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당역 그 삼겹살집

02. 사랑하는 지예에게

by 지수


나는 내가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사람이라고 진심으로 믿었어요.

초등학교 4학년 때 부모님이 이혼했어요. 그 소식을 들은 친구 한 명이 "괜찮아? 걱정된다"라고 물었던 그 악의 없던 말간 표정을, 저는 아직도 잊지 못해요. 술에 취하면 때리는 아빠. 고3이 된 나에게 어느 날 갑자기 낯선 여자를 데려와서는 엄마라고 부르라고 강요했죠. 그 여자는 내가 아빠한테 맞는 걸 자주 지켜보더니, 결국 같이 나를 때리기 시작했어요. 어느 날 아침, 학교 가기 전에 머리채를 잡힌 채 끌려다니다가 저는 살던 집을 맨발로 뛰쳐나왔어요. 정말 우연찮게 경찰차 한 대가 제 앞에 섰고, 꼴이 말이 아니었던 저를 파출소로 데려가줬죠. 그때 저는 생전 처음으로 사람을 고소해 봤어요. 고소를 했다는 소식을 들은 아빠는 술 냄새를 풍기며 나타나서는 이렇게 말했어요.


"고소 취하해. 그 여자 상처 주지 마."


참 어이가 없었어요.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그래 봤자 1년 남짓 본 그 여자가 나보다 더 중요하다는 사실에, 나는 모든 것이 다 내려앉는 기분이었어요. 왜 나만 이렇게 살아야 하는지, 왜 바르게 살려고 애쓰는데 온 세상이 나를 무너뜨리려고만 하는지. 매일이 그런 질문의 연속이었죠. 그렇게 세상에서 내가 제일 불쌍한 사람이라고 굳게 믿었던 그날, 그 치킨집에서 지예가 내게 말했어요.


"세상엔 너보다 더 심한 사람들 세고 쎴어."


너무 차갑게 들렸어요. 순간 숨이 막힐 정도로. 이보다 더 불행한 사람이 있을까? 나는 지예에게 아니라고, 그럴 리 없다고 했지만 그녀는 주위를 둘러보라고 했어요. 소위 지잡대라고 말하는 지방 전문대에서 사연 없는 친구는 하나도 없었죠. 다들 각자만의 사정이 있지만, 저처럼 암흑 속에 빠져 허우적거리지는 않았어요. 뭐, 물론 환경의 탓을 하면서 비행을 저지르는 사람도 있었겠죠. 하지만 나는 그런 사람은 아니었고, 저 스스로를 불쌍한 사람 취급하면서 살아갈 뿐이었어요.


내가 유독 약했던 거죠.

물론 그때는 약할 수밖에 없었지만요. 시간이 흐르고 나서야, 저는 그 말의 무게를 온전히 이해하게 됐어요. 나는 내 상황에 너무 깊이 빠져 있었던 거예요. 힘들었던 건 사실이에요. 정말 힘들었어요. 그런데 그게 나의 전부가 되어서는 안 되는 거였죠. 더 잘 살려고 노력했어야 했어요. 돌이켜보면 지예가 던진 그 차가운 말들이, 하나하나 내 삶의 뿌리가 되어주었어요. 어릴 때는 이해하지 못했지만 지금에 이르러서는 이해되기 시작되는 말들. 지예는 나보다 고작 한 살이 많았지만, 몇십 년은 더 산 것처럼 위로해 줄 때가 있었죠.


그렇게 내 일상이 지예로 채워지기 시작했어요. 제 모든 일상에는 지예가 함께했죠. 밤새 과제하고, 밥 먹고, 심지어 아르바이트까지 같이 했어요. 더 가까워진 후에는 열아홉 살부터 사귀어온 그녀의 남자친구도 만났어요. 키 크고 잘생긴 사람이었는데, 그 앞에서 환하게 웃는 지예를 보면서 참 묘한 기분이 들었어요. 부럽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그녀가 행복해하는 모습 자체가 좋았어요. 남자친구와 함께 있을 때 지예는 조금 달랐어요. 더 부드럽고, 더 밝았죠. 그때 깨달았어요. 아, 이 사람이 내게 이렇게나 소중한 존재가 되어버렸구나 깨달았죠. 그렇게 나는 내 인생에 두고두고 남을 친구 하나가 태어났어요.


