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가며

Prologue. 사물이 말을 걸어오다.

by Sabina

사람에게는 다섯 가지의 감각이 있습니다.

움직임이 불편한 저에게는 사람의 움직임을 알아채는 시각 대신, 듣기만 해도 누구인지 알아내는 청각이 발달했습니다. 그리고 다리가 불편한 지체장애인 저에게 특별한 감각이 추가됩니다.

앉아서 지켜보는 느린 감각, 한참을 지켜보고 알아내는 혜안이 있습니다.


-부끄러워서 커튼 뒤에 숨는 아이

-드러내고 싶어서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기는 아가씨

-다이어트하는 딸에게 맛있는 음식을 만들었다고 국자를 들고 위협하는 엄마

-조수석에서는 멀미하는데 운전만 하면 멀쩡한 딸에게 차 키를 선물하는 엄마


커튼과, 머리카락, 국자와, 차키가 글에서 날아다닙니다.

그렇게 움직일 수 없는 저는 사물을 바라보는 조금은 특별한 혜안이 있습니다.

그 혜안이 깊어져 고개 숙인 사람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아픈 그림자를 눈물로 꺼내는 방법이 슬픈 드라마를 보고서야 우는, 아직은 감정표현에 서툰 사람들, 그들을 위로하는 상담사가 되었습니다.


상담을 하면서 들었던 은밀한 이야기가 책으로 나올 때, 특별한 상담을 하고 있는 딸에게 엄마는 말했습니다.

-왜, 너의 책에는 엄마 이야기가 없니?

어린 시절, 장애인 딸이 수치스러워 창고에 가둔 엄마가 미워서 라고 말하지 못했습니다.

사실은 엄마 이야기만 하면 목구멍까지 눈물이 차오르기 때문이라고 말하지 못했습니다.

그냥 엄마가 좋은데 표현하지 못하는 딸이 엄마의 사물만 보이고, 사람들의 사물이 보인다고 말하지 못했습니다. 결국, 내가 바라보는 특별한 사물을 글로 풀었습니다.


방사선 치료하느라 빠진 머리카락을 가린 예쁜 모자, 장애인 딸을 위해 음식을 준비하는 둔탁한 도마와 맞물리는 경쾌한 칼, 그리고 누군가의 삶의 애환이 녹아있는 사물들...

그의 사물, 그녀의 사물이 이 책에 녹아있습니다.





상처 받은 외톨이의 분노가 시대상을 반영하는 책을 읽고, 스스로를 추방해서 혼자만의 실존을 꿈꾸고 있는 작가에게 위로를 받으면서도 사물이 말을 걸어오는 순간, 사실은 겁이 났습니다.

가족의 충실한 부양자가 아버지가 아니고, 남편이 아니었기에, 타인들과 교섭에서 심리적 장애를 일으키며 웃는 얼굴로 살다가 혼자 있을 때 사물과 대화할 수밖에 없는 사람이 저였기에 사실은 겁이 났습니다.


사르트르는 [구토]에서 로캉댕의 행위를 묘사했습니다.

어느 날 로캉댕이 친구와 악수하다가 그 친구가 뚱뚱한 벌레처럼 느껴져 몸서리를 쳤다고, 문의 손잡이를 잡다가 손잡이가 인격을 가진 그 무엇으로 다가오자 공포감을 느꼈다고, 사람이 곤충이 되고 사물이 말을 걸어올 때로캉댕이 구토하듯 토해냅니다. “무기력한 세계의 가장자리에서 해파리의 수준으로(...) 멋대로 고동치고 자라나는 무미건조한 육체(...) 나는 이 저열한 혼란을 증오한다.(...) 나는 이 구역질 나고 부조리한 존재에 대한 분노로 숨이 막힌다”

사르트르도 사물과 대화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말하지 못하는 사물이 어떻게 말을 걸어왔을까요?


상담사로 누군가를 위로하고 치유하는 직업을 가진 제가, 알베르 까뮈의 [이방인]에 등장하는 외톨이들과 장 샤르트르의 [구토]에서 만난 로캉댕과 [변신]에서 만난 그레고르에게 감정이 이입되는 날, 돌아보니 저는 혼자였습니다.

바스락 거리는 나뭇잎 소리가 고양이가 지나간 흔적인지 바람의 소리에 흔들리는 나약한 나뭇잎이 부서지는 건지 확인하고 싶지만 나갈 수가 없었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나뭇잎의 바스락 거리는 소리가 너무 궁금한 날, 사물과 대화하고 아픈 가족의 이야기와 아픈 사람들의 이야기를 글로 풀어내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때서야 창문을 열어 봅니다. 나뭇잎을 이불 삼아 뒹굴고 있는 고양이를 발견합니다.

낡은 주택 옥상에서 나뭇잎을 밟고 있는 고양이의 배가 불룩합니다. 임신한 어미 고양이는 나뭇잎 위에서 몸을 구르고 있습니다.

바스락 거리는 소리는 고양이의 몸짓이 만들어 낸 따뜻한 소리였습니다. 알고 보면 세상은 따뜻합니다. 그래서 제 이야기는 해피엔딩입니다.


몇 장의 나뭇잎이 참 고마운 날입니다. 오늘도 사물이 말을 걸어옵니다.


-70년 묵은 목조 주택에서 사비나 황정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