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 좀 쐬고 싶어

해방

by 지오쌤

2024년 6월 10일 오후세시 산들바람에 나뭇잎이 흔들렸고,

하늘 위로 하얀 솜털 구름이 조각조각 떠다녔다.

남편은 이미 혼자 외출하기 어려울 만큼 병색이 깊었다.

그가 말했다.

“바깥바람 좀 쐬고 싶은데.”


창백한 얼굴, 가늘어진 팔, 비쩍 마른 몸, 허공을 더듬는 눈빛.

경이는 그 눈빛을 오래 보지 못하고 짧게 대답했다.

“여보, 오늘은 힘들어. 내일 가자. 나 오늘 수업 있어.”

그녀는 현관문을 닫자, 현실이 그녀를 붙잡았다.

시험이 코앞이었다.


아이들에게는 단순한 자격증이지만, 그녀에게는 생계였고, 책임이었다.

교육은 지식만을 옮기는 일이 아니라

누군가의 미래를 함께 짊어지는 일이다.

그날의 수업은 현준이었다.

초등학교 3학년부터 인연이 이어져, 이제는 고등학교 2학년

키는 그녀를 훌쩍 넘어섰고, 어른이 되려는 중이었다.

똘똘하고 예의 바르며, 무엇보다 진심으로 말할 줄 아는 아이였다.

“아빠처럼 되고 싶어요.”

‘의사’ 아빠를 존경하면서도, 그 허들을 자신이 넘을 수 있을까 망설이는 눈빛이었다.

“선생님… 근현대사, 1920~ 30년대 무장 투쟁사는 너무 어려워요”


경이가 웃으며 말했다.

“외우려고 하지 말고, 시대를 따라가 보자.

3.1 운동이 1919년에 일어났잖아.

그때 우리 독립운동가들의 사기도 높아졌을 거야.”

현준이 곧장 반응했다.

“아~ 그래서 홍범도의 봉오동, 김좌진 장군의 청산리 전투가 이어지는 거군요”

“맞아. 그런데 일본은 어떤 일을 저질렀지?”


“간도참변이요.”

어렵다던 말이 무색할 만큼 정확했다.


“그래서 서일 총재를 중심으로 대한독립군단이 조직되지만...”

경이가 말을 채 끝내기도 전, 현준이 끼어들었다.

“맞아요, 자유시 참변”


“그 배신감과 두려움, 슬픔 속에서 결국 -”

“참의부, 정의부, 신민부 3부 결성이죠”

아이의 말이 매가 먹잇감을 낚아채듯 쏟아졌다.

“그래, 잘한다. 3.1 운동이 20년대의 기점이라면, 30년대 무장투쟁은

일본이 세운 만주국을 중심으로 기억하면 돼.”

현준은 빙고판을 채우듯 대답했고, 수업은 주고받는 리듬 속에서 자연스레 이어졌다.

그리고 언제나처럼 수업이 끝날 무렵이면 여자 친구 이야기가 빠지지 않았다.

“선생님 저 다음 주에 여자 친구랑 에버랜드 가요.”

경이는 웃음이 나올 뻔했지만, 삼켰다.


그날은 현준의 여자 친구 이야기와

독립운동사의 조각들이 뒤섞여 하루의 한 페이지를 채웠다.

수업을 마치고 서둘러 집으로 돌아오니,

석훈은 잠들어 있었고, 숨소리는 가늘었다.

경이는 그의 손등을 감쌌다.

조용한 기도처럼.

다음 날 아침, 하늘은 눈부시게 맑았다.

경이는 어제한 약속을 지키려 부지런히 아침을 차리고 화초에 물을 주었다.

햇살 아래 잎맥들이 선명하게 빛났다.

그때, 남편이 말했다.

“바람 좀 쐬고 싶어.”

“그래, 알았어, 준비할게”

경이는 잰걸음으로 움직였다.


휴대용 산소발생기를 챙기고, 집 앞에 차를 댔다.

그는 천천히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조수석에 오르려던 순간, 그가 말했다.

“갑자기 소변이 마려운데…”

경이는 웃으며 말했다.

“에구, 집에서 미리 보고 올걸. 혼자 다녀올 수 있겠어?”


