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 사랑하는 지예에게
그렇게 또 2살을 더 먹었고, 지예와는 여전히 건조한 인연을 쌓고 있었어요.
자주 보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끊어진 사이도 아니었죠. 연락을 안 해도 이상하지 않고, 연락을 해도 어색하지 않은, 딱 그 정도의 거리였어요. 서로의 근황은 대충 알지만, 감정까지는 묻지 않는 사이. 우리는 그렇게, 무심하게 시간을 흘려보내고 있었어요. 그러다 정말 우연한 계기로 지예와 세부에 가게 됐어요.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왜 하필 그 여행이었는지도 잘 모르겠어요. 제가 첫 직장이나 다름없는 그 회사를 그만두고나서 시간이 많이 남았기도 했고, 해외를 너무 가보고 싶었던 탓인지 모르죠. 장소가 세부였던 데에는 큰 이유가 있었던 것도 아니고, 그저 가성비가 괜찮은 해외여행지라는 이유가 전부였어요. 조금은 설레고, 또 조금은 불안했죠. 그 시기의 저는 아마도, 지예와 다시 예전처럼 돌아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마음 한구석에 조심스럽게 올려두고 있었던 것 같아요. 확신은 없었고, 그렇다고 완전히 기대라고 부르기엔 애매한 감정이었어요.
여행은 생각보다 순조롭게 시작되지는 않았어요. 그래도 초반까지만 해도 괜찮았어요. 맛집이라고 미리 알아간 곳에서 머드크랩을 먹고, 고래상어를 보고, 정말 좋은 리조트에서 여유를 즐기며 지예와 꽤 재밌는 시간을 보냈어요. 살면서 두 번째 해외여행이었는데, 그걸 지예랑 가게 되다니 조금은 꿈만 같았죠. 혹시라도 여행 가서 싸우지는 않을까 걱정했는데, 우리는 의외로 잘 맞는 여행 메이트였어요. 적어도 그 전화가 오기 전까지는요.
여행 중에, 그 남자친구에게서 전화가 왔어요. 사실 그가 이제 나를 보며 웃지 않는 것 같다고, 그래서 너무 슬프다고 지예에게 먼저 말했었어요. 착각 아니냐고 묻는데, 저는 확신 없는 대답만 했죠. 그가 나를 이제 사랑하지 않는 것 같다고요. 전화기 너머에서 남자친구는, 아주 담담하게 헤어지자고 말했어요. 지금 생각해 보면 참 잔인한 타이밍이었어요. 비싼 돈을 주고 해외여행까지 와서 이별이라니요. 제가 포효하듯 울기 시작하자 지예는 화가 나서, 제 대신 남자친구에게 쏘아붙이듯 화를 내줬어요. 지금 생각해 보면 정말 고마운 일이죠. 그때의 저는 정말 제 감정밖에 보이지 않았어요. 울고, 또 울고, 숨이 막히는 것 같아서 제대로 말도 못 했고요.
그날 이후의 여행은 사진으로는 남아 있지만, 기억은 거의 남아 있지 않아요. 지예는 제 옆에 계속 있었어요. 저 대신 쉼 없이 그 남자를 욕해줬죠. 저는 그때 지예에게 어떤 말을 했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아요. 다만 분명한 건, 제가 울며불며 무너지는 동안 지예는 그 여행을 거의 즐기지 못했을 거라는 거예요. 그때는 제 슬픔이 너무 커서, 그 사실까지 생각할 여유가 없었어요. 지금 와서야 그게 계속 마음에 남아요.
