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제를 지내며
천주교 신자인 경이는 결혼이후 시댁의 종교행사를 함께 치르면서
자연스럽게 불교와도 가까워졌다.
진리는 하나만 있는것이 아님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고
불교의 고즈넉한 고요한 분위기또한 좋았다.
10여 년 전,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에 지냈던 49제가 떠올랐다.
자의반 타의반으로 자연스럽게 남편의 49제를 준비하게 되었다.
그때처럼 이번에도 절에서 마주할 모든 장면이 낯설면서도 익숙했다.
절 마당에 들어서자, 스님의 목탁 소리가 가슴 깊숙이 울려 퍼졌다.
단정하고도 일정한 리듬이 공기 속에 번져
굳어 있던 돌덩이들을 하나씩 두드리는 듯했다.
경이는 그 소리에 귀 기울이며 속으로 물었다.
“나는 이 삶을 다시 시작할 수 있을까?”
해령의 형님이 정성껏 써서 보내온 기도문과
시주가 담긴 작은 봉투가 마음에 와닿았다.
49제 날, 한여름 무더위는 절정에 달해 있었다.
스님의 염불과 목탁 소리가 매미 울음과 뒤섞여 절 마당을 가득 채웠다.
법당 안쪽, 어둑한 공간은 잔잔히 흔들리고 있었다.
황금빛 불상 앞 향로에서는 연기가 실처럼 얽혔다 흩어졌다.
마치 우리의 인연이 그렇게 얽히고 흩어지는 듯했다.
“퉁, 퉁, 퉁...” 목탁 소리가 맥박처럼 규칙적으로 울려 퍼졌다.
딸들은 조용히 고개를 숙여 절을 올렸고,
사위도 무릎을 꿇고 두 손을 가지런히 모아 절을 올렸다.
연차를 내고 참석한 막내 시누 부부도 묵묵히 그 자리를 지켰다.
법당 앞 상에는 윤기 흐르는 사과와 배, 수박과 검붉은 곶감, 노란 시루떡이 정갈하게 놓여 있었다.
석훈은 가을이면 꼭 홍시와 감을 사오고 늦가을엔 곶감을 즐겨먹었다.
곶감을 반으로 잘라 경이에게 건네 주던 모습이 떠 올랐다.
그때마다 경이는 당 수치를 걱정하며 잔소리를 늘어놓곤 했다.
오늘도 상 위에는 그가 좋아하던 곶감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마치 그녀의 잔소리를 잠시 내려놓아도 좋다는 듯.
누군가 조용히 속삭이는 것 같았다.
그 모든 장면이 그날만큼은 ‘정성’이라는 이름으로 덮인 침묵같았다.
스님의 기도에 맞춰 경이는 절을 올렸다.
기도가 끝나 밖으로 나와 의식을 마무리하였다.
딸을 시집보내며 딱 한 번 입었던 석훈의 양복과 구두,
외출할 때 즐겨 입던 생활한복과 셔츠,
그리고 노자 돈으로 인쇄된 돈을 태우며 제는 마무리되었다.
경이는 그리움과 슬픔이 밀려와 고개를 떨군 채 땅만 바라보았다.
이제는 그가 마지막 흔적까지 가지고 떠나버린 듯 했다.
그러나 이 의식이 누구를 위한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마치 연극 무대 위 배우들처럼, 각자 정해진 역할을 연기하는 듯했다.
장례식 날 빈소에서처럼.
은은하게 피어오른 향내가 온몸에 달라붙었다.
경이는 잠시 생각했다. 49제 나름 목돈을 들이면서 올린 의식이다.
‘이 의식은 정말 고인을 위한 것일까,
아니면 살아남은 이들을 안심시키기 위한 것일까?’
기도와 의식은 결국 남은 자를 위로하는 장치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자신이 이 자리에 서 있는 이유 역시, 그를 위한 것이 아니라
여전히 그를 붙잡고 싶은 자기 집착 때문임을 알았다.
답을 찾지 못한 채, 그녀는 머리를 감았다.
마음에서 그가 정말로 멀어져 가는 것 같았다.
그리고 다시 물었다.
“이 정성을, 그가 살아 있을 때 했다면 어땠을까.”
49제, 백중기도, 연등...
모두 순수한 마음에서 시작되었겠지만,
이미 떠난 이에게 이런 의식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이 모든 것은 누구를 위한 것인가?
죽은 자인가, 아니면 산 자의 안위를 위한 것인가.
석훈은 이미, 그녀 마음속에 살아 있지 않은가.
그의 존재는 눈물 속에, 아이들의 목소리 속에,
매일 혼잣말처럼 되뇌는 기억 속에 살아 있었다.
빌어야 할 대상이 있다면, 신도 절도 아닌 ‘살아 있는 자신’이 아닐까.
이제는 자신의 삶을 살아가게 해달라는 것—
그것이 진짜 기도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스쳤다.
신은 인간 바깥에 있는 절대자가 아니라,
사람들이 서로를 위로하고 이해하며 살아갈 때
마음속에 스며드는 조용한 흔적일지도 모른다.
- 이 소설은 실화를 바탕으로 한 창작물입니다.
일부 사건과 인물은 픽션이 가미되었으며,
실존인물이나 단체와는 무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