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특한 시점, 봄

꽃 모자가 말을 걸어오다.

by Sabina

-엄마, 살이 빠지면 두상도 작아지나? 엄마는 모자가 잘 어울리는데, 나는 모자를 쓰면 얼굴이 더 커 보여...


매년, 3월이면 엄마가 가입한 동네 친구 모임, 식당 고기 대 주던 정육점 계모임, 주방 아줌마 모임, 고스톱 모임,

그 다양한 곳에서 엄마를 찾는다.

혈액암 방사선 치료로 빠진 머리를 가리려고 샀던 엄마의 꽃 모자가 행거에서 방바닥에 일렬로 늘어서 있다. 선택받은 로또 공처럼 엄마 손에 들렸다 내려지곤 했다.

-막내야 어떤 게 잘 어울리냐? 4월이면 덥겠지? 머리도 땀이 찰 거야.

초록색 망사를 뒤집어쓴 꽃 모자는 탈락이다.

-이 꽃은 촌시럽다.

분홍 꽃이 덕지덕지 붙어있는 꽃 모자도 탈락이다.

-엄마! 다 잘 어울려, 두상이 작으니까 모자가 너무 잘 어울려. 다 예쁘네~


엄마의 4월은 남편 없어도 친구가 많다고 자랑하는 계절이고, 나의 4월은 그늘이 사라진 해맑은 엄마의 얼굴을 보는 봄이다.

난 4월이 좋았다. 그렇게.


엄마 나이 여든여섯, 완치된 혈액암도, 식칼 갈 듯 강건한 엄마의 마음도 엄마의 노화를 막지는 못했는지 엄마는 이제 여행을 못 가신다. 손뜨개로 만들어진 촘촘한 보라색 꽃모자가, 챙이 넓어서 바닷가에서 썼던 베이지색 망사 꽃모자가 이제는 자기의 역할을 하지 못 하고 있다. 매년 4월이면 방바닥에서 선택을 받던 수십 개의 꽃 모자는 먼지가 뽀얗게 앉은 채 행거에 걸려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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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이 턱턱 막힐 것 같았다.

벚꽃이 차 창문을 애무하듯 사르르 떨어질 때, 운전을 하고 갈 수가 없었다. 내 마음을 알았을까?

-막내야 저기 사쿠라 많이 떨어진 곳에 잠깐 차 세우자.

-사쿠라?

-벚꽃이 사쿠라여. 이건 겹사쿠라여. 고스톱 화투에 그려진 꽃 말이여.

-고스톱을 그렇게 치시더구먼... 엄마는 이렇게 아름다운 풍경을 보고 고스톱 화투장을 말하누?


눈 깜짝할 사이 만개한 벚꽃이 후드득 떨어지면 내 마음이 성급하다.

겹사쿠라가 하늘에서 휘날리면 마음이 급했다. 그 아름다운 풍경을 나누는 사람이 엄마여서, 여행을 못 가는 엄마와 딸에게 하늘에서 분홍 눈꽃을 퍼부어 주는 날이면 나는 급했다.

-엄마, 옛날이야기 해주세요.

화수분처럼 터지는 엄마의 이야기가 과거 깊숙이 들어가고 백수 아버지 이야기로 넘어갈 때, 차 창문을 열고 왼 손 쭈욱 내밀어 손바닥으로 사쿠라 꽃잎을 받아낸다.

-깔린 게 꽃잎인데, 뭘 떨어지는 꽃 잎을 받으려고 하냐.

엄마는 힘든 다리를 끌고 내려가서 양 손 가득 벚꽃의 잔해를 들고 오셨다.

잠시 고개를 돌려 흩날리는 벚꽃에 아이처럼 반색하는 것이, 엄마의 한숨을 걷어내는 행위인 것을 엄마는... 모르는 거다.


1960년대 말, 베트남전에 참전했던 남편은 끝내 돌아오지 못했다. 남편의 전사 소식을 전하러 온 남자가 집에 눌러앉아 폭군처럼 군림하고, 혼자 힘으로 아이 둘을 먹여 살리느라 슬퍼할 겨를도 잊고 산 어느 날, 단아하고 고운 여인(김서형)이 찾아와 내게 누드모델이 되어달라는 제안을 했다. 최고의 조각가로 명성이 자자했던 남편은 병을 얻으면서 다른 사람이 되어버렸다. 고향으로 낙향한 후로는 작업도 접고 삶의 의지마저 꺾이고 말았다. 그이(박용우)에게 아무것도 해줄 게 없어 안타까움만 쌓여가던 어느 날, 한 여자가 눈에 들어왔다. 어쩌면 우리, 또다시 찬란한 날을 꿈꿀 수 있지 않을까. 모든 것이 끝났는데도 아내는 나를 위해 모델을 찾았다고 한다. 기대의 끈을 놓지 않으려는 아내에게 떠밀려 오랜만에 작업실을 찾았다. 아내가 찾은 모델(이유영)은 내가 그토록 원하던 이상적인 비율을 가졌다. 하지만 이미 굳어버린 이 손으로 뭘 할 수 있단 말인가. 과연 나는 다시 조각을 할 수 있을까?-영화 <<봄>>


[봄]을 사랑하고, 4월이 그냥 좋은 나는 청소년 관람불가 영화에서 흥미를 얻지 못했다.

