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 사랑하는 지예에게
정말 바쁘게 지내서였을까요. 아니면 시간이 흘러 기억이 자연스럽게 옅어진 걸까요.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지예뿐만 아니라 많은 친구들과도 자주 만나지 못할 만큼 저는 꽤 바쁘게 살고 있었어요. 회사에서도 정말 많은 일들이 있었어요. 세상에는 생각보다 악질이고, 만만치 않은 사람들이 많다는 걸 그때 처음 제대로 알게 됐죠. 거래처가 사기를 치고도 그 책임을 제게 뒤집어씌우려 했던 적도 있었고, 밤을 새워야 할 만큼 업무량이 감당 안 되게 몰린 날들도 많았어요. 한 살, 두 살 나이를 먹어가며 책임져야 할 일들도 자연스럽게 늘어났고, 제 성격상 회사 일을 늘 제 일처럼 끌어안고 하는 편이라 늘 최선을 다했어요.
그렇게 열심히 살아도 삶이 극적으로 달라지진 않더라고요. 달라진 게 있다면 워라밸이 무너졌다는 것 정도였죠. 그래도 뿌리가 보이지 않는 곳에서 자양분을 먹고 자라듯, 이 시간들이 언젠가는 나에게 도움이 될 거라는 믿음 하나로 묵묵히 버텼어요. 돌아보면 저는 제 삶에 꽤 치열하게 치여 살고 있었어요. 그 사이 연애도 했고, 책도 읽고, 여행도 다녔어요. 회사 일이 힘들어 살이 많이 찌기도 했고, 다시 운동과 식단으로 빼보겠다고 애써보기도 했죠. 삶에는 크고 작은 이벤트들이 계속 생겼고, 저는 그것들을 즐기거나, 혹은 감당하면서 하루하루를 지나왔어요.
직장생활을 하며 제가 유일하게 꾸준히 붙잡고 있던 건 글쓰기였어요.
정확히 말하면 블로그였죠. 맛집 이야기도 쓰고, 일상도 기록하고, 연극이나 뮤지컬을 보고 느낀 것들을 적었어요. 일기장처럼, 제 행적을 차곡차곡 남겼어요. 힘들 때도, 슬플 때도, 기분 좋을 때도, 행복할 때도요. 감정을 쌓아두기보다는 글로 풀어내는 편이었어요. 그렇게 저는 나름 치열하게, 제 방식대로 살아가고 있었어요.
지예와는 정말 간간히 연락을 주고받았어요. 서로 바쁘지 않을 때, 안부를 묻는 정도로요. 강아지를 키운다는 이야기, 남자친구가 바뀌었다는 이야기, 알바를 하며 지낸다는 이야기. 게임을 좋아하던 친구답게 게임 BJ에 도전해보고 싶다는 말도 들었어요. 제 삶과는 조금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는 것 같았지만, 여전히 지예답다고 느꼈어요. 그래서 그냥, 잘 지내길 바랐어요. 그렇게 카톡을 주고받다가 만나자는 이야기가 나왔고, 약속을 잡았죠.
오랜만에 만난 지예는 안산 쪽에 산다고 했어요. 남자친구를 따라 그 근처로 이사를 갔다고요. 예전엔 집에 놀러 오라며 껄렁거리듯 늘 가볍게 넘기던 아이였는데, 그날은 조금 달랐어요. 어디에 산다는 말조차 조심스럽게 꺼내는 느낌이었죠. 그녀는 힘들다고 했어요. 그렇게 이야기를 하나둘씩 꺼내놓았죠. 그렇게 식당에서 그녀와 이야기를 하면서 저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습니다. 지예와 만나지 않던 시간 동안 지예에게는 안 좋은 일들이 쌓여있었어요.
