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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abina Dec 17. 2021

어향 御香

엄마의 향기


[일러두기] 힐링 스페이스 BMW 벗들과 신춘문예 수필 응모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들에게 공모전 응모를 독려하고,  일정을 소화하는 순간순간마다 엄마의 향기가  그리워 써봅니다. 이 글에 우체국의 직인이 찍힐까요...





지지리 박복한 인생이라고 입에 거품을 물고 울었던 그날의 기억이 떠올랐다. 1.4후퇴 이야기를 하고 6.25 피란 이야기를 하면서 열한 살 때 시작한 수발이 끝나지도 않는다고 눈물을 보이는 노모에게서 젖비린내가 났다. 혈액에도 종양이 있을 수 있구나. 혈액 암을 앓고 계셨던 그때, 들어주기만 해도 살 수 있다는 심리학적 근거를 가지고 있었다. 상담사로 살아가면서 엄마는 살리고 싶었다. 가족력이라고 둘러대기엔 우리 집 가계보는 죽음의 내력이 깊다. 들어주고 싶었다. 대담한 것과 소심한 것의 차이를 나는 안다. 그녀의 인생은 잔잔한 바다에 희뿌연 연무가 지나가야 보이는 범선이었다. 세심한 마음으로 깊은 주름을 파헤치는 한숨을 제거해 드리자 노모의 혈액은 잔잔한 바다 위에 깨끗한 혈액을 뿜어냈다. 혈액 암이 완치되었다.



너를 용서하고 나를 안아주는 시간이 흐르면 오래된 나무에서 향기를 맡고 고개 숙인 풀숲에서 영화 (英華)를 보는 안목이 생긴다고 했다. 가끔 보는 노모에게서 기대했다. 여전히 향기롭고 여전히 영화롭기를. 하지만 그녀는 맑은 혈액을 얻는 대신 오래 머물다 지나가는 희뿌연 기억을 소유했다. 매일 무엇을 먹었는지 확인하고 오늘이 며칠인지 물어야 했다. 어제도 오늘도 노모는 미역국을 먹었다고 했다. 노모의 입에서 물 비린내가 났다. 그녀의 인생이 열일곱에 머물렀다. 노모는 그 남자가 첫사랑이라고 했다. 들어주고 싶었다. 노모의 기억이 현재에 머물고 미래의 기운을 가져올 수 있도록 노모의 머리에 내려앉은 연무를 거두어들이고 싶었다. 그녀는 지나가는 잘 생긴 남자를 보면 첫사랑이라고 했다. 노모의 침실에서 젓국 냄새가 났다. 어향(魚香)이다.



어느 날부터인가, 노모의 집에서 물 비린내가 나고 젓국 냄새가 났다. 밤새 남자를 위해 헌신하던 여인네의 땀 냄새가 집안 곳곳에 잠들어있었다. 피곤에 반쯤 묻힌 노모의 얼굴에는 범선을 움직이는 대담함은 없고 그윽이 바라보는 시선 끝에는 못다 이룬 그녀의 꿈이 보였다. 한 며칠 괜찮다가 꼭 삼 일씩 앓는다고 했다. 어디가 그렇게 아프냐고 물으면 가슴 언저리를 쓸어내렸다. 검버섯이 피어난 손등이 가슴을 쓸어내리면 내 마음에 독버섯이 자랐다. 노모를 두고 나오는 내 마음에는 검은색 버섯이 들어앉았다. 긴 한숨을 두고 나오는 짧은 걸음에 노모의 기억이 차오르는 순간이다.


"찬거리는 있냐?"


한쪽 발이 또 다른 한쪽 발보다 짧은 나는 인생의 굴곡만큼 기울었다. 오래 비어있던 나의 통장 잔고를 기억했나 보다.


기울어진 나의 오른쪽 호주머니에 파란 물색을 닮은 지폐 몇 장을 집어넣으며 말했다.


"굶지 말거라"



아, 위장 안에서 소화되지 못한 음식이 게어 져 나왔다. 목젖으로 눌러두었던 울음이 터져 나왔다.


"엄마, 혈액 암도 이겨냈잖아요. 기억을 해요! 첫사랑만 기억하지 말고 오늘 무엇을 먹었는지, 오늘이 며칠인지 기억하고 살라고요!"


노모의 눈이 커졌다. 그녀의 기억이 차오르는 순간이다. 장애인으로 만들어버려 죄의식이 가득한 인생에서 장애인 딸을 범선을 움직일만한 잔다르크로 키워낸 그녀의 기억이 차오르는 순간이다.


"오늘? 수요일이잖아!. 오늘, 뭇국 먹었어! 난 막내 네가 우는 게 싫다. 알았다 알았어... 오늘 수요일이야. 엄마 오늘 뭇국 먹었다고..."



불 꺼진 방으로 들어가는 사람들은 안다. 손이 시리고 무릎이 얼얼한 사람은 안다. 노모의 수요일과 노모의 뭇국은 노모가 더 살아갈 힘이라는 것을 안다. 오래된 나무에게서 향기가 나기 시작했다. 노모의 얼굴에서 영화(英華)가 보이기 시작했다. 노모의 찬거리에서 향이 났다. 노모의 좁은 복도가 소란하고 밝았다. 잘 살아야 하는 이유가 노모가 싸준 찬거리의 개수보다 많아졌다. 물불을 가리지 않고 전진할 수 있는 힘이 남아돌아 싸. 그것이 물광(光)이 되고 불광(光)이 된다면 노모는 오늘이 목요일이고 금요일인 것을 알 테다. 울음기 사라진 빛나는 나의 얼굴을 보고 노모는 변했다.


"오늘은 토요일? 막내랑 함께 자는 날!"



노모를 안고 잠든 날, 이른 아침 노모의 침실에 햇살이 먼저와 반기고 노모의 늘어진 살갗 위에 코를 킁킁거리면 꿉꿉하고 눅눅한 비린내 대신에 찬 거리를 살 수 있고 파란색 지폐를 용돈으로 턱턱 주고 기울어진 몸을 바르게 일으켜 세우는 향기가 났다. 큰 선비의 냄새가 났다. 졸음이 반쯤 걸친 나의 눈이 스르르 감긴다. 좋은 냄새, 어향이다. 임금이 제사를 지낼 때 하사하는 향, 어향(御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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