지예와 함께하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나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갔어요. 내 생각을 또박또박 말할 줄 알게 됐고, 공부도 주도적으로 하면서 학과 수석도 하고, 남들은 힘들어하는 과제도 자신 있게 발표했어요. 친구들도 많이 생겼고, 학과 부대표까지 맡게 됐죠. 이렇게 내가 똑 부러지는 사람이었나? 어쩌면 지예가 내 안에 갇혀 있던 나를 깨워준 것 같아요. 단단한 알을 깨고 나를 세상 밖으로 끄집어낸 거죠. 그제야 알았어요. 나는 대화하는 걸 좋아하고, 친구들이랑 어울리는 걸 즐기는, 사교적인 사람이었다는 걸요. 그렇게 나는 여러 명의 친구들이 생기기 시작했고, 재미있는 학과 생활을 했어요. 나는 평범한 대학 새내기였죠.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스물한두 살의 앳된 여학생.



지방에 있는, 서울과 두 시간 즈음 떨어진 대학을 다녔기 때문에 스쿨버스를 탔어야 했는데 바로 종착지가 사당역이었어요. 버스를 내리면 오후 6시에서 8시였는데, 저녁을 먹는 시간이었죠. 그럼 사당역에 사는 지예와 함께 맛있는 식당을 찾아다니거나 요리를 잘하는 지예가 해준 밥을 먹었죠. 먹는 걸 정말 좋아하던 그녀를 따라다니면서, 나도 맛집 탐방에 푹 빠지게 됐어요. 내 지갑 사정을 다 아는 지예가 골라준 곳들은 전부 가성비 맛집이었죠.


그중에서도 가장 기억에 남는 곳은 사당역의 한 삼겹살 집이었어요. 저녁 시간에는 무조건 한 시간은 줄 서서 기다려야 하는 곳이었는데, 냉동삼겹살 육천 원이면 배 터지게 먹을 수 있었어요. 지금도 영업하는 유명한 맛집인데, 그곳만 가면 자동으로 지예 생각이 나요. 그만큼, 정말 그만큼 자주 갔던 곳이에요. 그곳은 저만의 특별한 장소는 아니고, 저와 함께 대학시절을 함께 한 모두의 공간이었어요. 어떤 친구는 거기서 청첩장을 주고, 과거 저와 사귀던 친구들도 데리고 간 역사가 깊은 맛집이죠. 그곳에서 저는 처음 술을 마셨어요. 스무 살 때까지 술 한 잔 안 마셔본 천연기념물 같은 존재였던 내가, 삼겹살집에서 지예와 나란히 술을 마셨습니다.


"맛있는 거 먹는데 술이 빠지면 서운하잖아"라며 지예는 매번 술을 시켰죠.

초록색 병에서 회오리치며 따라지는 투명한 액체. 가족도 아닌 지예와 함께한, 내 생애 첫 술자리였어요.

"첫 잔은 무조건 원샷이야. 남기면 예의 아니지." 지예가 말했어요.


저는 지예가 채워주는 술잔을 원 없이 마셨죠. 불판에서 지글지글 익어가는 부추와 삼겹살. 그리고 그녀와 나누는 재밌는 이야기들. 단란하고 왁자지껄 시끄러웠던 그날의 분위기가 저는 아직도 생생해요. 그때 마셨던 소주는 진짜 달았습니다. 소주가 달면 취하는 날이라던데, 정말 그랬어요. 지예와 다양한 맛집을 돌아다녔고 나는 지예와 함께 술자리를 했죠. 나는 언제나 취했어요. 스무 살만 할 수 있는 고민들, 시시콜콜한 이야기들, 학과 얘기, 마음에 안 드는 친구들 이야기 등등. 다양한 이야기를 하면서 저는 그녀와 반년이라는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러면서 알게 된 게 있었어요. 지예의 주사가 꽤... 아니, 상당히 심하다는 것이요. 취하면 몸을 못 가누는 정도는 기본이고, 심하면 누군가랑 싸우기까지 했어요. 시간이 가면 갈수록, 솔직히 좀 힘들었어요. 그렇게 그녀와 함께하면 함께할수록 이해하기 힘들고 감당하기 버거울 때가 생겼습니다. 그렇게 저의 피로도는 쌓여갔고, 지예와의 술자리는 날이 가면 갈수록 없어졌어요.


그런데 처음에는요, 그냥 지예랑 술 마시는 것이, 같이 시간을 보내는 것 자체가 너무 좋았어요. 처음으로 나를 알아봐 준 사람. 처음으로 나를 위로해 준 사람. 그 사람과 나누는 한밤의 식사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따뜻했으니까요. 저녁시간 아빠가 언제 술에서 깰지 걱정을 하며 마음을 졸이던 저는 없었어요. 저는 새로 태어났으니까요.

이전 01화터닝 포인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