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 사랑하는 지예에게
서울에 자가가 있던 아빠.
하지만 저는 더는 그곳에서 살 수 없었죠.
친엄마인 엄마는 그 당시에 파주에 자리를 잡고 있었어요. 그래서 저는 파주에서 사당역까지 버스를 타고, 또 그곳에서 스쿨버스를 타야만 했어요. 멀미가 나다 못해 머리가 지끈거리는 긴 여정이었죠. 하루를 시작하기도 전에 이미 지쳐 있었어요. 그래도 이상하게 마음만은 편했습니다. 아빠의 집에서 눈치를 보며 살지 않아도 되었으니까요.
그렇게 거의 일 년 가까이, 저는 도로 위에서 시간을 버리며 살고 있었어요. 그러던 어느 날이었죠.
“월세는 반반하고 같이 살래?”
사당역 언덕배기에 있는 6평짜리 풀옵션 작은 원룸.
그곳에서 살던 지예가 저에게 그렇게 말했어요. 보증금을 백 원도 낼 수 없던 무일푼 대학생에게는 정말 고마운 제안이었죠.
그 여자를 고소하고 나서 갑작스럽게 엄마랑 같이 살게 된 상황이라, 그 당시 엄마 집에는 제 방이 없었어요. 워낙 작은 방 두 칸짜리 빌라였거든요. 혼자 쉴 수 있는 공간이 없었어요. 추운 마루 바닥에 두꺼운 이불을 깔고 잠을 자야 했고, 새벽 네 시가 되면 일어나 학교에 가야 했죠. 거실에서 숙식을 해결하다 보니, 학교를 안 가는 날에는 아침밥을 하러 나오는 엄마 덕에 강제 기상을 해야 했고요. 방 문제로 엄마와 동생과 줄기차게 싸웠던 시간들이 더 많았어요. 그 집은 제 숨 막히는 공간이었죠. 저만의 영역이 없다는 건, 저만의 마음을 둘 곳도 없다는 뜻이었으니까요.
그래서 스물한 살, 철없던 그때는 가족보다 지예와 함께 있는 게 더 좋았어요.
웃기게도 엄마와 동생과 함께 살던 그 작은 빌라 이름이 ‘우리 집’이었는데, 저에게 우리 집은 지예와 함께 살던 사당역 근처 6평짜리 원룸이었죠. 엄마는 제가 너무 스트레스를 받는 것 같다며 나가 살라고 했고, 월세를 도와주셨어요. 생활비까지는 힘들다며 미안하다고 하셨지만, 그마저도 감사했어요. 평일에는 맥도날드 알바를 했고, 주말에는 다시 파주로 돌아가 편의점 알바를 꽤 오랜 시간 했어요. 그렇게 해야지만 생활비와 용돈이 나왔거든요. 그 시절 제가 할 수 있었던 자유라고는 알바를 할 수 있는 자유뿐이었어요. 그래도 불만은 없었어요.
친구와 자취를 하는 것이 정말 인생 처음이었는데, 그 당시는 꽤나 만족스러웠어요. 부모님의 잔소리도, 자유롭게 생활할 수 있다는 게 너무 꿈만 같았죠. 세상 그 누구의 간섭도 없는, 오롯한 제 시간을 갖는다는 해방감이 느껴졌어요. 더군다나 지예와 같이 살게 돼서 제일 좋았던 건, 그녀와 먹었던 밥이에요. 늘 맛있었거든요.
그녀는 요리를 참 잘했어요. 지금 생각해 보면 어머니 음식 솜씨를 그대로 이어받은 것 같아요. 어머님을 한 번도 뵌 적은 없었지만, 스무 살 초반에 뭐든 뚝딱 만들어내는 걸 보니 보통은 아니었어요.
처음 그녀가 끓여준 건 돼지고기가 듬뿍 들어간 김치찌개였어요. 고기는 먼저 볶아야 한다면서, 김치는 꼭 익은 김치로 해야 한다면서요. 6평짜리 작은 주방에 서서 요리하던 그녀의 뒷모습이 아직도 떠올라요. 시큼한 김치찌개 냄새와 밥 짓는 냄새. 생각해 보면 그 원룸에서는 요리해서 먹고, 또 먹으면서 이야기만 했던 것 같아요. 그 냄새와 따뜻한 온기가 주는 안정감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었죠.
어느 일요일이었어요.
오랜만에 알바를 안 간 날이었는데, 도어록 비밀번호 누르는 소리가 들리더니 그녀가 들어왔어요. 그녀가 본가인 전주를 다녀오는 날이었죠.
“엄마 생신이라서 남은 것 좀 싸왔어.”
어머님 생신이라 전주를 다녀왔다는 그녀의 양손에는 먹을 게 한가득이었어요. 부모님이 음식을 바리바리 싸주신 것 같았죠. 누구 생일인지 모를 정도로 맛있어 보이는 음식들이었어요. 보자기를 풀자 잡채, 김치 등 갖가지 음식들이 네모난 락앤락 통에 담겨 있었어요. 냉장고에 음식을 넣어 정리하는 그녀를 보며 저도 옆에서 조금 거들었어요.
“이거 먹자.”
“이게 뭔데?”
“등갈비 립.”
그녀의 어머니가 포장해 주신 봉지를 뜯자, 붙어 있는 커다란 등갈비 뼈가 그대로 모습을 드러냈어요. 사실 저는 그때까지 등갈비를 한 번도 본 적이 없었어요. 패밀리 레스토랑 같은 데를 가본 적이 없었거든요. ‘립’이라는 음식도 처음이었고요.
