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장폴 사르트르 『말』
드라마와 소설을 좋아한다는 사람들의 공통점이 있다.
보지도 않는 텔레비전을 켜 놓고 세탁기를 돌리고, 밥을 먹고, 청소를 한다는 사람들의 공통점이 있다.
아무도 없는 공간에서 자신에게 도란도란 말을 걸어주는 것, 그러다 재방송되는 드라마가 미쳐 보지 못하고 놓쳤던 드라마라면 돌리던 청소기를 내려놓고, 텔레비전 앞에서 넋 놓고 빠져들어 가는 것.
박 완서를 사랑한다는 그녀들이 데미안을 읽고 있다고 하는 것, 고만 고만한 삶이 녹아들어 간 소설을 읽으면서 나름 나름 자기의 삶을 대비하던 그녀들이 조금 복잡해진 사연이라도 있으면, 보기에도 어렵다는 문학책을 본다는 것, 도통 무슨 말인지 모르는 문학책에서 내 이야기와 닮은 문장이라도 발견하면 빨간 줄 파란 줄 그어가며 나 같은 소시민이 책을 쓴 저자의 삶과 똑같아서 위안을 받는다는 것이다.
내가 그렇다.
장폴 사르트르 『말』을 읽을 때 그랬다.
"주님이시여, 제가 그렇게 하찮은 인간이라면 어찌 책을 낼 수가 있겠습니까?" "정진을 거듭하면 된다.""그러면 아무나 글을 쓸 수가 있는 것입니까?""아무나 쓸 수 있다. 그렇지만 나는 너를 선택했다" 이런 수작은 매우 편리한 것이었다. 자기가 하찮은 존재라고 인정하면서도 미래의 걸작의 작가라는 긍지를 동시에 가질 수 있게 되었으니 말이다. 장폴 사르트르 『말』
책을 출간하고 코로나가 터지면서 작가라는 명예로운 지위가 백수라는 이미지로 변질되고 여유로운 일과가 한가하냐는 질문으로 탈바꿈할 때, 고민했다.
혼자 사는 것이 외로워 애완견 백설이를 내가 기른다고 할 때 [강아지 기르는데 돈 많이 들어간다]며 알고 있는 상식으로 뒤통수에 직설적 표현 날릴 때, 고민했다.
재능을 기부하다가 받는 아르바이트 푼 돈이 커피 값으로 없어질 때, 넉넉한 보수 약속하면서 아이들의 선생님으로 초빙할 때, 나는 엄청 고민했다.
그때 나는 장폴 사르트르와 조우했다. 하나님이 나를 작가로 선택했으니 하찮은 존재인 내가 미래의 걸작의 작가라는 긍지를 가져도 되겠냐는 문장이 얼마나 내 이야기 같은지...
그래서 요새도 울적한 날이면 이렇게 자문해 본다. 내가 그토록 많은 종잇장에 잉크 칠을 하고 아무도 원치 않는 숱한 책을 시장에 내놓으면서 밤낮으로 허구한 날을 보낸 것은 오직 할아버지의 환심을 사려는 주책없는 욕망 때문이 아니었을까? 그렇다면 터무니없는 희극 이리라. 장폴 사르트르 『말』
아버지를 두 살에 여의고 외갓집에서 성장한 사르트르는 문학적 교양을 최고의 정신적 작업으로 알고 문학교수가 되려고 했던 할아버지 서재에서 세상의 이치를 배웠다. 사르트르가 출간한 책이 할아버지에게는 양서(良書)가 아니었으므로 사르트르는 인정받고 싶어서 고뇌했으리라.
책을 출간하고 코로나가 더 기세 등등할 때, 나는 소설을 썼다.
나를 이해하는 폭이 내가 쓴 소설을 어서 읽고 싶다고 고백하는 블로그 지인보다 못 한 가족에게는 내가 쓴 소설이 양서(良書)는 아니었으리라.
두 달 만에 소설을 응모하고, 다시 에세이를 쓸 때, 한 권의 책이 돈만 주면 만들어주는 것 아니냐고 반문하는 지인에게 밤낮으로 글을 쓰고 있는 나는 울적했다.
그때, 장폴 사르트르 『말』을 만났다.
데미안보다 싱클레어가 가지고 있는 나약하고 비겁한 행동에 동일시하고, [한 겨울에야 내 안에 여름이 도사리고 있다]는 <<이방인>>의 문장이 코트 깃을 세운 알베르 까뮈의 날카로운 시선과 맞물리면서 나는 세계문학전집을 닥치는 대로 읽었다.
언제였을까? 이름도 생소한 작가들의 문장이 내 안에서 살아나고 데생 연필을 잡고 그림 그리 듯 밑줄을 치게 된 것이.
사르트르는 외할아버지의 서재에서 [말]을 배웠다. 어린 사르트르는 사물을 접하고 말을 배우는 일반적인 경우와 달리 책 속의 원숭이와 사람을 진짜로 여기고 현실 속의 사물은 원형을 모조하는 작품에 불과했다고 말하고 있다.
