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특한 시점, 여름

민소매, 나시가 말을 걸어오다.

by Sabina

한 달 수입 2천만원을 찍었다.

통장 잔고 확인할 겨를 없이, 아이들을 가르치고, 밤을 새우고, 학교마다 다른 기말고사를 마무리하면

일주일의 휴가가 주어지는데

뼛속까지 거지근성 가득한 가난 세포를 가진 나는 통장을 보고 그제야 에어컨을 켰다.


아버지가 백수여서 갈치조림 반찬은 숨겨두었다가 오빠들만 먹일 때 입안 가득 맨 밥을 욱여넣으며 울었던 기억이 남아 있고, 남편이 백수인데 장애인이 할 수 있는 일은 제약이 많은 현실이 있어, 나는 에어컨을 켜지 않았다. 혼자 지내면 선풍기를 틀었다. 8월의 뜨거운 온도 감당 못할 때 습관적으로 통장을 확인했다.

돌고 도는 돈의 속성을 이해하고 돈을 인격적으로 대우해야 내 것이 된다는 자기 계발 책을 너무 늦게 읽었다.

습관적으로 통장이 부풀어 있어야 에어컨을 켰다.


빌딩 숲 우거진 화려한 도시에서 나는 화려한 인테리어를 가장한 거지였다.

전기세 아끼느라 에어컨을 끄고 선풍기에서 뜨거운 바람까지 몰아세우면 자연스럽게 옷을 한 폴 한 폴 벗어젖힌다. 생각은 여배우가 가벼운 옷을 부드럽게 한 폴씩 가볍게 벗어젖히는 느낌으로 얇은 카디건을 벗어서 던진다. 기말고사 시험이 끝나면 주어지는 아이들 없는 일주일 휴가, 나풀대는 카디건을 벗어젖히고 나는 팔 뚝 드러난 민소매 옷만 입었다.

출처;notefolio

황해도 해주에서 태어난 엄마는 거친 입담이 지나쳐 욕을 해도 무방하다는 자신감 가득한 여성인데, 엄마는 말했다.

-막내야 에어컨 켜라, 덥다.

-전기세 아까워요.

-엄마가 덥다.

-엄마 방에 에어컨 있잖아요.

-너는 안 덥냐?

-나시 입었잖아요.

-육x럴,...내 딸이지만 참, 얼렁 옷 입어라.

순화해서 쓴다고 감정을 전달할 수 없으니, 이렇게 이해하면 된다.

무슨 자신감으로 팔뚝을 드러낸 나시를 입었냐, 에어컨 틀고 시원한 공간에서 제대로 옷 입어라... 이런 뉘앙스다. 너무 더워서 불쾌지수 올라 간 날은 싸움으로 번지기도 했다.

-목발 짚어서 팔뚝이 굵어진 거잖아요! 집에서도 나시를 못 입어요?

-돈 벌어서 땅에 묻어 둘 거냐? 먹는 것은 안 아끼면서 너는 왜 전기세를 아끼냐?


민소매가 문제였을까? 팔뚝 살이 문제였을까? 매년 1학기 기말고사가 끝나는 8월이면 나는 에어컨을 껐고 엄마는 화를 냈다.


태양이 붉은빛을 토해내는 부산 앞바다에서 첫사랑을 만났다. 뜨거운 태양이 으스러지는 노을이 지는 시간에 모래 바닥에서 무용지물인 목발이 기울어질 때 첫사랑은 나를 업었다.

무대 조명처럼 태양이 우리를 비추고 기타 반주에 노래를 부르던 교회 청년들이 부러운 눈으로 나를 볼 때, 그녀들은 민소매였고 나는 두꺼운 팔뚝 가리는 긴소매였다.


나의 여름은 뜨거웠고

나는 민소매를 단 한 번도 입은 적이 없다.


그런 내가 집에서 편하게 입겠다는 옷이 나시 아닌가?

아이들이 없는 날, 꺼진 에어컨 앞에서 뜨거운 선풍기 바람을 맞으며 반항하듯 전라의 몸으로 앉아있는데 엄마가 화해를 요청했다.

나시인 듯 나시 아닌 애매한 원피스를 건네주며 제대로 옷을 갖춰 입으라고 충고할 때, 선물처럼 거실 에어컨을 켰다. 엄마는 그때부터 여름만 되면 팔뚝살 반쯤 가려진 나시인 듯 나시 아닌 원피스를 사다 주셨다.


선물처럼 에어컨을 켜기를 바랐을까? 어릴 때 못 해준 자식사랑을 이제라도 해주며 화해하고 싶었을까?

여름만 되면 모양이 고만 고만한 원피스가 옷장에 쌓여갔다.


아이들을 가르치지 않고, 민 소매 가득한 옷만 골라 여름을 보내도 되는 은밀한 상담실에서 사는데도 엄마는 원피스를 사 왔다.

-엄마, 이제 그만 사 오세요. 원피스 많잖아...

-엄마 딸이 예쁜 옷을 입었으면 좋겠는데, 옷 고를 때마다 힘들어...

-그니까 사 오지 말라고.

-너는 피부가 하야니 나시를 입으면 이쁜데, 팔뚝이 문제야. 옷고를 때마다 힘들어..

-그니까 사 오지 말라고요. 누가 사 오래?


1년 전, [네가 무엇을 하든 누가 뭐라 하든 나는 네가 옳다]에서 엄마가 차려주는 반찬 앞에서 나는 시를 썼다.

두꺼운 내 팔뚝을 잘라서라도 엄마의 팔뚝 낫게 하고 싶은 철든 딸이 되어 시를 토해 냈는데. 또 잊은 거다.