나는 그 영화에서 대물림되는 가난과 악습을 보고, 아픈 자는 더 아프고 슬픈 자는 더 슬퍼지는 것을 보았다.


엄마는 화려한 꽃 모자를 머리에 쓰고 여행지를 걷다 보면 머리에 땀이 찬다고 했다.

-더운데 왜 모자를 써요? 사람들이 엄마 아픈 거 다 알잖아. 그냥 쓰지 마요.


늘 그랬다. 그냥 들어만 주어도 되는 답이 없는 엄마의 말에 나는 해답을 주려고 했다.

굳어버린 손, 근육 없는 팔, 걸을 수 없는 약한 다리를 가진 엄마도 여자인 것을.

꽃 모자를 쓰고 걸어야 엄마는 찬란한 것을.

모든 것이 끝난 그 시점에서도 엄마는 [봄]을 기대했고 [4월]을 기다렸는데, 나는 엄마의 이야기에서 흥미를 얻지 못했다. 나는 엄마의 이야기에서 아픈 자는 더 아프고 슬픈 자는 더 슬퍼지는 것을 보았을 뿐이다.


엄마는 다시 여자가 될 수 있을까?

엄마는 다시 여행을 갈 수 있을까?

다운로드한 영화 <봄>이 나의 시선에 들어오지 않는다. 나는 엄마를 생각하고 엄마의 꽃 모자를 그리고 있다.


-엄마는 벚꽃이 왜 좋아?

-너는 왜 좋아하냐?

남편이 똑같이 백수였던 엄마와 나의 삶은 지나치게 닮아있었다.

가난하고 힘든 삶을 산 부모가 유언처럼 내뱉는 말이 [너는 엄마처럼 살지 말아라]인데,

어릴 때는 몰랐다. 엄마의 유언 같은 비장한 문장이 넋두리로 들리고 지겨웠을 뿐인데,

이제는 알 것 같다.

여자 가장으로 살아가는 삶이 혹독한 겨울 같아서 그렇게 봄이 오는 길목에서 벚꽃 닮은 옷을 입고 벚꽃 닮은 모자를 쓰고 어린아이처럼 설레며 [봄]을 맞이하는 이유를... 이제는 알 것 같다.


-엄마, 꽃 모자가 너무 많다. 나에게 물려줘요. 이제.

-그래, 이제 쓸모도 없는데...

엄마는 가장 아끼는 모자를 물기 가득한 물티슈 한 장 꺼내서 먼지를 닦아주었다.

-막내야, 이 모자는 엄마가 아까워서 못 쓴 건데, 너 가져가라.

-엄마, 살이 빠지면 머리도 작아지나, 제게는 작은데요. 엄마가 살이 빠지니 머리도 작아졌나...


늘 그랬다. 해답을 알려주는 것이 얼마나 무모하고 쓸데없는 일인데, 생각하지 않고 하는 말은 한가닥 남은 엄마의 찬란한 봄을 빼앗아 갔다.

힘없이 건네받은 쓰지도 않을 그 꽃 모자가 내 방 행거로 옮겨지고 내 시야에 들어올 때 생각하지 않고 뱉은 말이 비수가 되어 마음이 쓰였다. 자격지심 되어버린 문장을 해결해야 했다.

봄처럼 엄마에게 전화를 건다.

-엄마! 나도 살이 빠지나 봐. 보라색 모자가 잘 맞아요. 아침 식사는 했어요?

-엄마! 오늘은 봄처럼 예쁜 날이에요. 드라이브 갈래요?

엄마는 막내가 노력하는 것을 안다.

-오늘은 그 모자를 쓰고 나오렴. 사진 찍자.


보라색 모자와 어울리는 옷이 있던가.

도통 엄마와 나의 옷 입는 취향은 다르다. 내가 따라갈 수 없는 없는 단아함을 숭배하는, 보라색 우아한 꽃 모자를 도통 쓸 수가 없다.

파란색인 듯 보라색인 듯 채도가 낮은 옷 걸쳐 입고, 어울리지 않은 보라색 챙모자를 손에 걸쳐야 했다.

