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NFJ와 ENTJ의 결혼준비기 Ep.100 - 길고도 짧았던 400일
알람 소리부터 퇴장 음악까지
정신없었던 그날의 순간들에 대한 기록
동시에 여러 개의 알람이 우리를 깨운다. 파워 J 커플답게 만일의 사태를 대비해 맞춰둔 알람이 사방에서 울린다. 방 안에 있는 알람 기능이 있는 모든 것이 같은 시간에 일제히 울리도록 전날 맞춰둔 덕분이다.
졸리지만 절대로 미적거릴 수 없다는 것을 안다. 잠이 많은 아내도 오늘만큼은 이겨내야 한다고 굳게 다짐했는지 벌떡 일어나 알람을 끄기 바쁘다. 모든 알람이 꺼진 순간 호텔 방의 전화가 울린다.
고객님, 신청하신 모닝콜입니다. 리마인드 콜은 필요 없으실까요? 감사합니다. 좋은 하루 보내세요. 뚜뚜—
기계를 믿지 못하겠는지 사람에게까지 깨워달라고 부탁한 아내가 새삼 귀엽게 보인다.
그렇게 우리는 압구정의 5성급 호텔을 하나도 즐기지 못하고, 해가 뜨기도 전에 체크아웃을 마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깝지 않을 정도로 싸게 예약해 준 회사에 감사한다.)
웨딩 촬영 때 한 번 와봤다고 능숙하게 찾아왔다. 너무 이른 시간이라 발레파킹을 도와주시는 분들도 계시지 않아 직접 주차를 하고 내려간다. 내가 주차를 했는데도 발레파킹 비용을 지불해야 하는지 의문을 품으면서...
새벽부터 많은 커플이 편한 옷차림으로 들어온다. 어차피 곧 가장 멋진 옷으로 갈아입을 것이기 때문에 아무도 개의치 않는다.
이 시간은 대부분의 신랑에게 어색하고 외로운 시간이다. 샵에는 대략 3시간 정도 머무른다. "머무른다"라는 표현이 모든 방문객에게 어울릴지 모르겠으나 적어도 신랑에게만큼은 충분히 적절한 단어이다. 30분~1시간 정도 헤어 메이크업을 제외하면 나머지 시간은 말 그대로 "대기"한다. 테이블에는 수많은 신랑이 앉아 각자의 예복을 갖춰 입으며 옷매무새를 만진다. 남자의 정장에도 이렇게나 다양한 종류가 있구나 느끼며 구경하다 보면 그 시간이 그렇게 지루하지는 않다.
샵에서 드레스를 픽업해 오신 헬퍼님을 만나고, 부케를 들고 인사하러 와준 플래너님을 만날 때쯤이 되면 이제 곧 식장으로 출발해야 한다는 의미이다.
오랜 시간 헤어져 있었던 아내와 드디어 조우한다. 혼자서는 거동이 불가능할 정도로 큰 드레스를 입고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식장으로 출발한다.
내 차는 내가 주차한 곳에 그대로 있었다. 내가 주차하고 내가 출차했지만 발레비용은 어김없이 청구되었다. 무엇을 위한 발레비용이었을까?
일요일 아침의 도로는 한산하다. 전날 2시간 가까이 걸려서 온 길을 거꾸로 가는 데 35분밖에 걸리지 않았다.
너무 일찍 온 것이 아닌가 싶었지만, 식장 직원분들, 스냅 작가분들, 헬퍼 이모님은 오히려 아주 잘 되었다며 편안한 표정을 하고 계셨다. 수많은 결혼식을 지켜본 경험에서 나오는 조언이니 그대로 받아들이기로 한다.
그날의 첫 번째 식은 양질의 사진을 더 많이 남길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본격적으로 하객분들이 도착하기 전까지 우리는 (여기서의 우리는 양가 혼주분들도 포함된다) 열심히 사진을 찍는다. 리허설을 겸하며 한 번, 동선을 체크하며 한 번, 신부대기실을 구경하며 한 번. 하객분들의 빠른 식사를 위해 가족 원판 사진도 미리 찍어둔다.
식장 직원분과 스냅 작가분들의 가이드에 맞춰 움직이고 자세를 취하다 보면 금세 정신이 없다. 시원했던 식장에서 우리는 땀을 흘리기 시작하고, 조금씩 시끌시끌해지는 로비의 소리에 남은 촬영을 위해 로비와 홀을 이어주는 커다란 문을 닫는다.
촬영이 끝나고 다시 문이 열리는 순간, 그 순간이 정신을 차리고 있을 수 있었던 마지막 순간이었다.
여유롭게 앉아 대기하고, 시원하게 뚫린 도로를 달려왔던 순간은 금세 잊히고 인사와 악수의 소용돌이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본식까지 시간이 제법 남아있었는데 우리를 축하해 주기 위해 찾아오신 하객분들이 벌써부터 들어오기 시작한다.
이미 결혼식을 마친 결혼 선배들이 자주 하던 얘기가 있다.
너무 정신이 없어서 누가 왔었는지 기억도 잘 안 나.
에이, 말도 안 돼. 얼굴 보고 인사하는데 그게 어떻게 기억이 안 날 수 있어.
