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호등이 노란불에서 빨간불로

04. 사랑하는 지예에게

by 지수


지예와 나의 하루는 늘 비슷하게 시작했어요.

같은 장소에서 눈을 뜨고, 같은 장소에서 하루를 끝냈죠. 두꺼운 암막 커튼 탓에 아침에는 햇빛이 거의 들지 않았고, 오후가 돼서야 커튼 틈으로 희미한 빛이 들어왔어요. 그 빛이 바닥에 닿으면 먼지가 보였어요.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먼지였어요. 청소를 해야겠다는 생각은 늘 했지만, 꼭 그날은 아니어도 될 것 같았어요. 내일 해도 되고, 모레 해도 될 것 같았고, 그렇게 하루하루가 미뤄졌어요.


같이 살고 있다는 느낌은, 어느 순간부터 조금씩 흐려졌어요. 우리는 같은 방에 있었지만, 각자 다른 하루를 살고 있는 사람들 같았죠. 지예는 침대 위에 엎드린 채 휴대폰을 보고 있었고, 저는 싱크대 앞에 서서 물이 빠지지 않는 배수구를 보고 있었어요. 물은 천천히 고였고, 그걸 바라보는 동안 제 마음도 같이 가라앉았어요. 손을 뻗으면 닿을 거리에 있었지만, 그 거리만큼이나 마음도 가까운지는 잘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설거지는 하루 이틀 미뤄지는 게 자연스러워졌어요. 그릇 위에 겹겹이 쌓인 접시들을 볼 때마다, 이걸 치우는 사람이 항상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죠. 말을 꺼내면 분위기가 틀어질까 봐, 괜히 피곤한 사람 되는 것 같아서 저는 또 그냥 넘겼어요. 그날도 결국 혼자 치웠고, 물 묻은 손으로 창문을 열어 환기를 시켰어요. 창문을 열면 바깥에서 차 소리가 올라왔어요. 그 소리가 방 안을 채우는 동안, 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어요. 말하지 않는 게 익숙해지고 있다는 걸, 그때는 애써 모른 척했어요.


“진짜 이제 청소 좀 해야 하지 않을까.”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을 때, 지예는 또다시 몸을 뒤척이며 고개만 끄덕였어요. 그 반응이 달랐다고 말할 수는 없었지만, 왠지 그날은 그 끄덕임이 오래 남았어요. 대답을 들은 것 같지 않았거든요. 그래도 저는 대안이 없었어요. 이 공간은 사실상 지예가 저에게 내민 좋은 제안 같은 거였고, 저는 이곳을 떠나면 다시 파주로 돌아가야 했죠. ‘좋은 게 좋은 거지’라는 말로 스스로를 달래며, 저는 속으로 계속 괜찮다고 되뇌었어요. 지예와 나는, 아직은 같은 편이라고. 적어도 그렇게 믿고 싶었어요.


적어도 공모전 이야기를 할 때만큼은 그랬어요.

어느 교수님이 공모전에 작품을 출품하는 걸 과제로 내주셨고, 지예와 저는 밤늦게까지 노트북을 켜두고 스토리보드를 수정하곤 했죠. 배달로 시킨 치킨이 식어가는 것도 모른 채 화면만 바라보고 있었어요. 정말 열중했어요. 학과 전용 컴퓨터실에서 서로 아이디어를 던지고, 고개를 끄덕이고, 다시 고치고를 반복했죠.

저는 학과 생활에 꽤 충실한 편이었어요. 집안 사정이 넉넉하지 않아서 무조건 장학금을 받아야 했고, 그게 제가 마음 편하게 학교를 다닐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거든요. 그래서 더 열심히 했고, 그래서 더 절실했어요. 그렇게 입선 소식을 들었을 때, 우리는 정말 크게 소리를 질렀어요. 기뻐서였고, 동시에 서로의 고생을 너무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죠.


상금은 문화상품권 오만 원이었고, 지예는 반 땡이라고 말하며 웃었어요. 그 말 한마디에 그동안 묵혀 있던 감정들이 싹 내려가는 기분이 들었어요. 괜히 그날은, 처음 지예를 만났던 날로 다시 돌아간 것 같았어요. 아직 아무것도 어긋나지 않았던 시절로요.