절대로 내가 쓸 수 없는 이유는 두상 때문이 아니라, 엄마가 가지고 있는 꽃모자의 세계를 짐작할 수 없기 때문인지라, 나는 도통 그 모자를 쓸 수 없다.


-막내야, 보라색 꽃 모자가 잘 어울린다. 엄마는 꽃 모자가 좋다. 챙이 넓은 꽃 모자를 쓰면 부자가 된 거 같아.

KakaoTalk_20201015_154839843.jpg 엄마는 주말의 명화를 너무 많이 보셨다.


나는 영국의 게으른 인디 록밴드 멤버가 느지막이 집을 나서면서 머리에 얹고 나온 모자를 보면 기분이 좋았다.

흑백 영화 속에서 볼 수 있는 클래식한 모자를 보면 마음이 놓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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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명 모자 브랜드를 소유한 볼맨 햇 컴퍼니 CEO, 돈 론지오네는 모자 판매량이 증가하는 요즘 추세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경제 사정이 어려워 값비싼 의류가 부담스러울 땐 효과적인 액세서리가 인기가 많습니다. 모자가 답입니다.”


엄마도 그랬을까? 모자를 쓰면서 돈 좀 버는 중년 여성으로 보이길 기대했을까?


보르살리노 재단의 큐레이터 엘리사 풀 코는 영화를 만드는 이들은 언제나 모자의 영향력에 대해 가장 잘 이해해왔다고 말했다.

“모자는 다른 어떤 옷과도 다릅니다. 얼굴과 가까우니까요. 겉모습과 내면 사이에 낯선 연결고리를 만들어내죠. 당신이 모자를 쓸 때마다 완전히 새로운 이야기가 만들어지는 겁니다.”


식칼 들고 주방에서 살았던 엄마가 우아하고 단아한 옷을 입기 시작한 것이 언제였을까?

화장기 없는 얼굴로 도마와 씨름했던 엄마가 분칠 가득한 얼굴에 화려한 모자를 쓰고 다닐 때 나는 낯설었다.

엄마가 모자를 쓸 때는 아름다운 흑백영화도, 록 밴드의 멤버도 떠오르지 않았다. 모자를 써야만 하는 엄마의 머리가 마음에 쓰일 뿐이었다.


엄마는 꽃 모자가 있는데 또 사고, 또 샀다.

그뿐인가. 그에 맞는 옷도 또 사고 또 살 때 나는 해답을 주었다.

-엄마, 또 샀어? 이미 10개도 넘게 있잖아. 번갈아 쓰면 되지. 왜 자꾸 모자를 사요!

엄마는 가장 예쁜 보라색 원피스를 입고, 진한 보라색 꽃 모자를 눌러쓰고 나가면서 말했다.

-막내야, 이 모자가 끝이야. 이제 안 살 거다.



이제, 챙이 넓은 모자를 눌러쓴 엄마의 이야기는 끝이 났다.


예브게니 시인은 말했다.

사람이 죽으면, 홀로 죽지 않는다고.

그가 맞은 첫눈도 그와 함께 죽고, 그의 첫 입맞춤, 그의 첫 싸움도 같이 죽는다고.

각자가 가진 비밀스러운 세계를 가지고 가는데, 그 세계에는 각자의 최고의 순간이 있고, 고뇌의 순간이 있다고.


큰일 났다.

사람이 죽으면 홀로 죽지 않는다는 예브게니의 시인의 말이 맞을 것 같다.

엄마가 죽으면, 엄마의 첫사랑도 엄마의 식칼도 엄마의 싸움도 같이 죽을 것이다.

하필, 가장 아름다운 꽃 모자가 나에게 있어서 매일 엄마가 보고 싶은데. 하필 엄마는 꽃 모자를 쓰지 않는다.


엄마가 말해준 은밀하고 비밀스러운 세계가 꽃모자를 타고 나에게 왔다.

엄마의 흑백 세계가 꽃모자를 타고 나에게 넘어왔다.

꽃 모자는 죽지 않을 것이다.


나는 봄이 좋은데

나는 4월이 좋은데

나는 벚꽃이 좋은데

나는 엄마가 좋은데


큰일 났다.

엄마의 보라색 꽃 모자가 나에게 있어서.

엄마 손을 만질 수 없는 저 먼 곳으로 엄마가 가버리면, 나는 어떡하지.


사람이 죽으면 그가 가지고 있는 세계가 죽는다는 가차 없는 유희의 법칙을 논한 예브게니는 알았을까.

사람이 죽어도 가져갈 수 없는 세계가 있다는 것을.

엄마는 나에게 그 세계를 안겨주었다.


우아한 보라색 꽃모자와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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