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특한 시점, 가을

낙엽이 말을 걸어오다.

by Sabina

"손대면 토옥 하고 터질 것만 같은 그대 봉선화라 부르리"

지긋한 나이 티 내기 싫고, 아이들과 지내온 세월이 30년인지라 신 세대라 불리고 싶은데,

트롯 열풍 때문일까, 봉선화 연정이 나의 입술을 타고 조용한 숲에서 울리고 있었다.



나뭇잎이 제법 많이 떨어진 곳을 차를 타고 지나가게 되면 의도적으로 차를 세운다.

나는 낙화(落花), 낙엽(落葉)처럼 떨어진다는 의미를 알고 있다.

녹록지 않은 세월, 장애인으로 살아오면서 떨어지는 것에, 고개 숙인 사람에게 유독 집착하는데

목적지가 아닌 낙엽이 우수수 한 곳에 차를 세우고 하염없이 보다가 결심했다.


걸어보자


비가 지나간 자리일까, 바스락 거리는 느낌을 기대했는데.

운동화 밑창이 미끄러운 걸까, 신발 바닥에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는 나뭇잎을 털어내느라 걸을 수가 없다.

목발 고무가 미끄러운 걸까, 한 걸음 한 걸음 내딛는 호흡이 느려지고 있다. 걸을 수가 없다.


이형기 시인의 [낙화]는 슬프지 않았다.

가야 할 때가 언제인가를
분명히 알고 가는 이의
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삶의 목적지를 정확히 알고 있는 시인의 낙화는 슬프지 않았다.


레미드 구르몽의 [낙엽]은 슬펐다.

시몬, 나뭇잎 저 버린 숲으로 가자
낙엽은 이끼와 돌과 오솔길을 덮고 있다
시몬, 너는 좋으냐 낙엽 밟는 소리가
낙엽은 버림받고 땅 위에 흩어져 있다
시몬, 너는 좋으냐 낙엽 밟는 소리가
해질 무렵 낙엽 모양은 쓸쓸하다
바람에 흩어지며 낙엽은 나지막이 외친다
시몬, 너는 좋으냐 낙엽 밟는 소리가
발로 밟으면 낙엽은 영혼처럼 운다

멀리서 바라본 낙엽의 빛깔이 해를 받아 붉은 피를 토해 낼 때, "손대면 토옥 하고 터질 것만 같은 그대 봉선화라 부르리" 트롯을 흥얼거리며 기대한 것은 바스락바스락 밟는 소리였다. 밟으면 토옥 터질 것 같은 낙엽이 신발 밑창에 아무 소리 못하고 터져버리고 영혼처럼 울기를 기대했는데,

웬 걸... 낙엽이 반항한다.

이끼와 돌과 오솔길을 포함하고 살았던 긴 세월, 떨어지고 썩어서 다시 나뭇잎으로 살아나는 질긴 목숨을 보여주고 있었다. 낙엽은.


내가 기대한 것은 작은 원형 목발 고무에도 바스러지고, 상체보다 마른 다리의 힘으로도 밟기만 하면 부서질 낙엽이었는데, 질기다.


구르몽 시인은 시몬을 불렀다.

버림받고 땅 위에 흩어져 있는 낙엽은 영혼처럼 우는데, 우리도 언젠가는 해질 무렵 낙엽이니 어서 와서 낙엽 밟는 소리 들어보라고 시몬을 불렀다.


나는 이끼와 비를 흠뻑 먹어 질겨버린 낙엽 위에서 한 걸음도 걸을 수 없었다.

애꿎은 시몬에게 화풀이를 했다.

시몬, 너는 아느냐 낙엽이 나를 거부하는 것을

시몬, 너는 아느냐 낙엽이 울지 않는 것을.

질긴 놈...


장애를 가지고 산다는 것,

이혼녀로 산다는 것,

아들을 잘 키우고 싶은 가장이라는 것,

세월의 주름살이 깊어지는 만큼 한숨이 깊어지는 엄마가 있다는 것.

바스락바스락 밟힐 줄 알았겠지.

수입이 줄어들 때 어떻게 살아가겠냐고 위로하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바스락바스락 떨릴 때,

년, 월, 일, 시간마다 질겨지고 있는 나를 보고 사람들이 말했다.

부러워요.

삽과 호미의 잔인함을 견뎌낸 낙엽은 안다.

나무 꼭대기에서 회전하며 출항하는 녹색천사의 나뭇잎은 안다.

땅에 떨어져 밟혀도

버림받고 울고 있는 영혼으로 살 수 없어서

비와 이끼를 가득 머금고 질겨진 나뭇잎은 안다.

조금만 견디면, 다시 초록향기 뿜어대는 나뭇잎이 되어 저 꼭대기에서 하늘하늘 춤추는 시간이 온다는 것을 낙엽은 안다.

바스락 거리지 않는 낙엽이 목발 고무와 신발 밑창을 거부할 때, 잠시 숨 고르기를 했다.

그 누구도 나를 파괴할 수 없는 고요한 선물이 찾아온다.

견디고 버텨 낸 세월이 희망이라는 단어로 찾아온다.


시몬, 너는 아느냐.

낙엽은 버림받고 울고 있는 것이 아니라 자연의 순리에 적응하는 질긴 생명력이라는 것을.

시몬, 너는 아느냐.

잘 되면 부럽고 못 되면 비아냥거리는 세상에서 땅에 떨어져 밟혀 사는 낙엽도 생명이 있다는 것을.

낙엽은 그렇게 네 개의 발도 꼼짝 못 하게 하는 질긴 힘이 있었다.

나는 이끼 묻은 낙엽 위에서 세상의 이치를 보았다.


바람이 제법 분다.

사람이 많이 다니는 길가, 차가 쌩쌩 달리는 찻 길,

나무에서 떨어진 나뭇잎 하나가 도로 위에서 살포시 누워있다.

By. 경애

고개 숙인 사람, 울고 있는 사람, 한숨을 깊게 내 쉬는 사람을 보면 같이 우는데,

도로에 떨어진 저 나뭇잎은 곧 사람의 신발에 밟힐 것이고, 그냥 달리기만 하는 차 타이어에 밟힐 것이다.

바스락 거리는 소리가 좋아서 낙엽 길을 걷고 싶지만,

나뭇잎이 하나 아닌가.

살려야 한다.

살포시 주워 책갈피에 넣어야겠다.

시몬이 좋아하는 소리가 난다.

바스락바스락...



사람들은 주기만 하는 나를 이해할 수가 없다고 했다.

[실속이 없는 사람. 바보 같은 사람. 그렇게 살면 안 된다.]

장애인으로 살아 본 경험이, 이혼녀로 살아 본 경험이, 암환자 가득한 집에서 살아 본 경험이,

그리고 울고 있는 아이가 웃고 있는 경험이, 자해했던 팔 뚝에 레터링 문신을 하고 웃고 있는 아이가,

이혼하고 다시 재 결합하는 부부가 나를 이해한다고 했다.

내가 살아온 질긴 삶이 빛을 발하고 있다.



나뭇잎 한 장이 도망가기 전에 주워야겠다.

아끼는 책, 가장 사랑하는 문장이 살아 숨 쉬는 문장들 사이에 살포시 넣어야겠다.

맥박이 느려지고 흐트러졌던 생의 리듬이 제 자리를 찾아가는, 살아있는 문장 사이에 넣어야겠다.

앉아서 세상을 보고, 더디게 걸어서 보이는 것이 많은 나는 낙엽과 한없이 대화했다.

나의 시점은 낮고

나의 시점은 독특하다.

그래서 낙엽이 보인다.


가을이 깊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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