지예의 전 남자친구는 정말 좋지 않은 사람이었어요. 경찰이 오고 갈 정도로 폭력적인 일들이 있었고, 그 과정이 결코 가볍지 않았다는 것도 뒤늦게 알게 됐어요. 자세한 이야기를 다 듣지 않아도, 굳이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어요. 그때의 지예는 많이 수척해 보였거든요. 말수도 줄어 있었고, 웃을 때도 예전처럼 편해 보이지 않았어요. 괜히 마음이 쓰였지만, 저는 더 깊게 캐묻지 않았어요. 어떤 일들은 말하는 것보다, 말하지 않는 쪽이 더 배려일 때도 있으니까요. 그저 잘 버텨줘서 고맙다는 마음으로, 지금은 조금이라도 괜찮아 보이는 게 다행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예는 여전히 지예였어요. 그녀는 나에게 괜찮다고 했죠. 그리고 그래 다행이라는 말을 했어요. 지예가 괜찮아진 건 정말 다행이니깐. 새로 생긴 중국인 남자친구는 성실한 사람이고 착한 사람이라고 하니 안심이 되더군요. 지예는 제 근황에 대해 물었어요.
제가 블로그를 쓴다고 하자 눈이 반짝였고, 본인도 해보고 싶다며 이것저것 물어봤죠. 그 순간만큼은 예전의 표정이 잠깐 돌아온 것 같았어요. 본인도 해보고 싶다며 이것저것 물어봐서, 아는 만큼 몇 가지 팁을 전해줬어요. 그때 지예는 한중 커플 이야기를 블로그에 써보고 싶다고 했죠. 저는 진심으로 응원하며 이것저것 블로그에 대해 이야기를 많이 나눴어요.
그 이후로 지예는 생각보다 꽤 열심히 블로그를 했어요.
처음엔 저에게 이것저것 물어보는 정도였는데, 어느 순간부터는 하루에 하나씩 글을 올리더라고요. 연애 이야기, 일상, 중국어 뜻에 대한 글, 안산 근처에서 먹은 음식, 중국인 남자친구와의 사소한 에피소드까지.
글에는 힘이 조금 들어가 있었지만, 그만큼 애써 살아가고 있다는 게 느껴졌어요. 답방을 가면 늘 새 글이 하나쯤 올라와 있었고, 댓글에도 성실하게 답을 달고 있었죠. 예전의 지예답게, 신이 나서 이것저것 열심히 하더라고요. 그녀는 본인의 관심사에 있는 것들은 끝까지 해내는 성격이니까요. 글을 쓰는 게 좋다고, 생각보다 재밌다고 말하는데, 그 말이 괜히 마음에 남았어요. 사실 지예는 직장생활이나 사회에 적응하는 데 어려움이 많았어요. 상사와의 관계를 견디기 힘들어했기도 하고, 부조리한 상황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했으며, 무엇보다 본래 고집이 강한 친구였거든요. 블로그는 아마 지예에게 그런 세상과 잠시 거리를 두고 숨 쉴 수 있는, 자신만의 공간이었을지도 모르겠어요.
우리는 그렇게 블로그 안에서만 간간히 마주쳤어요. 그리고 블로그를 쓰며 궁금했던 것들이 궁금해서 그전에 비해서는 연락을 자주 주고받았어요. 시시콜콜한 농담도 했죠. 서로의 일상을 전부 알지는 못해도, 최소한 잘 살아 있구나 정도는 확인할 수 있는 거리에서요. 예전처럼 깊게 얽히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사라지지도 않는 사이. 이십 대 후반. 그 정도의 연결이, 그때의 우리에게는 딱 맞았던 것 같아요.
그렇게 우리는 블로그라는, 의외의 연결점으로 다시 조금 이어졌어요.
가끔 답방을 하고, 가끔 서로의 글을 읽어주면서요. 예전처럼 깊게 얽히진 않았지만, 완전히 멀어지지도 않은 상태로. 그 정도의 거리에서, 우리는 또 한 번 조용히 이어지고 있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