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안의 낙엽들

모순된 감정의 경계에서

by 지오쌤

아버지를 모실 땅 하나 마련하지 않은 형제들의 선택,

그럼에도 끝까지 지켜낸 예의.

짧은 문자의 끝, “감사합니다”라는 단어 속에는 슬픔과 체념,

말로 다 전할 수 없는 고통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그리고 “이해 해주세요.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그 한 문장이 인서의 진심이었지만,

어쩌면 큰아빠에게는 날 선 비수처럼 꽂혔는지도 모른다.


며칠 뒤, 집안에는 묘한 소문이 돌았다.

인서의 문자를 받은 석철이 쉽게 잠들지 못하고

한밤중까지 전화를 돌리거나 메시지를 보냈다고 했다.

어떤 이에게는 억울함을 털어놓고,

어떤 이에게는 쏟아지는 분노를 숨기지 못했다고 했다.

그가 무엇에 그렇게 흔들렸는지,

그 밤의 통화와 메시지는 이미 답을 말하고 있었다.


그제야 경이는 분명히 알았다.

책임은 끝내 자신에게 돌아오지 않도록,

언제나 교묘하게 다른 이의 어깨로 흘러가도록 만드는 사람들.

그들의 말은 입 보다, 그 말이 흘러가는 방향을 보면 본질이 보였다.


“석훈아, 다시 만날 땐 어릴 적 모습으로 만나자 ”


경이는 잠깐, 아주 잠깐 그 말을 믿었었다. 아니 믿고 싶어졌다.

하지만 그 말은, 떠나간 사람에게만 들리도록 조심스레 던져졌고

남겨진 이들에게는 어떤 책임도 남기지 않는 문장이었다.


그는 여전히 그 자리에 있었고, 흔들린 건 자신뿐이었다.

말은 마음의 모양을 닮은 껍데기일 수 있다.

경이는 다짐했다.

그 말에 다시는 기대지 않겠다고.

이제는, 울지 않기로 한 약속을 기억할 때였다.

남편이 떠난 뒤, 경이는 돌아볼 틈 없이 살아야 했다.


그동안은 오직 하루라도 더 남편을 살게 해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래서 감정은 눌렸고, 욕망은 잠겨 있었으며, 몸은 제 기능을 잃었다.

이제는 또 다른 숙제가 기다리고 있었다.

남겨진 자의 의무, 죄책감, 감당해야 할 삶

거부하고 싶지만 거부할 수 없는 숙제였다.

그 숙제들이 경이의 하루와 밤을 점령해 버렸다.


삼십여 년 전 결혼 첫 명절 이후

가라앉아 있었던 ‘말괄량이’가 울고 있었다.

오랜 시간 우울의 바닥에서 썩어가고 있었다.

그녀 안에서 조용히, 천천히 미쳐가고 있었다.

어떤 꿈도, 바람도, 욕망도 사라진 듯했지만,

그녀 안에서 조용히 새로운 무언가가 깨어나고 있었다.


어느 날, 경이는 거울 앞에 섰다.

낯선 여자가 있었다.

그 여자는 울지도, 웃지도 않았다.

무표정한 얼굴로 경이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게 너야. 이게 네가 만든 인생이야.”

거울 속의 여자가 속삭이는 듯했다.


감지 않은 머리, 씻지 않은 얼굴, 굳은 표정, 백수광부 같았다.

신의 말을 대신 전하던 무당이,

세상에서 말할 권리를 빼앗긴 채 스스로 물로 들어가던 순간처럼.

한때 누군가의 세계였던 그녀는

이제는 누구의 삶에도 속하지 않는 유령이었다.


“싱크대에는 며칠째 씻지 않은 그릇들이 겹겹이 쌓여 있었다.

냉장고에는 썩은 채소의 냄새가 은밀하게 퍼져 나왔다.

입에 무엇을 넣었는지조차 가물거렸다.

몸은 바람만 스쳐도 부서질 듯 바스락거리는 낙엽 같았다.

밤마다 그녀는 소리 죽여 울었다.

웃음인지 비명인지 분간할 수 없는 소리가 목구멍 깊숙이에서 뒤엉켜,

마치 짐승의 울부짖음처럼 방안을 메웠다.


그 무렵 경이는 더 이상 사람의 언어로 말 할 수 없었다.

거울 속의 자신을 향해, 주저 없이 말했다.

“미친년”

더한 욕을 퍼붓고, 자신을 찢어발기고 싶었다.

결혼 생활 속에서 자신을 잃어가고 있음을 느꼈다.

그는 떠났지만, 그의 부재는 여전히 경이를 짓눌렀다.


남은 건 빚과 무력감,

그리고 자신을 죄인처럼 느끼게 만드는 가난한 마음뿐이었다.


아무렇지도 않은 척, 아무것도 아닌 척 하루하루를 견뎠다.

살아 있는 것이 아니라, 버텼다.

