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 사랑하는 지예에게
저와 지예와의 만남은 유명세와는 거리가 먼 지방 대학의 강의실에서 시작되었어요. 저는 서울예대 문창과를 준비하다가 면접에서 떨어지고 크게 좌절했죠. 재수를 하고 싶었는데 공부를 그다지 잘하지 못했고, 아빠가 재수는 절대 안 된다고 하셔서 그냥 붙은 대학교 아무 곳에나 입학했어요. 저는 이곳에서 크게 잘 지내고 싶은 마음은 없었어요. 그냥 성적에 맞춰서 들어온 대학,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거든요. 저는 글 쓰는 사람이 되고 싶었는데, 낯선 이 강의실, 이 공간이 내 꿈과 저를 멀어지게 하는 느낌이 들어 마냥 정이 가지 않았어요.
처음 보는 수많은 학생들이 와글거리며 시끄러웠던 개강 첫날, 사실 저는 지예와 처음 마주했던 순간의 기억을 뚜렷이 기억해내지는 못해요. 그저 같은 학과였기에, 그 공간 어딘가에서 3월 2일, 그녀와 저는 수많은 익명의 얼굴들 중 하나로서 서로를 스쳐 지나갔으리라 짐작할 뿐이에요.
진짜 지예에 대한 첫 기억은 강의실의 희미한 배경 속이 아니라, 강의실 밖 여럿이서 담배를 피우던 공간, 바로 거기서 시작되었어요. 그때 같이 친하게 지내던 무리가 있었는데, 같잖은 이유로 저를 해코지했거든요. 그때 저는 지금과는 다르게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소심했던 애라서, 어떻게 말을 해야 할지 몰랐어요. 그런데 그때 지예가 저를 구해주었어요. 듣다 듣다 하도 어이가 없어서 저를 끌고 왔다고 했는데, 그때 저는 그녀에게 느꼈던 고마운 마음을 아직도 잊지 못해요. 그때부터 저는 담배 냄새를 좋아하게 되었어요. 마일드세븐 파란색 담배곽을 구기며 쓰레기통에 버리는 그녀의 담배 냄새를요. 그 담배 냄새는 제게 구원의 따스함을 상징하게 되었어요.
지예는 뭐랄까, 모든 것에 거침없는 시원시원한 성격을 갖고 있는 친구였어요. 섬유유연제 냄새가 물씬 풍기고, 여유가 넘치고, 그 당시말로 쿨한 친구였죠. 그녀는 담배를 끊임없이 폈고, 그 담배는 주황색 메트로시티 백에 넣어 다녔죠. 참 독특하고 유쾌한 친구였어요. 그래서 많은 친구들이 지예를 좋아했어요. 저도 그들 중 하나였고요. 지예와 친해지게 되고, 우연한 계기로 학과에 많은 친구들과도 관계를 쌓게 되었죠. 나를 음해하던 친구들과 멀어지고 지예의 옆에 있는 친구들과 하나둘씩 사소한 수다를 하는 게 어찌나 재밌던지요. 지예는 나에게 구김 있던 대학시절을 반듯하게 펴 준 고마운 사람이에요.
우리가 대화를 트기 시작했을 때, 저는 삶의 바닥을 헤매고 있었어요. 상황은 너무나도 암울했고, 제 안의 세계는 온통 회색빛이었죠. 당시 주변 친구들이 '내가 너무 순수해서 이 거친 세상을 어떻게 살아갈지' 걱정했을 정도로, 저는 아주 무지했고 스스로 존재감마저 낮다고 여기던 사람이었어요. 유년시절부터 겪었던 아빠의 폭력은 도저히 극복하지 못할 것 같은 악몽 그 자체였어요. 공포의 무게에 짓눌려 '내 인생은 왜 이럴까'라며 나 자신을 많이 원망했어요. 자책으로 가득 찬 나날들이었고, 제 안은 그렇게 곪고, 썩고, 짓눌려가고 있었죠.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지예는 늘 나와 똑같은 태도로 말을 걸었어요.