지예를 알기 시작하고 어느새 일 년이라는 시간이 흘렀어요.

저는 2학년이 되었고, 그 사이 많은 것들이 변했죠. 지예가 예전만큼 제 우선순위의 1위는 아니었어요. 다른 친구를 통해 남자친구를 소개받았고, 그렇게 연애를 시작했어요. 제 주변은 점점 시끄러워졌고, 저는 하고 싶은 게 많아졌어요. 사교적이고, 열정적인 사람으로 변해가고 있었죠. 밤새 술을 마시고 클럽에 가는 것도 좋아했고, 동시에 학과에서 열심히 공부하고 좋은 성적을 내며 교수님에게 좋은 인상을 남기기도 했어요. 저는 여러 개의 저를 동시에 살아보고 있었던 것 같아요. 그 과정에서 저도 몰랐던 제 모습을 하나씩 알게 됐죠.


그러다 첫 연애가 끝났을 때, 저는 아무 생각도 하지 못한 채 울기만 했어요. 똑 부러지게 행동할 줄 알았던 저였지만, 막상 이별 앞에서는 마치 고장 난 사람처럼 무너졌어요. 밤에는 이불을 덮고 소리를 죽여 울었고, 낮에는 멀쩡한 척을 하다가도 갑자기 숨이 막히듯 눈물이 쏟아졌어요.


“야, 울음소리 너무 커.”


지예는 웃으면서 그렇게 말했어요. 농담이라는 걸 알았고, 웃어넘길 수 있을 만큼은 괜찮았어요. 그래도 그 말이 같이 살던 방 안에 남아서, 잠깐 공기의 결을 바꿔놓았다는 걸 저는 기억해요. 지예와 함께 갔던 부추 삼겹살집에서는 연기가 계속 위로 올라가 눈이 따가웠어요. 사실 연기 때문이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저는 고개를 숙인 채 울고 있었죠. 지예는 말없이 고기를 뒤집고 있었고, 불판 위에서 고기가 지글거리는 소리가 그날의 대화 전부였어요. 말이 없어도 괜찮은 사이인지, 아니면 말이 사라진 사이인지 헷갈리기 시작한 순간이었어요.


시간이 약이라는 말은 어느 정도 맞았어요. 연애의 후유증은 조금씩 옅어졌고, 울음도 줄어들었어요. 대신 지예와 저는 말하지 않는 시간에 더 익숙해졌죠. 같은 방에 있으면서도, 굳이 말을 하지 않아도 되는 사이가 된 건지, 아니면 말을 해야 할 타이밍을 놓쳐버린 건지 저는 계속 헷갈렸어요.


신호등이 노란불에서 빨간불로 넘어가듯, 우리 사이도 그렇게 멈춰 있었어요. 아직 끝났다고 말할 수는 없는데, 다시 돌아가기엔 이미 너무 멀어진 것 같은 상태. 손을 뻗으면 닿을 수는 있지만, 잡을 수는 없는 거리였어요.


지예의 친구가 집에 왔던 날, 제 물건이 아무 설명 없이 사용되고 있었고 지예는 그걸 굳이 설명하지 않았어요. 그 순간 저는 알았어요. 이 방에서 제가 차지하고 있던 자리가, 아주 조금씩 줄어들고 있었다는 걸요. 우리를 이어주던 것들이 하나씩 느슨해지고 있었고, 그걸 붙잡을 힘도, 말도 저는 이미 잃어가고 있었어요.

말은 줄어들었고, 고마움은 굳이 말하지 않아도 되는 게 됐고, 우리는 점점 각자의 쪽으로 방을 나눠 쓰는 사람들처럼 살았어요. 같은 공간에 있지만, 같은 방향을 보고 있지는 않았죠.


지금은 그 방도, 그 시간도 다 사라졌어요. 사당역 근처 6평짜리 원룸. 햇빛이 잘 들지 않던 방. 그래도 그 방 안에서 우리는 꽤 오래, 진짜처럼 살았어요. 서로를 붙잡고 있던 끈이 언제 끊어졌는지는 정확히 모르겠지만, 적어도 그 방을 나설 때쯤에는 이미 우리는 서로의 하루에서 조용히 빠져나온 뒤였어요.



이전 03화너의 나의 6평짜리 원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