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르드 이야기
인천공항까지 버스 1시간 10분에 비행기를 타고 2시간 30분, 이동시간만 4시간이 걸려 도착한 삿포로 신치토세 공항. 인천과 삿포로에서 수속하고 어쩌고 하는 시간 생각하면 6시간 이상 걸린 이동이다. 공항에서 다시 버스를 타고 시내를 가기 위해 기다리던 버스정류장에서 찍은 삿포로의 첫 사진이다. 그리고 아마 삿포로에 대한 사진은 이게 마지막이 될 거다. 내가 모르는 필름이 또 나오지 않는 이상.
분명히 평지인데 카트가 스르륵 미끄러져 그 안에 담긴 콜라가 몽땅 쏟아질 것 같다. 이 사진을 찍고 난 뒤 내가 삿포로에 머문 시간은 24시간 남짓인데 아마 그 24시간이 기묘할 거라고 알려주는 거였나 보다. 물론 이 사진을 찍기까지도 정말 다사다난했다.
나는 여행할 때 원래도 짐이 많지 않거니와 이번엔 졸업식에 들렀다 가야 하니 짐이 정말 간소했다. 잠옷, 여벌옷 하나, 세면도구, 카메라, 황현산 선생님의 책 한 권 이렇게 잔스포츠 백팩에 넣어보니 아직도 공간이 한창 남는다. 젊은 여자가 가벼워 보이는 배낭 하나 덜렁 메고 입국 심사대에 서니 퍽이나 의심스러운가 보다. 리턴 티켓, 예약한 숙소 바우처, 여행 계획 등등 궁금한 걸 다 알려줘도 의심이 풀리지 않는지 내 여권만 보며 "흐으으으음"을 연발한다.
답답한 나는 '궁금한 게 있으면 물어봐라. 답하겠다. 네가 보듯 나는 원래 단기 여행 전문가다.'로 시작해서 내 명함, 아빠 명함까지 사회에서 인정하는 종이란 종이는 다 꺼내서 보여줬다. 그래도 돌아오는 건 "흐으으으음"
한국이 왜 +82인가, 빨리빨리의 나라이기 때문인데 내 뒤에 서있던 한국인들의 눈초리가 이쯤 되니 매섭기도 하다. 결국 나는 "와타시 니혼고 우우우 (=나는 일본어 못한다.), 아나타 에고 나이 나이? 에고 데키 다레? (=너 영어 노노? 영어 할 수 있는 누구?) 네가 영어를 못하면 영어 잘하는 사람을 데려와서 궁금한 걸 물어봐! 왜 이러는데 !(영어로)"라고 분노했다. 그래도 그는 여전히 "흐으으으음 에에 ~" .
.... 정말 할 수만 있다면 이놈의 머리를 쥐어박고 싶었다. 꼴에 제복에 모자까지 다 갖췄는데 영어를 못 갖췄어. 너네 신치토세 "국제" 공항이잖아!!! 하지만 내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으니 "네가 원하는 게 뭔데? (= 왓 두유 원트 프롬 미?)"를 반복했고, 그는 이제야 생각났다는 듯이 "고르드 고르드 나이? 노 고르드?" 라는 이상한 소리를 냈다. 내가 계속 '고르드 고르드'를 못 알아듣자 그는 내 가방을 가리키며 "고르드 !" 외쳤다. 일단 내 가방이 궁금한 것 같아 나는 그 자리에서 가방을 활짝 열어 "클로즈 !!! 올 !!!!" 소리쳤다. 그랬다. 그는 나를 금괴 밀수범으로 의심한 거다. 야 이놈아. 내 인생에 금은 엄마가 때워준 금니밖에 없다 이놈아. 도장을 안 찍어주면 가방에 있는 모든 걸 다 보여줄 것 같은 내 기세에 놀란 건지 당황했는지 드디어 그는 나에게 입국 도장을 찍어줬다.
그래, 의심스러울만했지. 젊은 여성. 혼자. 배낭 하나. 체류시간 24시간. 그래 그럴 수 있지. 그래도 공항에서 입국심사하면서 골드를 고르드라고 하는 건 심한 거 아냐? 약 10분을 그렇게 소비했다. 여행지에서 시간은 고르드 그 이상인데 씩씩대며 버스정류장으로 향했고, 그렇게 이 장면을 만났다.
색감이 특출나지도 않고, 피사체가 아름답지도 않고, 그렇다고 균형이 잘 맞지도 않는 그저 누르스름한 사진이지만 사실 이 속에는 '고르드사건' 같이 생동감 넘치는 일이 있기 때문에 나는 이 사진이 좋다.
김춘수 시인의 '꽃' 같은 사진인 거다. 그가 고르드!!를 외치는 순간 이 사진은 삿포로가 되었고,,, 어쩌고저쩌고,,
입국 심사도, 첫 날밤의 고독도, 망쳐버린 계획도 모든 것이 머피의 법칙처럼 운 나쁘게만 느껴졌던 삿포로도 그런 시간과 사건이 있었기에 이따금 생각나고, 다시 가보고 싶은 거다.
추신
삿포로 여행기는 아래 블로그에서 읽을 수 있어요
https://m.blog.naver.com/ahdcnd/22135384616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