초등학교 6학년, 방 한 칸에 딸린 경사 높은 다락방에서 나와 닮은 장애인이 두고 간 수많은 문학책은 걸어야 보이고 뛰어야 보이고 여행을 가야 보이는 사물을 대신 설명해주었다.
책 속에 그려져 있는 삽화에서 삐걱거리는 소리를 고함으로 이해하고 주인공의 가슴 에는 듯한 슬픔과 인생의 전락을 오롯이 느낄 때 사르트르는 마지막 책장을 덮으면서 할아버지에게 털어놓았다.
"이 책은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일까? 이 책을 쓴 사람은 누구일까? 왜 이렇게 썼을까?"
어린 사르트르가 품은 의심을 제대로 설명해 준 할아버지의 사유는 깊은 흔적을 남긴 사르트르의 수많은 작품이 되었다.
나는 4B연필을 쿼터 칼로 아주 길게 깎았다. 이 책에 그림그리듯 줄을 그어야했다.
서사적으로 풀어 내려간 어쩌면 [읽기]와 [쓰기] 단 두 개의 챕터밖에 없어서 난해한 책, 이 책에서 나를 발견할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아마 나는, 이 책을 통해 다시 [말]을 배우게 될 것이다.
"가갸거겨, 나냐너녀, 아야어여."
사르트르는 다소 도발적인 제목으로 나를 유혹했다.
이제 막 걸음마를 배우고 아빠보다 엄마라는 말을 더 많이 하는 그 흔한 유년기조차 없는 내게 자기가 살아온 인생이 너와 다를 바 없다고 [말]하며 단 하나의 글자로 나를 도발했다.
낯선 용어 가득하고 이름조차 생소한 가계도에 취향 여부 따지면서 자기 책을 읽지 않을까, 사르트르는 [말]이라는 작가의 필수 용어로 나를 도발한 것이다.
[읽기]에서 책을 접하고 [쓰기]에서 작가로 살아가는 그의 삶이 풍경화처럼 그려지고 제대로 이해되니 모든 문장마다 4B연필 채색된 것이 어디쯤이었나?
나는 책에 둘러싸여서 인생의 첫걸음을 내디뎠으며, 죽을 때도 필경 그렇게 죽게 되리라. 할아버지의 서재는 도처에 책이었다. 그는 일 년에 한 번, 즉 10월에 신학년이 시작되기 직전이 아니면 서재의 먼지도 털지 못하게 했다. 나는 아직 글을 읽을 줄 몰랐는데도 이 선돌(立石)을 존경했다. 꼿꼿이 서 있는 것, 비스듬히 누운 것, 벽돌장 모양의 서가에 촘촘히 꽂힌 것, 선돌들의 행렬처럼 간격을 두고 고상하게 놓인 것... 장 폴 사르트르『말』
궁핍이 결핍이 되어버린 어린 시절, 나의 소원은 아파트에서 살아 보는 것인데,
55평 아파트 호사스럽게 누려보고 나니 나의 소원은 제대로 된 서재를 갖고 싶었다.
계단 경사가 높아서 다락도 에베레스트 산처럼 올라갔으면서 서재 층고가 높아 맨 꼭대기 책은 사다리를 놓아야 올라갈 수 있는 허영 가득한 서재를 갖고 싶었다.
궁핍이 해결되고 결핍 따위 날 선 자존감에게 무너지면서, 책의 양으로 부를 드러내고 서재의 규모로 지식을 드러내는 허영이 가라앉는 시기가 찾아왔다.
책상 위에 책이 널브러져 있고 화장실에 몇 권의 책이 놓여 있고 밥을 먹으면서 책을 읽으면, 사람 그리워서 켰던 텔레비전 위에는 먼지가 자욱했다.
1층 카페에서 갓 구운 버터 스콘이 올라오고, 따뜻한 에스프레소가 하얀 머그 컵에 따라올 때, 잘 살아서 누리는 환경이 감사하다는 기도가 절로 나오는데, 책을 읽다보면 스콘은 굳어가고 글을 쓰다보면 커피는 식어 갔다.
작가가 그렇다.
낡은 문학전집 종이 위에 프린트 향기가 에스프레소 향기보다 낫고.
가을 벤치 위에 바스락 거리는 낙엽 몇 장 깔고 앉아서 듣고 있는 아주 쓸쓸한 음악이 글을 쓰게 하고.
노트북 화면 커서 위로 나의 글자가 날아다니고.
인용할 문장 가득한 책에서 밑줄이 가득한 문장들을 내 글자위에 덧 입혀 놓으니
작가의 사물은 책이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사르트르가 강조하지 않아도 플라톤의 이상적인 현실이 세상에 없어서 [구토]할 것이고, 사르트르가 강조하지 않아도 '나'라는 [말]은 '글을 쓰는 나'라고 말할 것이다.
바란다면 펜이 검(劍)이 되어 환경과 취향과 습관에 굴복하지 않고 글을 쓰며 그 글이 무력한 싱클레어가 알을 깨는 데미안이 되기를 소망한다.
이렇게 책이 좋은 날, 나는 글을 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