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특한 시점, 겨울

시(詩)가 말을 걸어오다.

by Sabina

대학 재학 중 쓴 노랫말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이 김광석에 의해 불려지면서 더 알려진 남자는

『사랑이 다시 내게 말을 거네』산문집에서 [시바]라는 비속어를 거르지 않고 쏟아냈다.

이 새벽에 울고 싶은 사람도 있다/ 이 새벽에 울고 싶은데 꾹 참는 사람도 있다/ 모퉁이를 돌아서 드로프스 하나 잘 견딘 소녀처럼/맑은 뒷모습도 비스듬히 있다/모든 게 내 탓 아니다/너희의 탓도 아닌 곳에서 정확하게 꽃이 피기도 한다/웃자고, 웃자고 약속하는 미래가 온다/갑자기 하느님에게 엿을 대접하고 싶다/다만 오늘의 하느님, 비가 안 와서 다행이다. 시바


책을 선물한 제자는, -선생님 이 산문집 괜찮으시겠어요?

욕이 난무하고 자신의 비루함을 종교로 이양하는 류근의 자세에 적잖이 놀란 자세를 취하며 -선생님이 원해서 사 왔지만... 괜찮으시겠어요?

-[시바]를 라임 (rhyme)으로 이해하지 뭐.


사실, 류근의 외모를 좋아했지 아마.

하필 책날개에 소개한 그의 이력 위에는 날카로운 콧잔등을 가린 덥수룩한 머리가 아주 자연스럽게 휘날리고 있었다. 책을 사주겠다는 제자에게 나는 류근의 산문집을 원했다.


무협지 읽느라 밤을 새웠다. 연탄가스에 취한 것처럼 몸이 안 좋다. 술에 취하지 않으니 닥치고 있어도 몸이 절로 취중을 도모하는가, 학교 가야 하는데, 이 상태로라면 수업 중에 구토하게 될지도 모르겠다. 주화입마... 강호에서 은퇴할 날이 머지않았다.
우리 동네서 옛날에, 사기 치다가 일곱 명 죽었는데 나도 이러다가 필화 겪을 것이다. 이병일 시인이 보내준 쌀, 아직 한두 되 남았다는 걸 '지레' 고백하지 않으면 조만간 쌀 한 톨에 한 대씩 때리겠다고 나서는 분 계실 것 같다. 하지만 사람이 쌀만 가지고 살 수 있는 게 아니다. 무릇 사람이란 쌀보다 더 소중한 그 '무엇'으로 사는 것이다. 그 무엇... 연탄불 또 꺼졌다. 시바.『사랑이 다시 내게 말을 거네』

나의 스무 살, 자취를 막 시작했을 때 목발 두 개로도 잘 걸었던 젊은 혈기를 가진 나는 하루에 세 번씩 연탄불을 갈았다. 연탄가스 마신 것처럼 몽롱하게 잠이 들고 몽롱하게 잠이 깨면 최루탄 가스 가득한 대학교 정문에서 달리기 못한 죄로 최루탄 가스 가득 마시고 주저앉아 울었다.

도망가지 않아도 잡아가지 않는 장애인 구조인지라, 긴박함 따위 없지만 마스크 쓰지 않고 걸어 간 죄에 최루탄 가스 제대로 마시면 눈물, 콧물 범벅이 되어 유행했던 스모키 화장이 다 지워졌다. [시바]

그때, 나는 류근이었다. 입으로 되뇌었나? 중얼거렸나? 나는 그때 욕을 잘했다. 쌀보다 더 소중한 그 무엇이 [자유]라고 외치면서 위선 덩어리를 피해 클럽을 다니던 그때, 나는 욕을 좀 잘했다.


1980년, 연탄 때는 그때는 몰랐다.

지금은 왜 [연탄]이라는 단어가 [가난]이라는 단어로 직결되는 걸까.

연탄을 생각하면 자동적 무릎반사처럼 누가 내 심장을 툭 건드리나 보다.


방 하나에 여섯 식구라니, 엄마는 고등학생 오빠들을 위해 막내인 나를 방이 많은 큰집으로 보내서 살게 했다.

남자만 있는 큰집에서 연탄가스를 먹으면 동치미 국물 잔뜩 먹이고 그래도 몽롱하게 취해 있으면 가끔씩 집으로 돌아갈 수 있는 기막힌 행운이 주어진다.