10첩 반상

엄마
오늘은 10첩 반상이네요
넌 남과 다르다고
기운 내라고 차려주신
10첩 반상 앞에

울음이 차올라
물을 벌컥벌컥
마셔요.

왜 벌써부터 물을 마시냐.
배부르게

엄마의 사랑이 담긴 핀잔 앞에
엄마의 앙상한 팔이 보여요

혈액에 생긴 종양이
엄마의 살을
다 앗아갔네요.

뼈밖에 안 남은 앙상한 팔이
이거 먹어라 저거 먹어라
10첩 반상 위로 날아다녀요

목발로 다져진 내 팔의 살을
도마 위에 놓고 썰어 버리고 싶어요.

그렇게 해서라도
엄마의 앙상한 팔이
다시 살아날 수만 있다면.

할 수 있는 게 없는 저는
다시
물을 벌컥벌컥
마셔요.


엄마의 사족이 문제일까? 여전히 굵은 내 팔뚝이 문제일까?

엄마와 물리적으로 독립하니 시를 토하듯 엄마를 걱정했던 그때를 잊은 거다.

민소매를 속되게 부른다는 나시가 미워졌다.


-나는 이제 안 맞으니까 엄마가 입어요.

-엄마도 팔뚝이 얇아져서 나시 어울리지 않는다.

-그니까 나시 옷은 사지 말자고요!


모녀의 대화는 아픈 이야기가 나와야 멈춘다. 예쁜 나시 원피스 사 주는 엄마의 마음을 알고 있는데도 못을 꺼내 대 못으로 만들어 엄마 가슴에 던지고 나야 선물처럼 에어컨을 켰다.

말이 없어진 엄마 앞에서 입지도 않은 원피스를 옷장 옆으로 정리하면서 말했다.

-으그 나시야 네가 문제야! 이 놈의 나시들.

속된 나시에게 투사를 해야 엄마에게 덜 미안했다.

-엄마, 이 원피스는 나시인 듯 나시가 아니네. 입어볼게!

입어보고 뽐을 내야 엄마에게 덜 미안했다. 어울렸나 보다. 엄마가 되찾은 미소가 말한다.

-막내야. 이번 원피스는 잘 어울리네.

-그치? 이번 민소매 원피스는 예쁘네. 잘 골랐네 엄마!


나시가 민소매가 되어 제대로 격을 갖추는 그 공간은 2시간이 넘게 에어컨이 켜 있었다. 선물처럼.





버나드 쇼는 비참한 사람이란, 자신이 행복한지 불행한지를 생각할 여유가 있는 사람이고 했다.

엄마를 생각하면 마늘 가득 들어간 알리오 올리오 앞에서 눈이 풀린 채 포크로 마늘을 짓이기게 되고

엄마를 생각하면 숨 막히게 아름다운 경치에도 한숨을 토해내니 운전을 할 수가 없는데,

나는 비참했나 보다.

아이들을 가르치지 않고 시간이 많아지고 생각할 여유가 있으니 사물이 대화를 걸어오고, 그 사물들이

가족을 그리게 하고, 나를 돌아보게 하고, 자꾸 엄마가 떠오른다,

어느 시인은 고요한 시간, 바라보고 있는 사물마다 말을 걸어서 힘들다고 했다.

시선을 바꿔 바다를 가도 그 바다가 뽕짝이 된다고 했다.


나이가 차고, 혼자가 되고, 시간이 있으니 내가 보고 있는 민소매 원피스가 뽕짝이 되었다.

누구나 다 아픈 과거 하나쯤 있으니 내 이야기를 신파로 뽑아내기 싫었다. 그렇게 슬픈 글은 쓰지 않겠다고 했던 나는 쓰다 보면 슬프고 쓰다 보면 뽕짝이 된 글 앞에서 울고 있었다. 변방 술집에서 귀신처럼 조용히 맥주 한 캔 마시고 내 삶은 신파가 아니라고 읊조리다, 엄마에게 전화가 오면 조명이 켜지듯 잘 살고 있다고 소리치고 있는 뽕짝 같은 삶이 내 앞에 있었다.


엄마가 쓰던 식칼이 녹슬고, 다 빠진 머리 가리려고 샀던 엄마의 꽃모자가 내게 오고, 엄마가 사준 옷이 잔뜩인데, 엄마 이야기 [샘터]에 실리고 예쁘게 찍어달라고 해맑게 웃었던 엄마가 잡지책에서 나를 보고 웃고 있는데, 도대체 언제까지 나는 비참할까. 내가 행복한지 불행한지 생각할 여유가 있어서 기억이 추억이 되고 상처가 아물고 흉터가 희미해져 가는데 도대체 나는 언제까지 비참할까. 다시 예전처럼 생각할 겨를 없이 일만 하고 그래서 행복한지 불행한지를 모르겠다고 말하면 자기 말을 제대로 이해 못 했다고 버나드 쇼는 냉소적 비판을 할까?


시간이 남으면 표백제 털어 빨래를 하고 시간이 남으면 뽀득뽀득 잘 마른 수건 한 장 한 장 개는데, 오늘은 시간이 더 남는다.

여름 내 입었던 원피스를 세탁소에서 찾아와 옷장 구석으로 밀어 넣는데 나시인 듯 나시 아닌 민소매 원피스가 말을 걸어온다.

“옷장 정리하고 글을 써야겠다, 옷장 정리하고 그림을 그려야겠다, 옷장 정리하고 상담해야지” 래퍼 지코처럼 [아무 노래]나 부르고 있는 내게 민소매가 말을 걸어온다.


작가가 되어서 글로 승화하고, 상담사가 되어서 위로하는 삶이 행복하다고 말하는 내게 민소매가 조용히 묻는다.

당신의 상처는 안녕한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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