출국하는 날까지도 정신이 하나도 없었어요. 세부 공항에서 세금을 내야 한다는 걸 몰라 현금이 부족했고, 그 자리에서 급하게 현금서비스를 받았어요. 카드를 쥔 손이 이상하게 떨렸던 기억이 나요. 지금 생각하면 웃길 수도 있지만, 그때의 저는 정말 작은 일 하나도 감당이 안 되는 상태였어요. 한국은 가야했고, 세금을 내어 겨우 비행기에 탑승했어요. 비행기 좌석에 앉자마자 또 눈물이 터져나왔죠. 그렇게 세부에서 인천공항을 가는 다섯시간이 넘는 시간동안 저는 울었어요. 저의 퉁퉁부은 얼굴을 보고 승무원이 괜찮냐고 물어볼 만큼 창가 자리에서 비련의 여주인공처럼 엉엉 울고 있었어요. 지예는 승무원에게 대신 괜찮다고 대답을 했죠. 저는 남들에게 피해를 줘서는 안되니깐 소리없이 울었어요. 그날 처음으로 소리 내어 운다는 게 어떤 건지 알게 됐어요. 정말 비참하고 비참했죠.
한국에 도착했을 때, 공항에는 우리 가족 모두가 나와 있었어요. 반가운 얼굴들, 익숙한 목소리들. 해외여행에서 이별을 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저를 지켜주러 와준 사람들이었어요. 그런데 지예는 혼자였어요. 그 장면이 유난히 또렷하게 남아 있어요. 그때 저는 지예를 먼저 보내고, 그다음에 가족에게 갔어야 했어요. 지금의 나라면 분명 그렇게 했을 거예요. 하지만 그때의 저는 너무 어렸고, 너무 둔했어요. 지예를 혼자 두지 말걸. 그 순간의 선택이 지금도 가끔 마음을 찌르듯 떠올라요. 그때 지예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었는지는 끝내 기억나지 않아요.
이상하게도 그 여행 기간 지예에게 위로를 받아서 그런지 다시 우리 둘이 다시 가까워진 것 같다는 착각이 들었어요. 같이 당황하고, 같이 해결하고, 같이 여행을 다녀오면서요. 적어도 저는 그랬어요. 지예도 같은 마음이었는지는, 아직도 잘 모르겠지만요. 그렇게 저는 다시 지예가 없는 삶이, 현실이 시작됐어요.
저는 제 커리어를 쌓는 데에 정신이 없었어요. 이커머스 온라인 MD가 되기 위해 정말 다양한 경험을 하던 시기였어요. 대기업에서 또 다른 대기업으로 옮기며, 이제는 배우는 사람보다는 일을 해내야 하는 사람이 되어 있었죠. 이직한 어떤 회사에서는 인정도 받았고, 승진도 천천히, 하지만 확실하게 하고 있었어요. 그 시기에는 지예를 떠올리는 날이 거의 없었어요. 그 과정에서 지예와는 서서히 또 연락을 하지 않게 됐어요. 일부러 멀어진 건 아니었어요. 그냥, 정말 바빴어요. 바쁘다는 이유 하나로 하루가 지나고, 며칠이 지나고, 그렇게 시간이 쌓였을 뿐이었죠. 돌아보면 우리는 늘 그런 식이었어요. 자주 안부를 묻지는 않지만, 유독 강하게 남는 시간만 함께 보내는 사이. 길게 이어지는 일상보다는, 한 번씩 임팩트 있는 순간만 공유하는 관계였던 것 같아요.그 시기에는 지예를 떠올리는 날이 거의 없었어요. 동료들과의 관계, 친구들과의 수다, 다음 여행 계획, 눈앞의 일들이 더 중요했거든요. 솔직히 말하면, 그때의 제 삶에서는 지예보다 그런 것들이 먼저였어요.
가끔 생각해 보면 정말 친했던 친구가 멀어진다는 게, 나이를 한 살 두 살 먹을수록 이상할 만큼 쉬워지는 것 같아요. 우리는 싸우기도 했고, 서로에게 상처를 주기도 했지만, 꼭 큰 사건이 없어도, 굳이 이유를 만들지 않아도 금방 멀어질 수 있더라고요. 그게 조금은 슬퍼요. 그래도 그게 어른이 되어간다는 증거라면, 받아들여야 하는 일이겠죠.
그 시절을 지나오며 저는 또 한 번, 아무 말 없이 조용히 저만의 시간을 오롯이 보내고 있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