정신이 말짱해지면 다시 큰집으로 돌아가 구석방에서 나뭇잎 흔들리는 소리에 가슴을 졸이고, 마루 복도를 걸어오는 의문의 남자 발걸음에 이불을 뒤집어쓰고 울 때, 어린 나는 [미투]를 경험했다.

연탄가스를 먹어야 집에 갈 수 있는데, 잘 사는 큰집은 연탄가스 새는 통로를 다 막아버렸다. 목화 이불 뒤집어쓰고 울어야 잠이 드는 2월의 끝날, 구들장이 터질 것 같은 온돌의 힘에 왼쪽 종아리가 빨갛게 타올랐다.

화상이었다.


[연탄]이라는 단어가 가난으로만 직결되면 좋겠는데, 나에게 연탄은 지우고 싶은 [흉터]였다.


술 취하지 않을 때만 시를 썼다는 류근 시인은 시인으로 등단한 지 18년 만에 시집을 냈다. 중학교 장래 희망에 '시인'이라고 쓸 때부터 욕을 하지 않았다는 류근 시인은 『사랑이 다시 내게 말을 거네』산문집에서 문장의 끝마다, [시바]를 붙였다.


성도에서 집사로 승격할 때, 나는 욕을 끊었다.

교회 집사에서 권사로 승격할 때, 나는 언어를 승화했다.

이제는 상담사로 살아가고 작가로 살아가면서 문장의 어미를 부드럽게 처리한다.

넘어지고, 억울하면 [주여]를 외친다.


쌀쌀해지는 날씨가 쓸쓸해진다고 느껴질 때 류근 시인을 만났고, 그의 시를 만났고, 그의 [시바]를 만났다.

제자의 걱정은 기우였다.

[시바]는 그의 라임(rhyme)이 맞았다. 그의 시어에 반감이 들기는커녕,

[시바]가 붙어있는 상황이 나의 80년대를 소환하고 나의 [연탄]이 떠오를 때 결심했다.

흉터로 기억되는 화상이, 가난으로 직결되는 연탄이, 부정어로 인식되지 않아야 한다.

시인 박준은 『겨울 바다』를 가르쳐 주었고, 나는 봄이 올 때까지 그 노래를 과연 익힐 것이다. 지구에 돌아오자 비로소 배워야 할 것들이 반짝인다. 연탄은 세 장 남았고, 방세는 겨우 두 달 밀렸다.『사랑이 다시 내게 말을 거네』


-류근 시인의 언어를 직설적으로 읽기만 해라.

그의 [시바] 시(時)들이 점층법으로 가슴을 타고 들어올 때, 이면의 의미를 모른 채 질문하는 제자에게 [시바]의 마음으로 응대했다.

-방세가 겨우 두 달 밀려서 안도하는 시(時)로 읽으면 안 되지!


뭐라니..

2000년에 태어난 제자는, 1968년에 태어난 나를 이해할 수 있을까?

500원짜리 동전 크기만한 화상이 희미해지고 날씨가 쌀쌀해지면 알아서 보일러가 가동이 되는 시대에 살고 있는데, 나는 류근 시인의 언어를 이해했나?

거친 시어를 라임으로 이해한다고, 화상의 크기가 희미해서 안 보인다고 비로소 배워야 할 것들이 반짝이는가?


겨울이면 춥다. 유난히 춥다.

생각이 깊어진다. 유난히 깊어진다.


어제는 많이 아팠고 오늘은 조금 아프다고 말한 류근 시인은 양말을 두 켤레 신고 내복을 입고 목도리까지 두르고서 길림성 차간호(湖)의 겨울 어부처럼 빈방을 견디겠다고 했다.


나는 배운다.

[시바] 시에서 배운다. 때로는 나에게 벌을 주는 것에도 예의가 필요하다고 말하는 시(時)에서 배운다.

류근 시인은 부정어 가득한 과거를 이겨 냈을까.

류근 시인이 공중파에서 단정한 머리로 한국의 역사를 설명할 때, 그의 [시바]가 빛을 발하는 것을 보았다.


술이 없으면 못 살 것 같은 그의 과거가 지극히 평범한 중년의 남자로 앉아있는데,

가난과 장애를 이겨 낸 내가 지극히 평범한 중년의 여자로 살고 있는데,


세상... 살 만하다.



20201013. sabi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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