12살 때, 부모님이 이혼하고 난 다음에 경제적인 이유로 아빠랑 살게 됐는데, 아빠는 고지식하고 융통성이 없는 사람이었어요. 밥만 먹으면 되지, 무슨 문화생활? 이라면서 의식주 이외의 그 어떤 자유도, 금전적인 도움도 없었어요. 스무 살이 넘도록 영화관에서 영화를 한 번도 본 적이 없을 정도였죠. 외식은 늘 돼지갈비였어요. 어쩌다 기분이 좋은 날에는 해물찜이었죠. 그래서 난생처음 본 등갈비는 더 낯설었어요.
“어머님한테 나도 생신 축하드린다고 전해줘.”
괜히 예의를 차려 그렇게 말했어요. 실제로도 너무 고마웠지만요.
그녀는 냉장고 정리를 마치고, 등갈비를 먹기 좋게 자른 뒤 다시 데웠어요. 폭립이라는 게 이런 거구나 싶었죠. 작은 상 위에 올라간 접시에서 등갈비가 삐져나올 만큼 양도 많았어요. 그때 먹었던 달달하면서 짭짤했던 등갈비 맛은 아직도 잊지 못해요. 그 이후로도 여러 번 먹어봤지만, 그때만큼은 아니었어요. 아마 좁아터진 사당역 6평짜리 원룸 바닥에 앉아 뜯어먹던 그날의 기억까지 같이 남아서 그런 것 같아요.
제가 평일에 맥도날드 알바를 할 때, 지예는 매운 갈비찜 가게에서 두 시간, 소곱창집에서 두 시간씩 알바를 했어요. 맥도드는 시간을 비교적 자유롭게 짤 수 있어서, 제가 없는 주말에는 가끔씩 더 나가기도 했고요. 지예는 부모님 지원을 받긴 했지만 씀씀이가 커서 알바를 해야 한다고 했어요. 남자친구도 있었으니 돈 나갈 데가 많았을 거예요. 제가 저녁 알바를 마치고 돌아오는 날에는 남은 너겟을 싸 오기도 했고, 우리는 그걸 나눠 먹었어요. 같이 살기 시작하고 나서는 서로 학교와 알바 때문에 서로 얼굴을 보는 둥 마는 둥 깊은 대화는 하지 못했죠. 피곤에 절어 침대에 쓰러지듯 눕는 그녀를 보는 날이 많았고, 저 역시 새벽에 알바가 끝나는 날이 잦았죠.
그러다 보니 집은 점점 엉망이 됐어요.
“진짜 너무 더럽다. 이제 청소해야 하지 않을까?”
침대에 엎드려 있던 그녀를 보며 그렇게 말했어요.
서로 치울 만큼은 치운다고 생각했지만, 학교와 알바를 병행하다 보니 집안일에는 자연스럽게 소홀해질 수밖에 없었어요. 6평짜리 좁은 공간은 깨끗할 때보다 더러울 때가 더 많았고요. 좁디좁은 그 공간, 스무 살짜리 여자 두 명이 살았으니 얼마나 정리를 못하고 살았을까요.
저는 예민한 편은 아니었지만, 바닥에 돌아다니는 수십 가닥의 긴 머리카락을 쓸어 담을 때면 이곳을 떠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도 다시 파주 집으로 돌아가고 싶지는 않아서 꾹 참았죠. 고마웠던 기억보다 쌓여가는 설거지와 정리되지 않은 물건들이 점점 더 크게 보이기 시작했어요. 기쁨보다 의무가 앞서기 시작한 거죠. 그럼에도 그 시절은, 좋았던 기억과 버거웠던 감정이 같은 방 안에 나란히 쌓여 있던 시간이었어요.
그러다 어느 순간부터,
그 방에서의 하루가 예전처럼 흘러가지 않기 시작했어요.
같이 살고 있다는 느낌보다는, 각자 피곤을 안고 같은 공간에 잠깐 머물다 가는 기분이 더 컸어요. 집에 들어오면 불은 켜져 있는데, 사람은 없는 것 같은 날들이 늘었죠. 집은 점점 더 어질러졌어요. 설거지는 하루 이틀 미뤄지는 게 당연해졌고, 바닥에는 긴 머리카락들이 눈에 띄게 늘어났어요. 저는 깔끔한 성격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무신경한 편도 아니었어요. 몇 주에 한 번쯤은 제대로 치우고 싶었고, 그럴 때마다 혼자 빗자루를 들었죠. 치우자고 말했지만 그녀는 피곤하다며 고개만 끄덕였고, 결국 그날도 제가 먼저 치웠어요. 말은 하지 않았지만, 설거지를 하면서 속으로 계속 계산을 하고 있었던 것 같아요. 오늘은 내가 했고, 어제도 내가 했고, 그저께도 내가 했다는 생각들요. 이해하려고 마음먹을수록, 억울함은 더 또렷해졌어요. 서로에게 익숙해진 만큼, 나만 희생하고 있다는 생각이 맴돌았죠.
물론 공평하지 않았던 건 아니에요.
우리 둘 다 치우지 않았던 날이 훨씬 많았죠.
다만 저는 ‘그래도 가끔은’이라는 마음이 있었고, 그녀는 ‘지금은 너무 피곤하다’는 쪽에 더 가까웠어요.
그 차이가 생각보다 컸어요. 그래도 그때까지는, 안 좋은 일보다 좋은 일을 더 많이 함께하고 있다고 저는 지예를 믿고 있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