어느 날 그녀는 나에게 치킨을 사주겠다고 했어요. 사당역에 있는 어느 치킨집이었는데, 베이크 치킨이라는 것이 정말 맛있다면서 저를 그곳으로 데리고 가줬어요. 한 마리에 2만 원 정도 하는 치킨이었어요. 돈이 없어 매일 만원 대 저렴한 치킨을 그것도 아빠와 함께 먹었는데, 그날은 지예와 함께 먹었어요. 똑같이 가난한 학생이었는데도 그녀는 저에게 치킨 따위 사는 것을 아까워하지 않았어요. 한 푼 두 푼이 아쉬운 시절이었기에 저는 그녀의 호의를 거절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그날 겉은 바삭하면서 기름기가 없는 담백한 치킨을 생전 처음 먹어봤어요. 그때 먹었던 그 치킨의 맛은 아직도 기억이 날 정도로 맛있었어요. 그녀와 함께 저녁 시간을 함께해서 더 맛있었는지도 모르죠.
저는 치킨과 맥주 한 잔을 먹으면서 저의 고통을 그녀에게 이야기했습니다. 말을 하면 할수록 제 고통이 상쇄되는 것 같았죠. 그녀는 폭력으로 물들어진 제10대의 이야기를 진지하게 들어줬습니다. 그리고 그녀는 그 어떤 조언도 저에게 하지 않았어요. 그저 맥주를 계속 시켜줄 뿐이었죠. 치킨을 맛있게 먹고, 제 안에 있는 모든 말을 쏟아내고 나니 밤이 되었어요. 날이 참 쌀쌀했었죠. 지예가 지하철역까지 저를 바래다준다고 했습니다. 한사코 거절했지만, 어차피 집 가는 길이니까 괜찮다고 했어요. 차가 계속 지나가는 그 거리에서 그녀가 제게 던진 단 한 마디는, 마치 망치로 내 뒤통수를 맞은 듯한 기분이었어요.
"이게 네 인생의 터닝포인트라고 생각해."
터닝포인트
어떤 상황이 다른 방향이나 상태로 바뀌게 되는 계기. 그 지점.
퉁명스러움이 배어 있어 얼핏 차갑게 들릴 수도 있었지만, 그 말에는 어떤 위로의 말보다도 진심 어린 무게가 실려 있었어요. 제 삶이 이제 또 다른 변환점에 다다랐다는 그 터닝포인트라는 말이 제 가슴을 뛰게 했습니다. 그 어떤 위로나 기도도 저에게 위안을 주지 못했는데, 그녀에게 기대도 하지 않던 위로를 듣는 순간, 제 안에 가득했던 암울하고 절망적이던 마음이 눈 녹듯이, 혹은 기적처럼 사라지는 기분이 들었어요. 도저히 이성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감정의 해방이었죠.
그날의 배경까지 생생해요. 날이 어둑어둑해지던 무렵, 사당역 근처의 시끄러운 찻길이었어요. 빵빵거리던 자동차의 경적 소리가 배경음악처럼 요란하게 깔리는 그 순간, 그녀가 뱉어낸 '터닝포인트'라는 단어는 소음 속에서 더욱 선명하고 강력하게 제 귀에 박혔습니다.
신기하게도, 그 순간 이후 저는 이전의 제가 아니었어요. 타인과의 관계를 두려워하고 피하던 껍데기를 벗어던지고, 비록 눈치는 좀 없었을지언정 사람들과 스스럼없이 잘 어울리는 사교적인 사람으로 바뀌어 있었습니다. 진짜 그녀의 말대로, 그때가 제 삶의 확실한 전환점이었습니다. 제가 스스로의 존재 가치를 증명할 필요 없이, 누군가의 말 한마디로 구원받았던, 인생의 가장 빛나는 순간이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