사람을 만나는 일이 두려웠다.

누군가에게 짐이 되었다는 사실이, 발걸음을 붙들었다.

그녀는 세상과 떨어져, 자신만의 조용한 공간에서 하루하루를 견디고 있었다.


매일같이 침묵속에 침대에 쓰러지듯 누워만 있엇다.

모든 것이 끝난 듯 숨조차 무겁게 느껴졌다.


어느 날 현관문이 열리고, 친구 현미가 들어왔다.

“경이야... 괜찮아? 내가 조금 늦었네.”

인후에게 연락해 현관 비밀번호를 알아냈다고 했다.

경이는 해외여행 중이던 현미에게 부고를 알리지 않았다.


현미는 남의 짐을 짊어지지 않는 사람이지만,

중요한 순간에는 필요한 것만 하고,

친구를 챙기는 방법을 아는 현실적 사람이었다.


현미는 손수 경이 곁을 정리하고, 차를우리고 물 한 컵을 건넸다.

식탁 위에는 그녀가 사온 죽 두 그릇이 놓여 있었다.

경이는 이런 친구가 있음에 마음 한 켠이 잠시 가벼워졌다.


혼자라는 외로움은 남편이 없어서만은 아니었다.

누구와 함께 있어도 자신이 온전히 사람으로 대우받지 못함을 느꼈다.

그 마음이 더 지독한 지옥처럼 느껴졌다.

그런데 친구 현미가 사람으로 대해주던 그날 자신도 사람 같았다.


누구의 말이라도 빌려 자신의 상태를 설명해 보고 싶었다.

법륜 스님은 중학교 때 출가했다고 한다.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면서 왜 바쁘냐?”


그 스승의 말은 어린 그의 마음속에 강렬한 질문으로 남았다 한다.


경이는 그 말을 곱씹으며, 자신이 얼마나 멀리 와도

여전히 길 잃은 아이처럼 느껴졌다.


“나는 어디에서 왔고, 어디로 가는가?”

그 아이는 한 마디 질문으로 삶의 길을 찾았지만

경이는 수십 년 동안 길을 잃은 채, 침묵에 익숙해진 삶의 무게속에 스스로를 가두고 있었다.


“경이야 상처가 많은 사람은 상처에 무뎌지는게 아니라 상처에

더 예민해진대. 예전의 고통이 다 아물지 않았기 때문이지”

변함없는 현미의 일침이 다시 경이의 뇌리에 박혔다.


맞는 말이었다. 경이는 석훈이 떠나면서 주고받은 상처가 아물 줄 알았다.


“경이야 네가 할 수 있는 걸 해 봐. 네 방식의 작별, 네 방식의 기도,

그런 것이 너 만의 치료가 될 수도 있어”


오랜만에 현미가 주는 영혼의 양식이 경이의 뇌리를 잠시 밝히며 스쳤다.

한 끼의 죽을 먹는 것만으로도, 몸 안 어딘가가 다시 살아나는 듯햇다.

새로울 것도 없는 모습이지만, 친구가 차를 끓이는 동안 모처럼 세수를 했다.

현미가 온 덕분에 하룻동안 처음으로 두 끼를 먹게 되었다.


한강 작가의 말이 문득 떠올랐다.

“인간은 왜 그렇게도 잔인한가?

그리고 또 왜, 그렇게 선할 수 있는가?”


가족의 양면성은 낯선 타인에게서 느끼는 그것과 다르지 않았다.

오히려 가까울수록 더 깊이 다가왔다.


그녀는 묻는다.

“나는 왜 이렇게까지 부서져야 했을까?

그 질문이 내면을 흔들었다.


오래 돌봤고, 오래 참았으며, 오래 사랑하려 애썼다.
하지만 사랑이라 믿었지만, 어쩌면 의무였고,

어쩌면 자신을 버리는 일 이었음을 경이는 고백한다.

그 고백만이 그녀가 가진 진실이었다.

그 모순된 감정의 경계에서, 경이는 길을 잃고도 애써 찾으려 했다.


그러다 문득 결혼 초반의 기억이 떠올랐다.

작은 집안 낯선 시선, 말하지 않아도 느껴지는 권력과 긴장.

그때도 이미, 가족 안에서 자신은 ‘아무것도 아닌 사람’처럼 느껴졌음을 깨달았다

‘내 방식의 작별, 내 방식의 기도가 내 방식의 치료가 될 수 있다.’ 는 현미의 말이 가슴 밑바닥에서 울렸다.

현미는 한때 삶의 깊은 수렁 속에서 3천배를 하며 스스로를 붙들었던 경험을 이야기한 적이 있었다.

경이는 무엇을 해야 할까.


-이 소설은 실화를 바탕으로 한 창작물입니다.

일부 사건과 인물은 픽션이 가미되었으며, 실존인물이나 단체와는 무관합니다.-

화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