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03_매주 토요일, 서로의 마음을 살펴본다
살면서 몇 번의 이사를 했습니다. 저와 아내야 어른이니까 하면 하는 거죠. 그런데 아이들은 어떨까요?
우선 친구들이 바뀝니다. 조금씩 익숙해지던 터전도 떠나야 합니다. '아이를 하나 키우려면 온 마을이 나서야 한다'는 아프리카 격언을 곱씹게 되는 대목입니다. 잦은 이사는 아이들이 마을 사람들과 상호작용할 틈을 앗아가니까요. 아이가 물리적 공간에 정서적으로 뿌리 내릴 새도 없이 다른 곳으로 떠나야 한다는 사실은 저와 아내의 마음을 무겁게 만들었습니다.
아들은 파주에 살다가 서울 팔판동으로, 그 다음 독일 뉘른베르크를 거쳐 함부르크에 왔습니다. 딸아이는 부산에서 태어나 유치원을 잠깐 보내고 파주로, 파주에서 팔판동을 거쳐 같은 코스를 밟았습니다. 저와 아내는 서울 용산에서 효창동으로, 효창동에서 부산으로 이사갔는데요. 다 제 직장에 따라 거취가 결정됐다는 점에서 아내와 아이들에게 참 미안한 마음입니다. 어떻게든 잘 버텨보려 했지만 쉽지 않았던 한국에서의 시간들. 독일에선 과연 성공할 수 있을까요?
딸아이는 어떤 마음이 들었을까요.
주제: 이사
나는 6번 이사를 갔다.
부산에서 파주로. 파주에서 한옥집으로.
한옥집에서 독일 뉘른베르크로.
뉘른베르크에서 1번 집을 이사하고 햄버거(함부르크)로 이사왔다.
또 어디로 이사 가게 될까?
기분이 어땠냐면 엄청 재미있고
졸리고 힘들었다.
그리고 새집이 어떻게 생겼지도 궁금하고
어떤 일이 생길지도 궁금했다.
저는 어릴적 이사했던 기억 중 하나를 골라 써봤습니다. 충남 보령시가 보령'군'일 때 웅천이란 면에 살았는데요. 그 깡깡 시골에서도 두어번 이사를 했습니다. 하지만 워낙 어렸을 적이어서 이사와 관련해 별다른 기억은 없었어요.
웅천에서 대천, 그러니까 지금의 보령시로 이사를 왔을 때가 국민학교 3학년 때였습니다. 이 때 막 국민학교가 초등학교로 바뀌었죠. 이사하던 그날 기억이 또렷합니다. 아파트이름이 ‘흥화’였습니다. 화목이 흥한다, 뭐 이런 뜻이었던 것 같아요. 어머니가 아버지 월급을 열심히 저축해 처음으로 장만한 ‘우리집’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돌아보면 이 아파트에서 보낸 시간이 저희 가족 입장에선 가장 화목하지 않았던 것 같아요. 재정적으로 풍요로웠지만 서로 간의 애정과 사랑을 듬뿍 키우진 못했습니다. 어머니는 마실 나가시거나 교회 활동하느라 집을 자주 비우셨고, 저는 갓 산 삼보 펜티엄 듀얼코어 486 컴퓨터에 빠져서 채팅, 게임으로 시간을 보내기 일쑤였습니다. 아버지는 거실에서 텔레비전을 보셨고 동생은 방에서 뭘 했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물론 좋은 기억도 많습니다. 많은 친구들을 만났습니다. 초등학교 3년, 중학교 3년을 보내면서 사귄 친구들이 많았죠. 종종 아버지와 집 근처 학교 운동장에서 축구했던 기억이 납니다. 집에서 혼자 열심히 재수한 끝에 원하는 대학에 합격했습니다. 여러 가지가 있지만 글을 쓸 때는 딱 그 주제에 포커스를 맞춰 써야 하니까요. 거두절미하고 제가 잡은 주제로 글을 써봤습니다.
이사
32평 새 아파트는 삐까번쩍했다. 넓었고 남향이었다. 부모님이 대출 끼지 않고 매매한 첫 집이었다. 이삿짐을 들고 2층 우리집까지 올라오던 이삿짐센터 아저씨들 모습이 기억난다. 이사 후 자장면과 탕수육을 먹었다. 배부르게 먹었다.
호시절이었다. 아버지는 회사에서 두툼한 보너스를 심심찮게 받았다. 엄마는 열심히, 정말 열심히 저축했다. 크게 돈 쓸 일이 없었다. 17단 자전거에 최신형 미니카, 비비탄총까지 그 시절 내게 필요했던 건 부족함 없이 선물 받았다. 486 펜티엄 컴퓨터는 그 모든 선물 중 으뜸이었다.
하지만 우리 가족은 점점 더 말이 없어졌다. 각자 방에 들어가 나오지 않았다. 아버지는 소파에 앉아 TV를 보셨다. 나는 내 방에서 컴퓨터에 열중했고 동생은 뭘 하는지 몰랐다. 엄마는 동네 마실을 다녀오시거나 거실에 누워 드라마 시청에 여념이 없었다.