석훈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순간 경이의 마음을 스치는 의문은

‘여태 집에 있던 사람이, 왜 소변을 보지 않고 나왔을까.’

집이 2층이라 금세 다녀올 터였다.

그러나 5분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았다.

시동 켜진 차 안에서 불안이 커져갔다.

심장이 쿵쾅거리며 가슴을 두들겨댔다.

무슨 일이 벌어진 걸까.

그녀는 계단을 두 칸씩 뛰어올라 현관문을 열었다.

그가 거기에 쓰러져 있었다.

싸늘한 숨, 젖은 바지, 축 늘어진 손.

마치 소풍을 떠나는 아이처럼, 그의 얼굴은 고요했다.


그렇게 석훈과 경이의 긴 인연은 끝났다.

경이는 아이 같은 그의 몸을 옆으로 눕히고,

젖은 바지를 갈아입혔다.

그것이 그녀가 그에게 건넨 마지막 인사였다.

경이는 인서와 경옥 언니에게 소식을 전했다.

119가 오고, 경찰이 오고, 법의관이 오고, 상조회사 직원들이 들이닥쳤다.

죽음의 현장은 순식간에 한 편의 연극 무대가 되었다.

남편이 죽었는데, 경이는 그 자리에서 서류를 챙기고

경찰과 법의관의 질문에 차례차례 답해야 했다.

울 틈도, 무너질 틈도 없었다.

그러면서도 석훈의 마지막을 곁에서 지켜주지 못했다는 사실이

칼날처럼 자신을 찔러왔다.

그 어리석음을, 끝내 용서할 수 없었다.

“그도 이반 일리치처럼... 두려움을 떨치고 갔을까.”

경옥 언니에게는 ‘무섭다’고 말했던 사람인데.


경이는 자신에게 되물었다.

이반을 지킨 게라심 처럼 자신은 남편 곁을 사랑으로끝까지 지켰는가.

그의 고통을 함께 짊어졌던가.

아니면, 도리어 그의 외로움에 눈을 감고 있었던 건 아닐까.

실망과 후회는 시간이 갈수록 선명해졌다.

그러나 그것마저도, 이제는 더 이상 그에게 닿을 수 없는 감정이었다.

죽음은 그렇게 모든 말을 끊어냈다.

그가 평생 잠들던 침대에서,

“사랑했다. 고마웠다”는 말을 나누며 작별하리라 믿었다.

그러나 그것은 경이의 소망일 뿐이었다.

그는 혼자서, 조용히 떠나버렸다.

아무 말도 남기지 않았고,

마지막으로 남긴 것은 갈아입힌 젖은 바지뿐이었다.

그것이 부부의 마지막 순간이었다.

오후 두 시 무렵, 인서가 부고 메시지를 보냈다.

짧은 답들이 이어졌다. 대부분 퇴근 후 오겠다는 문장이었다.

영정사진과 음식, 꽃과 재단 모든 것이 장례식 절차대로 흘러갔다.

남자 상주는, 결혼한 지 1년 된 사위뿐이었다.

만약 큰딸이 결혼하지 않았다면, 그 자리는 누가 맡았을까.

친정 언니들과 동생이 곧장 달려왔다.

인후는 일본 출장 중이었다.

새신랑이 상주석에 앉고, 장례는 시작되었다.

남편의 안치 장소는 아직 정해지지 않았다.

일주일 전, 사위와 두 딸이 함께 다녀온 곳으로 향했다.

동생 차를 타고 인서와 함께 가서 계약을 진행했다.

흥정도, 망설임도 할 수 없는 계약이었다.

수목장이 결정되고 빈소로 돌아오니, 어둠이 찾아왔다.

검정 상복이 경이와 딸들을 맞이했고,

사위와 친정 언니는 조문객을 맞고 있었다.

예정된 죽음이었지만, 오늘이 그날일 줄은 몰랐다.

몸과 마음이 모두 얼어붙은 채, 경이는 움직였다.

상례 절차도, 예의도 격식도 그저 시키는 대로 따랐다.

그녀는 울지 않고, 조문객들을 차분히 맞았다.


- 이 소설은 실화를 바탕으로 한 창작물입니다.

일부 사건과 인물은 픽션이 가미되어 있으며 실존인물이나 단체와는 무관합니다.-

수, 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