생각해보지도 않던 시절이었다.

하지만 낯선 인물의 삶은 시댁 사람들에게 마치 교과 과목처럼 반복되었다.

석훈이 살아낸 시절을, 경이는 오직 주희의 해설을 통해 알았다.

경이는 그에게 물었다.

“월급 받아서 뭐 했어요”

“월급은 3개월 동안 봉투째 어머니 드렸어”

“식사와 교통비는요?”

“회사 식권으로 밥 먹고 걸어 다녔어. 촌놈이 뭐 돈 쓸데가 있겠어.”

그는 담담히 말했다.


경이는 놀랐지만, 그것이 사실인지, 감정인지, 책임인지 쉽게 판단할 수 없었다.

어쩌면 다였고, 어쩌면 아무것도 아니었을 것이다.

문제는 그 시절의 사실 자체가 아니라,

그 기억이 누군가의 입을 통해 평생의 빚처럼 들려왔다는 점이었다.

결혼 후, 경이의 삶 어디에나 그 ‘미담’은 그림자처럼 드리워졌다.

자신의 청춘을 설명하지 않았던 그가,

과거를 해설자에게 맡기고, 경이 앞에서도 침묵했다.

그 침묵은 경이 에게 언제나 일을 남겼다.

그녀는 그 이야기를 수십 수백 번 들었고,

어느새 은근한 견제로 바뀌어 있었다.

그들의 배려는 늘 은혜가 아니라 유세였고,

경이 부부는 보이지 않는 갑을 관계에 고정되어 있었다.

가끔 경이는 생각했다.

이것은 문화 차이일까, 아니면 단순한 태도 문제일까.

아들이 결혼한 형 집에서 신세를 지면서

3개월 동안 월급을 통째로 어머니께 드렸다는 사실은 집안 누구도 말하지 않았다.

오직 남편만, 아주 나중에 조용히, 마치 사적인 비밀처럼 말했다.


직장 생활하는 성인 남자가 3개월 동안 돈 한 푼 없이 서울에서 생활할 수 있을까?

정말 그 돈을 어머니가 받았단 말인가?

구내식당이 있어도, 출퇴근 거리가 가까워도, 팔팔한 청년이 조직 생활하며 지내는 것이 가능할까?

국보 문화재 이야기도 아니고, 축지법을 쓰는 기인의 이야기도 아니다.

그저 그렇게 버텼다는 것. 그것이 놀라울 따름이었다.


그런데 왜 그 ‘미안함’은 언제나 큰며느리만을 향하는 걸까?

그리고 왜 그 고마움은 주희의 입으로만 반복될까?

어쩌면, 그 집에서는 돈은 아들이 벌고,

고생은 며느리가 하는 것이 당연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경이가 들어야 했던 것은, 젊은 날 덜 익은 복숭아를 사 오던 남자 이야기,

와이셔츠를 잘못 다려 형이 노발대발했던 기억,

그리고 일요일마다 꼼짝하지 않던 손님이 남긴 숨 막힘이었다.

석훈은 어머니를 향한 효심은 있었지만, 타인을 배려하지 못한 자신의 태도를

뒤늦게 경이에게 고백한 적이 있다.

그 구도 안에서, 가족이라는 이름 아래 누군가의

‘선의’가 다른 누군가의 ‘불쾌’가 될 수도 있다는 사실.

경이는 그것을 몰랐고, 혼란스러웠다.

‘빨간 머리 앤’을 사랑했던 그녀는, 가족 안에서 사랑과 인정만이 오갈 줄 알았다.

그러나 그녀가 보고 있는 풍경은 달랐다.

갑과 을, 유세와 욕설, 그리고 무시와 멸시가 공기처럼 존재했다.

큰집, 석철과 주희 부부와는 애초에 대화가 어려웠다.

그들은 언제나 ‘통보’였고, 말투는 강의에 가까웠다.

경이에게 요구하는 모든 말이 은근한 압박으로 느껴졌다.

가족의 일원이 된다는 것은, 그 모든 걸 견디는 일이었다.

경이는 어느새 가정을 ‘관계’가 아니라 ‘질서’로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어느해 제삿날, 석철의 시선은 유난히 날카로웠고,

마침내 입에서 거친 말이 터져 나왔다.

석훈이 형 앞에서 누이들을 변호하자 나온 욕설이었다.

“야, 이 새끼야. 너 누구 덕분에 지금까지 살았어?”

순간 시간이 느리게 흘렀다.

국그릇을 든 경이의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인서는 고개를 들고, 아빠의 얼굴에서 피가 스르르 빠져나가는 것을 보았다.

마치 투명해진 사람처럼, 아빠가 거기 서 있었다

‘큰아빠가 아빠를 이렇게 깎아내릴 수 있구나.’


인서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실망인지, 놀람인지 구분되지 않았다.

그날, 아이는 처음으로 아버지를 ‘약한 사람’으로 바라보았다.

그 말은 경이와 아이들 앞에서 뱉어졌다.

사춘기의 문턱을 넘은 인서는 작은 실망과 함께 커다란 연민을 동시에 느꼈다.

‘아빠는 왜 아무 말도 못 할까.’


경이의 가슴에 멈추지 않는 메아리가 울렸다.

“야, 이 새끼야. 너 누구 때문에 살았어?”

그 말은 모욕을 넘어, 경이의 삶을 한순간에 무너뜨리는 폭력이었다.

아이 둘을 남에게 맡기고, 출퇴근하며,

출산 보름 전까지 일하던 몸으로 인서를 낳았다.

출산 보름 후 다시 출근했고, 그렇게 모은 돈으로 겨우 내 집을 마련했다.

형 석철의 부탁으로 집 담보 보증까지 서주던 남편이었다.


그 형의 입에서 나온 말은 경이의 폐부를 찢었다.

숨이 막혔다.

식탁 위의 공기는 얼어붙었고,

인서는 숨을 멈춘 채 아빠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봤다.

경이는 그날 밤 오래도록 잠을 이루지 못했다.

가족이라는 테두리는 결국 서열과 빚,

그리고 ‘누구 덕분’이라는 무형의 굴레로 엮여 있었다.

그 관계는 마치 거대한 수레바퀴 같았다.

결국 석훈의 죽음으로 경이는 감옥같은 관계에서 해방되었다.



- 이 소설은 실화를 바탕으로 한 창작물입니다.

일부사건과 인물은 픽션이 가미되어 있으며 실존인물이나 단체와는 무관합니다._



수, 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