“풍요 속 빈곤”이란 표현이 어울리는 가족이었다. 재정적 어려움이 없는데 가족 간의 관계는 점점 야위어 갔다. 가족 간 소통도, 함께 즐기는 취미도 없었다. 부족한 게 없는데 부요함이 없는 기현상이라 할 수 있겠다.
32평 아파트는 부모님의 자랑이자 자부심이었다. 성취감을 주는 트로피였다. 열심히 살면 내 집을 장만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랄까. 흥화아파트였다. 화목이 가득한 아파트란 뜻이다. 즐거운 추억도 많았지만, 그 집으로의 이사는 한편으론 우리 가족의 빈틈도 여실히 보여주었다.
아내도 어릴적 이사를 정말 많이 다녔다고 합니다. 부산과 대구를 오가며 유년 시절을 보낸 아내는 이사에 대한 기억이 썩 좋지 않습니다. 힘드니까요. 앞서 딸의 글에서도 봤지만 설레는 마음도 잠시, 극복해야할 각종 스트레스가 이내 밀려옵니다. 낯선 곳이 주는 스트레스, 친구 사귀기, 또 어디론가 떠나야 하는 불안정감... 아내가 독일에서 더 이상 이사하지 않길 바라는 가장 큰 이유입니다.
이사를 자주 하다보니 아내에게 생긴 부수적인 스킬이 있습니다. 가구 배치입니다. 이렇게도 배치해보고 저렇게도 모양을 바꿔봅니다. 책상이나 의자, 침대의 위치만 요리조리 바꿔봐도 꽤 그럴싸한 공간이 탄생하거나 나만의 아늑한 분위기가 연출됩니다. 아내의 인테리어 센스는 이렇듯 고단함 속에 꽃을 피웠습니다.
이사
성인이 되기 전 내 주민등록등본은 3장 빽빽하게 채워져 있었다. 총 12번의 이사로 부산 금정구, 진구, 수영구, 해운대구 그리고 대구 수성구 등의 흔적이 남아있다.
대학 4년 동안도 총 4번의 이사를 했다. 기숙사, 황학동, 제기동, 성신여대앞까지. 결혼 후 지금까진 총 8번의 이사를 했다. 35년 동안 24번의 이사를 했다. 1년 4개월에 한 번씩 이사를 한 셈이다.
잦은 이사는 낯선 환경에 빨리 적응하게 만든다. 새로운 공간에서 신선한 영감을 얻는다. 새로운 일을 시작하는 동력도 생긴다. 반면, 진득하게 동네와 동네 사람, 동네 친구들 만드는 일은 쉽지 않다. 오랫동안 꾸준하게 그 자리를 지키는 것도 어렵다.
나는 지금 24번째 집에서 살고 있다. 올해 25번째 집으로 이사한다. 이번에는 꽤 오랫동안 머물 집으로 가길 소망한다. 5년, 10년 한 자리에서 정성스럽게 공간을 가꾸고, 관계를 맺고, 관리하며 살아갈 수 있기를 말이다.
아내의 말처럼 2021년 올여름 다시 한 번 이사를 떠납니다. 계속 물건들을 검색하며 집을 찾는 중입니다. 학생이라 집 구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인간적인 계산으로는 쉽게 답이 나오지 않습니다. 이민 초기 정착은 정말 힘든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특히 영화 ‘미나리’의 가족처럼 아내와 두 자녀까지 대동해 낯선 땅에 정착하는 일은 여간 고된 일이 아닙니다.
하지만 저와 아내, 아이들은 요즘 그 어느 때보다 친밀감이 높습니다. 경주마처럼 앞만 보고 달려야 했던 직장 생활을 접고 아이들, 아내와 새출발 하는 심정으로 떠나왔기 때문일까요. 삶의 방향을 틀어 독일로 날아온 뒤론 나와 아내가, 나와 아이들이 서로를 보듬는 그 관계의 끈이 잘 보입니다.
나의 사회적 성공이 가족의 행복으로 이어질 거라는 잘못된 방정식은 그걸 경계하며 살아온 제 사고방식에도 예외 없이 영향을 주고 있었습니다. 가족을 부양할 재정 능력은 필수지만 그 이상의 성공이 우리 가족의 끈끈한 관계와 사랑을 보장해주지 않습니다. 이걸 체득하는 중입니다.
어디로 이사 가게 될까요. 어떤 집 주인을 만날까요. 저는 여기 정착할 수 있을까요. 하루에도 수 천번 온갖 이메일을 처리하며 골머리를 썩습니다. 그럼에도 아직 희망을 봅니다. 제대로 시작도 안 했습니다. 이제 1년 3개월 지났습니다. 독일에서의 3번째 이사 만큼은 하늘의 인도하심 따라 우리 가족에게 꼭 맞는 곳, 필요하고 어울리는 곳으로 가고 싶습니다.
"우리 새로 시작한다고 그랬잖아. 이게 그거야"
"우리가 함께 있는 게 더 중요한 거 아냐?"
"엄마, 다 괜찮을 거예요"
-영화 '미나리'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