그럴 수 있다. 적어도 내가 경험해 본 신랑의 입장에서는.
인사와 인사가 중첩된다. 양손을 활용해 서로 다른 사람과 악수를 나누고 있다. 왼손에는 고등학교 친구의 왼손이, 오른손에는 전 직장 동료의 오른손이 잡혀있다. 당연히 그 둘은 모르는 사이다. 대학교 친구와의 인사가 마무리되기 전에, 부모님의 지인분을 소개받고 축하를 받는다. 그 분과 사진을 찍는 와중에 카메라 뒤편에 직장 상사의 얼굴이 보인다. 카메라가 내려짐과 동시에 돌진해 감사 인사를 드리며 간단히 이야기를 나누자 뒤에서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린다.
인사의 시간은 식장 직원분이 나를 호출해 주기 전까지 지속된다. "신랑님, 이제는 올라가셔야 해요."라는 말과 함께 꿈에서 깨어나듯 정신을 차리고 입장 준비를 위해 이동한다. 이동 중에도 바쁜 신랑의 사정을 모르는 분들의 신랑을 부르는 소리는 끊이지 않는다.
시끌벅적했던 로비가 사회자의 멘트와 함께 조용해진다. 그리 넓지 않은 홀에 신랑/신부라는 하나의 고리로 연결된 하객들이 잔뜩 들어서 있다.
신랑 입장이라는 소리와 함께 준비해 둔 음악이 홀 안에 울려 퍼지면, 여유 있는 척 연기하며 식장으로 들어선다. 우리의 식장은 한 명 한 명의 얼굴이 선명히 보이는 밝은 홀이었지만, 누가 와 있었는지는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존경하는 아버지의 손을 잡고 입장해, 사랑하는 아내와 팔짱을 끼고 퇴장한다. 30분도 안 되는 짧은 시간 안에 한 부부의 아들에서 한 가정의 남편이 되었다.
400일을 넘게 준비한 결혼식이 끝났다. 도저히 다가온다고 느껴지지 않았던 날짜가 어느새 지나갔다. 살면서 해보지 않은 고민과 경험을 통해 새로운 생각을 많이 해볼 수 있는 긴 준비 기간이었다. 그 기간 동안 늘 옆에서 함께했던 아내와 대화의 깊이는 이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깊어졌으며, 서로에 대해 더 많이 알고 배울 수 있었다.
우리나라에서 결혼이라 하면 "결혼식"이라는 하루의 행사에 큰 의미를 부여하는 것으로 느껴진다. 내가 경험한 결혼은 그것보다 훨씬 더 큰 경험이었다.
하나씩 준비해 나갈 때마다 시야가 넓어지는 것을 느끼며 결혼과 관련된 글을 써보고 싶었다. 그렇게 야심 차게 시작했던 글이 작년 10월에 작성한 첫 결혼 글이었다. 열정에 가득 차 Ep.0이라는 타이틀을 부여하며 시리즈를 이어나갈 것처럼 시작했지만 다음 글은 작성되지 못했다.
1년 정도 지난 지금 시점에서 결혼 준비 과정의 글을 적는다면 당시 내가 느꼈던 생생함은 담아낼 수 없을 것이다. 그 사이 많이 무뎌졌고, 희미해졌다. 대신 결혼이라는 전체의 준비 과정을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게 되었다.
내 관점에서 결혼식 준비 경험에 대해 하나씩 이야기를 해볼 수 있지 않을까? 이 생각을 시작으로 본식 당일에 대한 이야기를 Ep.100으로 풀어보았다. (결혼 준비를 완료했다는 100%의 의미를 담은 것이지 100개의 에피소드를 쓰겠다는 것은 아니다.)
날짜가 다가오기만을 기다리면 될 것이라고 생각했었는데 본식을 앞두고 오히려 바빠졌다. 우리의 단 하루를 위해 수많은 사람이 함께 준비하고 있었다.
식장, 플라워, 호텔, 플래너, 헤어메이크업, 혼주메이크업, 드레스, 정장, 혼주한복, 본식스냅, 본식 DVD, 사회자, 축가, 연주 등등… 10개 이상의 업체가 우리와 일종의 합을 맞추고 있었다. 5월 19일 11시, 딱 그 순간을 위해 수많은 사람이 관여하고 있었던 것이다.
지나고 보니 우리 가족을 더 빛나게 만들어주기 위해 노력해 주신 고마운 분들이 많이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높은 텐션으로 신나게 우리의 소중한 순간을 담아주신 스냅작가분들, 아내를 위해 땀을 흘리고 뛰어다니며 신랑과 혼주분들까지 챙겨주시던 헬퍼님, 입장 전 신랑의 멘탈을 잡아주신 예도분, 아침부터 시간 내서 먼 길 와주신 하객분들.
신혼여행을 위해 이동하던 중에서야 친절하게 웃으며 도움 주시던 분들의 얼굴이 한 분 한 분 떠올랐다.
혼자 적어보는 글에서나마 우리를 빛내주신 모든 분께 다시 한번 감사를 전하고 싶다.
* 사진을 제외한 모든 그림은 Chat-GPT DALL-E를 통해 생성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